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3.12.
언젠가 딸아이가 나에게 자신의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내 딸아이에게 너의 고향이 어디라고 말해주기가 곤란했다. 고향이라는 개념은 가족이 대대로 한 곳에 살거나 어린 시절에는 한 곳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커서는 타지로 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썼을 때는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요즘처럼 사람들이 자주 이동하는 시대에는 뭐라고 하기가 곤란하다.
즉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은 분명한 답을 가지지만 내 딸아이의 고향은 어디인가 같은 말은 애매하다. 나만해도 부모님의 고향인 경상도가 아니라 서울에서 태어났고 우리딸은 서울에서 잉태되고 부산에서 태어나서 돌이 되기전에 이스라엘에서 몇년 미국에서 몇년 일본에서 몇년하는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굳이 고향의 사전적의미는 이거라면서 따져서 그 질문의 답을 찾는다고 해도 그런 답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이런 식으로 시대가 바뀌면서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말이 의미가 바뀌는 경우는 많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변화를 자각하지 못하기에 잘못된 인식과 판단을 하게 되는 일도 있는 것같다. 압도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숙한 말들, 개념들을 통해서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우리 고향사람이라며 하는 식이다.
그런 것중에는 결혼이나 가족같은 말도 있다. 백년전쯤의 경우 결혼이라는 것은 가족이라는 최소단위의 사회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었으며 당시에는 가족없이 홀로 떨어진 개인은 인간답게 살기가 어려웠다. 혼자서 집짓고 농사짓고 옷을 만들고 음식을 만들 수는 없었고 특히 자식을 낳지 않고 홀로 사는 사람은 사는 것이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종종 막연히 결혼이나 가족같은 말이 시대를 초월해서 단단하게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느끼지만 실은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오늘날은 현대의 발명품이 있고 현대의 사회적 시스템이 있어서 개인으로 생존하는데 별로 어려움이 없으며 종종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편리한 점이 많은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전에는 개인적으로 직접 아는 사람들에게 특히 가족이나 친구에게 더 많이 의존했는데 지금은 그것을 공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곤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음식이 없어도 슈퍼마켓에 가면 수없이 다양한 음식이 있고 수없이 다양한 물건들이 있다. 배우는 것도 부모의 가르침이 있는 가족안에서 배우지 않아도 유아원에서 대학원까지 교양교실에 이르기까지 많은 배움의 장소가 있다. 요즘은 돈만 주면 사람들이 안해주는 게 없으며 전통적으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해결되었던 것이 대부분 그 테두리를 넘어서 해결된다. 심지어 결혼식을 위해서 가짜 하객을 돈을 주고 구하는 일도 이젠 놀라운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닌 시대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가족은 소중하고 결혼제도에는 많은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가족들이 해주던 것이 필요없어진 면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더욱 절박해 진 면도 있다. 현대인들은 과거의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외롭다. 무의미의 바다에서 길을 잃기도 쉽다. 그런 때문인지 자살률도 매우 높다. 어리거나 젊을때는 실감하지 못할지 몰라도 나이가 들어가면 더더욱 가족이 절박해 질 수 있다. 그러나 추억을 가진 가족, 수없이 서로 부벼대서 편해진 진짜 가족이란 나중에 한순간에 만들어 낼 수 있는게 아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결혼제도에 맞지 않게 버릇이 망쳐진 면이 분명히 있다. 가족이나 결혼같은 개념들을 둘러싼 환경은 바뀌었다. 젊은 사람들은 종종 막연히 가족이란, 결혼이란 이런거다라는 생각과 개인주의적으로 홀로 사는 것에 적응한 생각을 자기 멋대로 뒤섞은 경우가 많고 이때문에 문제를 겪는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가 이럴수가, 남편이 이럴수가 하는 식, 내가 그런걸 왜 해하는 식으로 분개하거나 의아해하고는 한다.
