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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건강과 겸손에 대하여

by 격암(강국진) 2013. 5. 13.

2013.5.13

 

최근에 공원을 걷다가 바보도 기억할 수 있는 삶의 원칙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무엇보다 지쳐있고 어리석은 자신을 위한 생각들이었습니다. 바보가 사는 법은 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만 여기에 써서 기록해 둡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여러가지 답들이 세상에는 있다. 그것들은 서로 연결되어져서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일 때도 많고 때로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마치 도박중독자가 도박사기술을 가르치는 것처럼 작게 보면 좋은 기술이지만 크게 보면 망하는 길일 때도 있다. 정말 도박하는 기술이 우리를 구원할까? 도박을 잘하게 되면 도박을 더 많이하게 되서 결국 망하게 하지 않을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도박을 잘하는게 아니라 도박을 안하는 것이 아닌가? 내 생각에 이 세상에는 꼭 기억해야 할 원칙은 두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나머지는 이 원칙을 어떻게 실행하고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가 있다.  

 

그 두가지란 다음과 같다. 

 

첫째, 건강하게 살아라. 

 

둘째, 겸손하게 살아라.

 

물론 이런 이야기는 누구나 많이 들은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같은 이야기야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케이블 티브이에서 건강약품 선전과 함께 나오고 있을 이야기이며 사람은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유치원생이 아니라면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말들자체가 아니다. 이 말들이 놓여지고 의미를 만들어 내는 문맥이 중요하고, 이 말들의 너머로 어디까지 왜라는 질문을 던질 것인가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건강이 중요하다라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은 당연하지라고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런 저런 이유를 댈 것이다. 왜 건강은 중요한가. 건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건강은 우리에게 이득을 준다. 그러나 건강이 뭔지를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건강하게 살아라.

 

너무나 너무나 건강에 대해 강조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알고 보면 그 사람은 건강을 어떤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즉 건강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고 하기 보다는 어떤 것의 수단으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예뻐보이려면, 성공하려면, 공부를 잘하려면, 진급하려면, 오래 살려면, 건강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렇게 건강을 어떤 것의 수단으로 보는 시각은 나아가 우리의 삶의 방식 자체에 연관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우리는 그것이 어떤 과녁을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어떤 목적을 위해 놓여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멋진 여자나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삶을 이루기 위해 살고 있다던가, 출세하고 유명해 져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얻기 위해 살고 있다던가, 부모님이나 어떤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훌룡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살고 있다던가, 권력을 가지고 어떤 원초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살고 있지 않은가? 돈을 벌어서 뭐뭐하기 위해 살고 있다고 해도 일단은 돈을 벌기 위해 살고 있지 않은가?

 

만약 삶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원칙은 그런 것을 달성하라라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건강이 필요하다라고 한다면 삶의 기본적 원칙은 공부를 잘해라라는 것이 될 것이고 우리는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한가라는 생각에서 건강도 필요하다라는 결과를 따로 얻을 것이다. 건강이 뭔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라면 그 목적이 달성될 때 우리는 그 수단이 필요없다. 서울가는데 차로 가건 비행기로 가건 가기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 

 

건강하게 살아라라는 것이 삶의 기본적 원칙이라는 것은 건강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건강에는 육체적 건강이 있고 정신적 건강이 있으며 나아가 사회적 물리적 환경안의 인간으로서의 건강도 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건강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바라며 나아가 더 커다란 인간으로서 사회적 물리적 환경 속의 인간인 내가 건강하기 바란다. 우리는 그럴 때 행복할 수 있으며 직업이나 돈이나 어떤 이름 같은 것이 우리를 떠나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게 되는데- 우리는 거의 잃는 것이 없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미래에 대한 불안중에서 부질없는 종류의 것들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건강한 인간이 되기 위해 살고 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걱정할게 있겠는가. 세상을 인간으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일텐데. 나는 세상을 나로서 매순간 만날 뿐이다. 건강한 나는 제대로된 반응을 보여줄 것이다. 

 

이런 첫번째 삶의 원칙에는 왜 그런가라는 것에 대한 답이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는 이 말들을 듣고 그것에 공감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그럴듯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시점을 언급할 수는 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다. 

 

생명에 대한 내 고민의 내용을 몇줄로 다 쓸 수는 없겠지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 알수 있는 것들을 몇가지 말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생명의 기본적 존재원리는 생명의 보존이라는 것이다. 생명은 변화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생명은 자기를 보존하려고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생명이란 마치 물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흩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세상의 불확실성과 싸워서 자기를 지켜나가는 패턴이 존재하는 현상을 가르키는 것이다. 생명이란 우리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파도처럼 그 물질들이 결합하여 자기를 지켜나가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건강이란 그 생명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신을 변화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감수성이다. 칼이 날아오고 있는데 피하지 않으면 찔려죽는다. 우리는 칼을 보고 피한다. 이런게 살아있기 위한 노력이고 건강을 지키는 것이다. 건강을 지키려면 자신의 내부와 외부를 살피고 거기에 뭐가 있는가를 느껴야 한다. 생명이란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마치 바람이 들어간 풍선이 외부의 압력에 따라 크기가 바뀌듯 주변의 환경에 따라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그 경계가 없다. 환경이 건강해야 그 생명도 건강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우리는 모두 어떤 면에서 장님이다. 어떤 바보가 자기 발을 보고 이건 무슨 맛있는 고기인가하고 그걸 칼로 잘라서 먹어버린다면 일단 아플것이고 피가 나서 죽게 될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런 바보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가 세상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전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더더욱 적게 본다. 그래서 결국 그 결과가 뻔한 참상을 만들어 내면서 서로가 서로를 아프게 하고 결국은 자기를 아프게 하면서 살아간다. 환경문제만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은가.

