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2.16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것을 하고 살게 될까 아니면 잘하지 못하는 것을 하면서 살게 될까. 여기에는 언뜻 보아 서로 정반대로 보이는 두 개의 이론이 가능하다.
먼저 우리가 잘하는 것을 하면서 살게 된다는 이론은 이렇다. 축구를 잘하지만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대개 축구를 하면서 성과를 낼테고 칭찬도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축구를 직업으로 해서 축구를 하면서 살게 될 확률이 높다. 노래를 못하는 아이가 가수로 살게 되지는 않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것을 하면서 살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잘하지 못하는 것을하면서 살게 된다는 이론은 이렇다. 우리는 왜 어떤 것에 시간을 쓰는가.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잘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영어는 잘하지만 국어는 못하는 학생은 시험공부를 할 때 어디에 시간을 쓰게 될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영어는 하나도 공부를 안해도 백점이지만 국어는 빵점에 가깝다고 하자. 당연히 거의 모든 시간을 국어에 보내게 될것이다. 우리가 뭔가에 시간을 오래 쓰는 이유는 그걸 쉽게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잘하지 못하는 것에 시간을 대부분 쓰면서 살게 된다.
이 두 이론 중 하나는 우리는 성과를 보이는 일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된다는 이론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하는데, 뭔가를 하고 싶은데 그걸 잘 못하니 많은 시간을 이 잘 못하는 일에 쓰게 된다는 이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겠지만 이 두 개의 이론은 언뜻 보아 정반대로 보이지만 반드시 정반대는 아니다. 이 이론들은 어떤 것을 극대화하면 그것을 보는 관점과 상황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많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각자의 이론은 각자의 시각을 따라가면 지극히 자명해 보인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논리에 휘둘리기 쉽다. 때로는 이쪽 논리에 때로는 저쪽 논리에 말이다.
잘하는 것만 하는 사람
첫번째 이론이 적용되는 예는 자신의 성공담에 자신이 빠져드는 경우다. 말하자면 축구를 잘하니까 축구만 하게 된다. 그리고 축구만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은 축구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매우 무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그것이 충분히 자기를 성찰한 후의 일이라면 괜찮겠지만 우리는 우연히 작은 성과를 올리고 더 이상 자기를 탐구하기를 멈추는 일이 많다. 우리는 자꾸 세상의 어떤 구멍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외모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던가, 학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던가, 결국 재산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등 우리는 누구나 여러가지 것중의 어떤 것을 더 가치있다고 생각해서 거기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집중한 결과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주변의 칭찬을 받게 되면 그런 집중화는 더 심해진다. 그렇게 해서 수학은 엄청나게 잘하지만 결국 영어를 못하면 그 학생은 대학시험에 떨어지게 된다는 두번째 이론의 경고를 무시하게 된다.
우리가 언제나 수험생인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사회 생활도 좀 해보고 가정도 꾸려본 나이 든 사람은 대부분 인생이란게 그렇게 한가지만 파고들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인생은 종합적 시험대다. 화려한 스타로 큰 부와 인기를 누렸지만 그 뒷날이 처참해 지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하나만 잘해서 성공한 사람이란 고양이 무리 속에 던져진 생선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그 사람은 이용당하기 딱좋고, 고생해서 벌어들인 것, 쌓아올렸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남 좋은 일이나 시키기 딱좋다. 다 빼앗기고 남들보다 더 비참해 지지않으면 다행이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를 그런 노인들의 경고에서 반대쪽으로 떠미는 경향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뭐든지 1등을 해야 이득도 많이 보고 직장도 생기고 남들의 존중도 받곤 한다. 전문화는 현대문명의 뿌리에 있다. 뭔가 하나를 미친 듯이 해야 오늘날은 성과를 낸다. 세상은 종종 눈앞에 것에만 집중하고 그밖의 것에는 눈돌리지 말라고 말한다. 밤이고 낮이고 입시학원과 학교만 다니는 청소년들이 좋은 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서 생각도 없고 남에게 이용당하기 좋은 바보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수학'은 잘한다지만 잘 못하는 '영어'는 어쩔셈인가. 국영수는 잘하지만 시험에 나오지 않는 상식은 빵점인 것은 어쩔 것인가. 그걸 내버려만 두면 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못하는 것만 하는 사람
두번째 이론을 생각해 보자. 이 이론을 응용하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무능해 질 정도로 성공한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우리가 뭔가를 잘하면 우리는 성공하는데 바로 그 성공 때문에 우리가 잘하는 그것을 하지 못하고 다른 걸 하게 되는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리를 잘하면 요리사를 하게 될까. 그는 일단 요리를 잘해서 하나의 가게를 성공시킬지 모른다. 그러고 나면 이제 체인을 내고 싶을 지도 모른다. 주변에서 스승님으로 모시겠다던가 할지 모른다. 가게가 너무 커져서 이제 요리를 하는게 아니라 요리사들을 감독하게 될지 모른다. 결국 이렇게 해서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요리를 하지 못하게 된다. 많은 회사에서 기술직과 감독직의 문제는 이렇게 생긴다. 현장일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윗선으로 올라가 관리감독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고 뛰어난 운동선수가 반드시 뛰어난 감독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사다리는 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레스토랑의 예로 돌아가보자. 레스토랑에서의 일중에 제일 천한 일은 바닥청소나 설거지 일것이다. 그런건 아마도 가장 신참이나 가장 바닥에 있는 사람이 하게 될텐데 어떤 사람이 그걸 아주 잘했다고 하자. 즉 그는 설거지의 달인인 것이다. 일을 잘해서 승진을 하고 이제 간단한 요리를 하는 요리보조로 승진하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다. 설거지를 잘하면 요리도 잘할까? 물론 아니다. 사장같은 최고위층으로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분명 이런 저런 것을 경험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장과 말단이 필요로 하는 기능은 서로 다르다. 요리사와 설거지알바도 그렇다. 그런데 세상에는 우리가 각자 자기가 하는 일을 잘하면 승진을 시켜준다는 당근이 널려있고 많은 사람들은 위로 올라가려고 노력하면서 산다. 위로 올라가려는 노력과 성공하는 재능이 합쳐질때 우리는 우리가 무능해 질때까지 성공하게 된다. 우리는 뭔가를 잘하기 때문에 그걸 더이상 못하게 된다. 이것은 특히 시야가 넓지 못한 경우 그렇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것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다는 것이 자신이 무슨 일을 하던 잘할 수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다 똑같은 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버리고 잘 못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면서 살게 되곤 한다.
