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5.18
즐거움이라는 것은 흔한 말이다. 그러나 이 즐거움이라는 평범하고 당연한 단어도 우리에게 생각할 것을 준다. 즐거운 것은 반드시 좋은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적어도 흔히 우리가 좋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관과 객관의 경계속에서 좋다와 즐겁다에 대한 혼동에 빠져들기 쉽다. 무심코 이건 좋은거니까 즐거운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생각해 보자. BMW나 페라리는 모두 비싼 차들이다. 그런 차들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세상에 많고 그러니 이런 차들을 좋은 차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나로서는 그런 차가 생긴다고 해도 그다지 오랜동안 그걸 재미있어 할 것같지 않다. 그냥 몇번 타보고 좋네 하고 말면 그만일 것같다. 이거 기름을 너무 먹네라던가 이차 수리비가 장난이 아닌데 운전하다가 긁히면 어쩌지라는 걱정이나 할지 모른다.
요즘의 나로서는 SUV나 캠핑카쪽이 훨씬 더 많은 상상력을 자극하게 만드는 차다. 그런 차가 있으면 자전거를 싣고 어딘가에 가보겠다던가, 어딘가로 가서 캠핑을 할거라던가 심지어 우리집 정원에 그저 세워두고 나의 작은 방처럼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차를 위해 차양을 살지 모르며 전국여행계획을 짤지 모른다. 이런 차가 내게는 즐거운 차다. 즐거운 차는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차고, 나로 하여금 여러가지 할 것을 만들어 주는 차다. 그러니까 다이아몬드 반지같은 것은 나에게 있어서 그 가격이 대단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저 돌멩이같은 가치밖에는 없는 것으로 그다지 재미있지 못한 좋은 물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동차를 예로 이야기했지만 물론 이 즐거움과 좋다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이라는 주제는 집을 고른다던가, 직업을 선택한다던가하는 큰일에서 주말에 어떤 드라마나 영화를 볼것인가, 산책을 나갈것인가 운동이라도 할 것인가 아니면 사무실에서 가져온 일거리에 대해 생각할 것인가하는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다 연관이 되어져 있다. 우리는 어떤 그림에 대해 전혀 느껴지는 것이 없어도 그 그림이 10억이나 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게 좋은건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생각의 영향을 받는다.
문제는 이런 사회적 선입견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선입견에도 있다. 오늘의 나는 남과 다를 뿐만 아니라 어제의 나와도 다르다. 그래서 전에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도 읽고 또 읽다보면 이제는 재미가 없게 된다. 반면에 책장구석에 박혀서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하던 책이 어느날 펼쳐보니 뜻밖에 무척 마음에 들게 되는 일도 있다. 즐겁다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고정된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이러저러한 걸 즐겁게 생각하지만 그걸 즐기는 가운데 나는 또 변해간다. 마치 액션영화만 실컷보고 나면 다큐가 보고 싶지 액션은 보고싶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행복하기 위해 즐거움은 중요한 것이지만 우리는 흔히 즐거움을 무시하고 오해한다. 우리는 관습과 기억에 의존해서 산다. 그래서 좋다는 것을 즐거운 것으로 여기고 즐거웠던 것을 지금도 즐거운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는 가운데 정작 내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뭘 좋아하는가. 무엇이 나에게 즐거운 것인가. 언뜻 보면 너무나 그 답이 쉬울 것같은 이 질문은 생각보다 답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내가 뭘 좋아하는 가를 알고 싶으면 자신이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를 스스로 관찰하라는 말이 있다. 무엇이 나에게 즐거운 것인가를 알고 싶으면 관찰과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는 흔히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걸 좋아해라고 생각하지만 여가시간에 시간을 죽이기 위해 자신이 하는 것을 관찰해보면 굉장히 충격적인 결과를 알게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당신이 한 여자를 아주 사랑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곰곰히 기록하고 생각해 보니 한가한 시간이 있을 때마다 다른 여자와 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거나 그 여자와 앞으로 뭘 할까만 생각하고 있다면 어떨까. 당신이 지금 이 순간 사랑에 빠져 있는 대상은 어느 여자일까.
고정된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즐거운 시간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자유시간이나 여가시간도 의무와 권한과 부담으로 채워지게 만든다. 우리는 어느새 인간관계를 즐길 수 없고 자기 직업을 즐길 수 없으며 자기 집을 자기 차를 자기 옷을 즐길 수 없다. 그러니까 자기 삶을 즐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실은 그것들은 이미 너무 오래 고정되었던 나머지 백번이나 이백번쯤 읽은 소설처럼 아무런 자극을 주지 않고 상상력도 펼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생명은 고정되면 죽는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당신의 연인이나 배우자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부러워 보이면 당장 직업을 바꾸라던가 차를 바꾸라는 것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익숙한 것과도 새롭게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그걸 멈추는 순간 우리는 죽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재미가 없는 것은 죽은 것이다.
즐거움이란 단어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변해가는 우리 자신에게 주목하게 만든다. 즐거움이란 외부와 내부의 세계가 만나는 가운데 생기는 것이다. 한번 본 영화는 두번째로 볼때는 달라진다. 이미 그 영화는 일부분 내 안에 들어와 있다. 즐거움이란 외부세계이상으로 나의 내부세계에 의해서 탄생되는 것이다. 그러니 즐거움을 느끼며 살려면 바깥 세상 이상으로 자기 내부 세계에 대해서도 관심을 둬야 한다.
자기를 지킨다던가 자기를 발견한다고 하는 것도 그래서 사실은 우리 자신을 어떤 고정된 존재로 파악하고 거기에 머무르려고 하는 노력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엄숙한 성직자나 고승이나 연로한 노학자처럼 어떤 단계나 경지에 이르러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것이고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를 죽이는 것이 된다. 그런 사람은 재미가 없다. 그런 사람은 살아있지가 않다.
우리는 왜 즐거움이 필요할까라는 것은 마치 우리는 왜 행복해야 할까라는 질문처럼 대답하는게 의미가 없거나 우리의 본성이 그래서라고 대답해야 할 종류의 질문인 것같다. 어쨌건 우리는 즐겁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산다. 그것이 우리가 그렇게도 자주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시시하고 지겨운 것에 신경쓰거나 공포에 빠져서 벌벌 떨고만 있는데 행복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즐겁고 재미있게 살자. 이 당연해 보이는 말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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