 

건강은 행복을 준다. 아니 건강과 행복이란 같은 것이다. 건강이란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우리가 통상 말하는 그 무언가가 실상 진정한 건강이라는 것 앞에서는 사소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먹기위해 요리를 하는 것이지 요리를 하기 위해 먹는게 아니다. 행복하기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이지 뭔가를 하기위해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다. 

 

겸손하게 살아라.

 

우리는 왜 겸손하게 살아야 할까. 우리는 왜 우리가 한정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생명이라던가 감수성이란 단어에서 대부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겸손하지 못해지는 이유 즉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이유, 마치 신처럼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실제로 잘나서 그렇거나 많은 것을 알아서 그런게 아니라 거꾸로 그 만큼 눈이 멀고 보이는 게 없기 때문이다. 

 

동네야구선수로 잘난척 하는 아이는 프로 야구선수들이 얼마나 대단한가에 대해 아는게 없거나 나도 프로 야구선수가 될수 있다고 믿지 않는 아이다.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는 통상 시험을 보고 이번 시험은 성공이라고 말하지만 전교에서 1-2등을 하는 아이는 늘상 이번 시험은 망쳤다고 말한다. 그들은 대개 훨씬 더 높은 곳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게 없으니 결국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 감수성을 가질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 태산처럼 크게 보이는 것 앞에서 장님으로 헛소리를 떠들고 있으면서 잘난척 하는 것이 바로 보통 인간의 모습이다. 그래서 장자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말라고 커다랗고 큰 것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하늘을 떠가는 붕새를 비웃는 매추리새끼가 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겸손하지 못하면 성장할 수가 없다. 겸손하지 못하다는 것은 말하자면 내 주변에 존재하는 무지의 장벽 그 바깥쪽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만 생각한다. 생명은 항상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확신은 우리를 어딘가에서 썩어가게 만든다. 

 

언젠가 아내와 대화끝에 나는 몇번이나 인생의 전성기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때 찾아온 사람은 불행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은 그 경험이 달콤하여 그 작은 우물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성공이 함정이 되고 결국 그들은 그 안에서 썩어 버린다. 그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생 수준에서 더 성장하지 못한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주변사람들이 언짢아 하는 경지에 이르러도 그렇다. 반면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은 계속 계속해서 자신의 한계를 허물어 간다. 

 

겸손하건 겸손하지 않건 우리는 정체기에 빠진다. 그것은 화이트헤드가 말한 성장의 삼단계중의 하나인데 우리는 때로 우리가 아는 세상에 대해 환히 알게 되었는데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는 답답한 단계에 이르른다. 이럴 때는 인생이 지루하고 이젠 더 뭘해야 할지 모르는 벽에 부딪히며 노력해도 왠지 퇴보만 하는 느낌이 든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모두 알속에 갇혀 있으며 모두 한계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겸손하게 산다고 해서 그런 단계를 거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겸손하면 우리는 우리의 알을 깨고 그 바깥으로 나갈 가능성이 클 것이다. 겸손하지 못한자는 자신을 구원해줄 복권이 눈앞에 날아와도 그것을 찢어버릴 것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울때 그 아이가 부모나 선생님이 주는 규칙에 따라서만 살게 하는 것은 아이를 새장에 가두는 일이다. 아이는 왜를 묻지 않고 로보트가 된다. 그런데 그런 것을 피하자고 아이에게 끝없는 자신감만을 불어넣어주면 이번에는 그 아이는 스스로 만든 새장에 갇혀서 나오지 못한다. 이 새장은 경우에 따라서 부모나 스승이 만든 새장보다 더 나쁘다. 부모나 스승의 새장은 그들이 그 아이를 사랑할 경우 나중에 바깥쪽에서 파괴가 가능하지만 자기가 혼자 만든 새장은 자기가 파괴하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 보면 한국에는 겸손이란 걸 배우지 못한 듯한 아이가 너무 많다. 그들은 정말 매추리알보다 작은 알속에 갇혀서는 세상넓은 줄 모르고 자신이 모든 걸 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 그들이 속한 사회에도 위협이 되는 폭탄으로 자라날 수 있다. 그들은 보이는게 없기 때문이다.

 

맺는 말

 

건강해야 한다던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고 그것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쉽지 않다. 철인경기에 나가고 초콜릿 복근을 자랑하거나 사람들에게 굽신굽신대기만 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건강과 겸손은 아닐것이다. 유명한 복서 마이크 타이슨은 엄청난 근육과 주먹을 자랑했지만 추행으로 물든 그의 삶이 건강하다고 말할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감수성의 부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건강하지 못해 보인다. 건강과 겸손의 길은 간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뜻을 다 몰라도 -한계가 있는 우리는 결코 모든 의미를 알 수 없는데- 건강과 겸손에 대해 기억하고 사색하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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