우리가 서있는 자리
물리학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대학에 가면 우리는 일반물리나 역학 전자기학 양자역학 같은 여러 물리학 부터 배운다. 이때 대학 학부생들이 가지는 착각중의 하나가 대학교수들은 그런 것들을 연구한다고 하는 것이다. 즉 간단한 역학문제를 배우면 교수들은 더 어려운 역학문제를 풀고 있을거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 기술적 세부사항없이 최신의 연구동향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게 가르치는 사람에게나 배우는 사람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학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것들은 사실 화려한 성공의 기록인 동시에 학문적으로 말하면 죽은 물리학이다. 왜냐면 직업으로서 연구를 하는 학자들은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를 푸는 것이지 이미 남이 다 푼 결과를 줄줄 외우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 신문에 세계 최초로 무슨무슨 연구를 했다고 기사가 나는데 사실 모든 논문은 이론상 세계최초이어야만 한다. 그게 아니면 남이 한 연구를 다시 한 것이거나 심하면 표절한 것이다. 연구자들은 모두 과학이 만들어지는 최첨단에서, 즉 아직 안 풀린 문제, 못 푼 문제앞에서 버둥대고 있다. 그래야 논문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것은 귀찮고 종종 자기의 연구와는 먼 일이지만 장점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연구를 하는 학자들은 골방에서 끝없이 자기가 못 푸는문제만 만지작거리다가 우울해 지기 쉽다. 안풀리는 문제만 몇달이고 몇년이고 생각하는 것은 고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아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 위해 뒤로 잘 돌아가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남을 위해 뭔가를 준비하다보면 결국 다시 공부하게 되고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는 일이 많은 것이다.
이런 일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난다. 보통사람들도 과학자들처럼 각자의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서만, 각자가 넘기 어려워하는 벽앞에서만 버둥대는 일이 많다. 행복을 위해서 한 여자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에 시간을 다 쓰고 스트레스를 받고, 승진이나 돈이나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 그것에 자신의 시간을 다 쓴다. 그런 일상에 빠져들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은 당연한 것이거나 심지어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우리가 못 가진 것만 보게 되기 쉽다. 그러다보면 가진 것도 잃어버리게 된다. 자신의 건강을 과신해서 그런 쪽으로 생각도 안하다가 어느날 과로사로 죽는 중년도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우리는 대개 우리가 못 푸는 문제앞에 서 있다. 그리고 이게 왜 그렇게 되는건지, 그게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자각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앞에 있는 벽을 넘거나 부수겠다는 열망이 커서 거기에만 매달려 있을수록 그럴 확률은 점점 더 커진다. 가족도 없고 취미라던가 다른 관심도 없이 일중독에 빠진 사람이 종종 위기 상황에 빠진 사람일수 있는 것은 이때문이다. 못푸는 문제앞에 있을 때는 그 문제가 온 세상처럼 커보이지만 사실 고개만 돌리면 그 문제는 세상과 인생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맺는 말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것만 하고 산다. 혹은 우리는 우리가 못하는 것만 하고 산다. 우리는 극단적이 되기 쉽다. 이것은 특히 사회적 영향력 속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이런 나쁜 사회적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노자에는 총욕약경이란 구절이 있다. 이는 칭찬을 받아도 모욕을 받아도 모두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말이다. 세상은 우리를 우리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 우리가 하고 싶지도 않은 일에 인생을 모두 허비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세상의 소리들은 우리를 단순하고 극단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연결이 필요하다. 그런 연결이 우리를 외골수의 삶에서 구원한다. 예를 들어 미혼인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어보면 같은 도시에서 살아도 그곳이 얼마나 다르게 느껴질수 있는지 놀라게 된다.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다른 역할을 맡는다는 사실이 많은 새로운 것들을 우리 인생에 가져다주고 우리로 하여금 극단적이지 않게 만든다.
결혼과 육아만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는 세상의 여기저기에 연결됨으써 균형을 잡을 힘을 빌려 올 수 있다. 그런데 통상 현대인은 너무 바쁘다. 야망을 위해 달려갈 시간도 부족해서 가족도 못 만난다. 자꾸 어떤 구멍에 빠져서는 나오지 않으려고 하고 그 작은 우물 안에서 아둥바둥거린다. 그러나 시야가 좁은 일중독자가 항상 가장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내가 세상과 어떤 연결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지, 나는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일에 얼마나 시간을 쓰고 있는지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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