결혼이니 가족이니 하는 개념도 임시적인 것이니 두 사람이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과거로부터 내려온 관습을 너무 우습게 보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개정이 필요할지 몰라도 그것이 사회적 약속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전부 부정한다면 결혼해 줄래라는 말은 의미를 잃게 될 것이고 어떤 사회적 관계를 둘러싼 생활의 여러 측면들은 내적인 논리로 서로 얽혀있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개혁이란 훨씬 복잡한 문제다. 이쪽을 당기면 생각지 못한 곳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개선이 이기주의가 되는 일은 아주 쉽다. 이렇기 때문에 더더욱 중요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우리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각자의 입장에서 일관성을 가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편하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불편하면 분개하는 경향이 있어서 결국 자기편한대로 현대의 생각과 과거의 생각을 멋대로 짜맞추고는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것이 지금과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에는 집이라는 말도 있다고 생각한다. 양반네들의 한옥을 보면 그 한옥들은 건물자체가 크고 넓다. 게다가 종종 큰 땅에 여러 채의 건물들로 이뤄져 있다. 몇명이서 혹은 홀로 생활하는 원룸이나 오피스텔은 물론 캠핑카 같은 것과는 당연히 많이 다르고 땅값이 한없이 비싸진 요즘 매우 비현실적인 집이다. 이런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그 차이의 의미에 대해 멈춰서서 생각해 보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집앞에만 나가면 쌀을 쉽게 구할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밥을 먹지 않는다면 집에 쌀을 쌓아둘 광이 필요할 리가 없다. 또 나가서 야채를 쉽게 구할수 없다면 당연히 집에는 채마밭이 붙어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집이란 그 집을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도 자신의 전원주택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모든 것이 그 안에 다있는 일종의 나만의 우주를 상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같다. 전원주택을 짓고자 하는 사람에게 첫번째로 주어지는 조언중 하나는 야심을 작게 가지고 집을 작게 지으라는 것이다. 오지도 않을 자식들이며 손님을 상상하면서 집을 크게 지었다가 관리비때문에 곤란만 겪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집앞이 국립공원이라면 내 집의 정원을 가꾸는 일은 거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세상은 앞으로도 변해갈 것이다. 많은 것들이 앞으로는 필요도 없어질 것인데 그걸 구하겠다고 애써 고생해보니 나중에 가면 그런 것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고생고생해서 전원주택을 완성했으나 불과 몇년만에 노환으로 그 집을 내놓은 경우는 너무나 많다.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거기에도 있다. 집이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의 어느 한점에 존재하는 것이다.
많은 것들이 변해가고 그에 따라 그것들의 의미가 달라지는 일이야 언제나 있는 것이지만 요즘은 그 변화가 너무 크고 빠르다. 그런데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들은 그 파급효과가 워낙 커서 작은 변화가 실은 큰 부담이 된다. 결혼이라던가 가족이라던가 집을 산다던가 하는 일은 뭔가가 잘못되면 그 잘못을 평생 수정할 수 없거나 굉장히 오랜기간을 고생해야 한다. 도장한번 찍고 10년 책임지는 식이다.
그런데도 막연히 부모세대는 이랬으니까, 우리 주변사람들은 이렇다고 말하니까 같은 식으로 타성에 젖어서 그 의미를 받아들이고 선택을 하게 되면 나중에 그 한가지 생각때문에 너무도 많은 고생을 하게 된다. 나는 그런 것을 코가 꿰인다고 말하는데 코가 단단히 꿰이면 해결할 방법이 없어진다. 하우스 푸어니, 기러기 아빠니 하는 사람들이 힘들게 살고 있는 이유가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너무 쉽게 이런건 요즘 누구나 다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한 쪽에서는 거지처럼 살면서 돈 버느라 바쁜데 다른 쪽으로는 돈이 줄줄 새고 있는 모습이 되고 있지 않을까. 저축인줄 알고 열심히 보험이며 펀드를 들었는데 그게 이상한 짓이 되는 것은 아닐까. 고향사람이라면서 열심히 찍어서 당선시켜주었는데 그 고향사람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래저래 사람을 만나는 것도, 결혼을 하는 것도, 집을 사는 것도, 직업을 구하고 진학을 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도 그것들에 대해 사색이 필요한 시대다. 생각하지 않고 낡은 단어와 개념에 따라 습관적으로 살면 그 어딘가의 끝에서 우리는 낭떠러지를 만날지 모른다. 그런 개념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정도 꿈속을 헤매이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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