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방문하신 순둥이님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것은 요즘은 젊은 사람들도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젊은이들의 보수화는 어떻게 생각할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사색하고 인생을 배우기 보다 취업스펙쌓기에 열심인 환경이 문제가 아닌가 하는 답을 주셨는데요. 저역시 동감입니다. 그 동감을 바탕으로 약간 몇마디 더 써보고 생각을 정리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명한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이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는 그곳의 학생들이나 교수들이 그다지 창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을 합니다. 그런데 한명의 교수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교수는 브라질에서 교육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브라질 교육은 그렇게까지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다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와 대화를 나눠보니 그 교수 말하길, 자신은 브라질에서 공부했지만 실은 당시에 브라질이 혼란상태에 빠져서 혼자서 공부를 하다시피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브라질의 교육이 실패라는 그의 생각은 더욱 굳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제가 지금 일본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때문에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가서 수업참관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교육을 보면 지나치게 조직화하는데 시간을 다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리 실습을 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배를 잘라서 먹는다는 어찌보면 이런걸 학교에서 가르치나 하는 것같은 것이 그 실습내용이었는데 그 수업을 몇시간이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몇시간이나 배를 깍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시간이 누가 뭘 하나하는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나 칼의 구조 그리고 어떤 식으로 깍아야 하는가 하는 여러가지 규칙에 대한 수업이었습니다. 배를 깍으면 배껍질을 버려야 하는데 그걸 버리는 담당이 있고 그 담당은 그냥 그걸 가져다가 버리는게 아니라 쓰레기통을 가져와서 버려야 한다는 둥, 여러가지 규칙이 모두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는 당연한 것입니다. 안전이나 효율을 위해서 어디나 하는 것입니다. 다만 현장에서 느끼는 주관적 느낌상 모든 것이 지나치게 규칙화되고 형식화 되어보였습니다. 흔히 말하는 메뉴얼좋아하고 보수적인 일본인은 그렇게 만들어 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예들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실패한 교육이 아닌가 합니다. 교육에 있어서 기억하는데 실패하기 좋은 두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사람은 결국은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교육자의 능력이 한계가 있다는 점 즉 교육자가 뭐가 좋은지 다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먼저 이런 점들을 피할수 있는 교육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직업교육으로 특정한 종류의 지식이나 기술을 낮은 수준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교육자는 자신이 뭘 가르쳐야 하는지 정확히 압니다. 예를 들어 칼가는 기술을 가르친다면 그 기초를 가르쳐야 하는 부분에서는 쉽지요. 또 수학을 가르치건 영어를 가치건 마찬가지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뭘 가르쳐야 하는지 알고 배우는 사람도 뭘 배워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이건 가장 쉬운 종류의 교육이고 공부입니다.
하지만 한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논할 때 이런 교육은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주제에 대해서는 화이트헤드의 교육의 목적을 읽고라는 독후감을 참조하실수도 있을 것입니다, http://blog.daum.net/irepublic/7888300) 그런데도 오늘날의 사회시스템은 아주 어릴때부터 아이들이 끝없이 직업교육만 받게 합니다. 덕분에 마치 햇볕은 없이 물만 많이 준 나무가 죽는 것처럼 삶의 중요한 부분이 결여된 아이들이 점점 더 시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의식중에 멘토를 찾는데 세상이 비틀어져 있으니 멘토는 드물고 직업교육선생만 흔한 세상이라 그게 쉽지 않습니다. 다들 자기가 뭘 결여했는지, 뭐가 없는지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실은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사회현실이 오히려 다들 피상적인 것만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게 만듭니다. 심지어 부모조차도 진짜 교육을 외면하고 아이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거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 결여가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두가지 사실을 먼저 지적해 보고 싶습니다. 첫째 한국의 대통령 중에 존경할 만한 대통령 두분이자 가장 지적이라고 할수 있는 두분인 노무현과 김대중은 모두 고졸이라는 것입니다. 국회에는 수없이 많은 서울대 출신이 있고 이제는 하버드 출신도 이따금 있지만 그들은 모두 무능하고 때로는 이해할수 없을 정도의 몰상식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육이 과연 지도자를 키우는지 아니면 오히려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둘째로 우리 사회에서 70-80년대에 대학은 어수선한 사회분위기 때문에 수업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놀면서 대학다닌 사람들인데요. 지금 젊은이들을 보면서 너희는 어리석다라고 느끼는 세대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그 놀면서 대학다니던 사람중의 하나가 예전에 미국에 편입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학과에 편입해서 보니까 자기는 한국의 대학에 있을때 철학책이나 정치서적 몇권 읽고 말을 하지 못하면 바보취급받았는데 미국아이들은 그렇지가 않더라고 그래서 자신이 뛰어난 지식인 취급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세대가 지금 놀지 않고 취업준비에 바쁘다는 대학생들을 보면서 바보로 느낀다는 사실, 교수들이 요즘 대학교에 들어오는 신세대를 보면서 예전에 비해 영어를 빼면 신세대의 학력이 너무 떨어져서 학문을 가르치기 어렵다고 불평한다는 사실, 이런 게 현실입니다.
아이들에게 결여된 것, 그리고 다수의 학생을 모아 선생 하나가 주제별로 가르치는 현대 교육시스템에서 결여하기 쉬운 것은 바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찾기위한 방황의 시간입니다. 사람이 성장하려면 기본적으로 남을 보면서 배우는 동시에 자신을 보면서 자기에게 뭐가 필요한 가를,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관점이라는게 생기고 자신의 의견이라는 게 생깁니다. 그러면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책도 더 찾아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대부분 자 이것들이 옳다, 선생님이 옳고, 교과서가 옳다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스승이 모든 주제를 가르치는 교육은 지식의 전달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효율이 나쁩니다만 그것은 그래도 하나의 총제적 인격을 보여줄 기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공장화된 요즘 학교의 현실은 이와도 다릅니다. 사실 수학 영어 국어 기술 음악식으로 주제를 분담하는 교육은 지식을 부어넣어서 아이로 하여금 자아를 상실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 시스템이 말하는 것은 항상 진리는 네 바깥에 있으니 열심히 배우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교육시스템이 키우는 것은 남의 말을 잘듣고 권위에 약한 로보트입니다. 이런 시스템이 만드는 최고 인재는 공장 컨베이어 시스템에서 열심히 메뉴얼대로 손발을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 앞에서 싸우는 것은 교육에 좋지 못합니다만 어른들이 항상 화목하면서 어른들은 뭐든지 알고 있다.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른다는 것만 보여주는 것도 아이에게 나쁩니다.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는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도 답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려고 하지요. 생각을 하다보니까 모르는게 있어서 공부도 합니다. 위에서 말한 브라질의 교수나 학생운동이 극심하던 시대의 젊은이들은 이런 예입니다.
그런데 87년 이후 사회는 안정화되면서 아이들은 무균실속의 화초나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로보트가 되기 시작합니다. 혹자는 그들이 이념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만 그들에게 이념교육을 시키면 그것은 또다른 권위가 됩니다. 문제는 올바른 권위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생각할 시간과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아를 찾기 위한 방황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썼을 때 자기를 본다는 게 뭔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분들은 위에서 거론한 독후감을 참조하시면 혹시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는 사람이 들으면 한 줄이지만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책 한권가지고도 될 일이 아닙니다. 한국은 이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가득하다는 것이 어쩌면 문제의 기원일 것입니다. 제 블로그는 거의 대부분이 이 문제에 대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국 자아찾기고 자아지키기죠.
한국에서 교육이란 지금 거의 무슨 함정처럼 되어갑니다.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그래서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냅니다. 외국에서 놀면서 즐겁게 학교 다니고 거길 졸업하면 죽자사자 공부한 한국 학생들보다 학벌이 오히려 좋은 것으로 인정받곤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는 왜 보수화되는가라는 말은 이 글의 제목입니다만 저는 보수니 진보니 하는 단어의 선택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질문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문제는 자기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청년이던 노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대학교에 부모가 전화를 걸어서 성적에 대해 항의하는 것을 넘어서 회사에도 전화가 온다더군요. 아들 딸의 직장상사에게 전화를 거는 부모가 있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백년전에는 10대가 혁명을 꿈꿨는데 그 잘난 현대교육이 만들어 낸 21세기 아이들의 현실은 이렇습니다. 오늘날에는 교육이 정말 하나의 커다란 함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점점 더 그렇습니다. 그러니 거기서 나오는 결과가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이지요. 대선 따위보다 더 중요한 점에서 한국의 장래에 우려를 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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