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3.13
나는 실패를 싫어한다. 두려워한다. 뜬금없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그렇다는 것을 문득 강하게 깨달았다. 이 세상에 실패를 좋아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패의 문제는 그렇게까지 단순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을 많이 듣고 그것을 인생의 좌우명처럼 말한다. 이 말은 두 가지 이유에서 좋은 말이다. 하나는 우리가 실패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사람이 뒤를 돌아보면 인생길이 실패의 연속으로 이어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이 보기에는 승승장구한 사람도 그런데 결국 성공 실패는 어느정도 기대치에 의해 정해지니까 그럴수 밖에 없다. 재벌가 회장이나 최고의 가수나 배우들은 이정도하지 않으면 대단한 실패라고 생각하는 선이 높을 것이다. 결국 믿기지 않는 큰 성공은 그 이후의 모든 것을 실패로, 실망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가 뒤를 돌아보면 항상 예기치 않은 기쁨과 실망이 연속되는 것을 보는데 그 가운데서 우리는 기억에 남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배우는 것이 있다. 그러니 실패란 유익한 것이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게 된다.
두번째 이유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실패를 성공의 과정으로 인식시켜주기 때문이다. 어떤 것의 의미는 어떤 문맥에 그것을 놓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까 제아무리 큰 실패를 해도 그것은 아직 성공하지 않은 상태라는 생각을 버리지않는 한 진정한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성공을 위한 한단계일 뿐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희망의 메세지다.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다. 너는 결국 성공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좋은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이 좋은 말인 이유들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결국 실패가 싫고 두렵다. 일에서건 사람에서건 실패하는 것이 싫다. 이런 것이 나혼자만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노자에는 총욕약경이란 말이 나온다. 이말은 큰 성공도 큰 실패도 다 두려워하라는 말쯤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바가바드기타에서는 성공과 실패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 이것도 물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의미말고도 반대의미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실패뿐만이 아니라 성공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이다. 성공을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실패도 없다. 이게 성공이다라고 인식하지 않는 사람에게 실패가 있겠는가? 집착이 없는 사람의 행동도 남에게는 뭔가를 실패하면서도 계속 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도전정신에 의해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 실패를 무릅쓰고 견뎌내는 것과는 다르다.
노자나 바가바드기타 이야기가 나오니까 혹시 실패에 대해 우리 모두 욕심을 버리고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자고 하는 말을 하려는게 아닌가 하고 오해할지 모르겠다. 그런 메세지도 틀린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내가 보기에 여기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인생을 하나의 거대한 유기적 흐름으로 보는가 아니면 조각조각나고 독립된 부분들의 합으로 보는가의 문제다. 서둘러 말하건데 둘중의 어느 하나가 무조건 옳다고 하는 건 내 의도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당연한 것은 결코 아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과거의 실패가 깨끗이 지워질 수있다는 자신감,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것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말해보자. 여기 헝클어진 실타래가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도전정신에 투철한 사람은 일단 실을 당겨서 풀기 시작한다. 그러나 너무 강하게 당기거나 잘못해서 때로 실은 전보다 더 엉키게 된다. 그런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결국 실을 풀어낼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도전하고 도전해서 실을 풀어 나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실을 매우 조심스럽게 푼다. 그는 실패가 두렵다. 한번 실이 엉클어지면 그걸 풀어내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헤어나기 어려울만큼 큰 고통이 되어 실을 풀려고 했던 노력이 오히려 문제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위 하는일이 없다는 무위의 정신이 아닌가 한다. 왜 인위적인 것을 경계하는가 억지로 풀어내려고 하는 노력이 오히려 문제를 더 만들어 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을 좋은 말이라고 해놓고도 자꾸 시비를 거는지는 명백해 졌으리라 본다. 그러나 여전히 그래서 뭐. 그거 고리타분하고 작은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몇년간 한국은 내가 싫어하는 대통령이 4대강사업같은 일들을 추진해 왔다. 나자신은 물론 이러니와 누구도 완벽할수 없고 실패가 없을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왜 누군가들은 더 싫어하는가. 그 분들 이야말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좋아하는 분들이다. 어쩌면 이명박대통령을 나처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이명박대통령도 좋아한다라는 말에 놀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의 뒤에 있는 의미를 곱씹어 봐야 한다.
청계천을 복원하건 4대강을 살리건 죽이건 놀라운 것은 그 속력과 공감대에 대한 무감각이다. 거기에는 역사건 자연이건 해보고 안되면 다시 되돌릴수 있다는 생각 즉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 있다. 이 세계와 역사의 유기적인 존재성에 대해 무감각하고 기계적인 시각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아파트를 지어놓으면 사람들이 와서 사람사는 마을로 만들어 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강을 바꾸고 백층짜리 건물을 지으면 사람들은 거기에 적응해서 살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있다.
나는 자연이니 인간이니 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별로 의미없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보면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인간이 만들어낸 도로며 아파트도 자연이다. 반대편으로보면 인간이 살아가는한 환경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발을 할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해 어느정도 두려워하는가하는 점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나같은 사람을 더 큰 두려움에 빠지게 만든다. 나는 현정부의 사람들 같은 사람들이 두렵다. 불도저로 뭐를 밀어버릴지 몰라서 그렇다. 아무리 사람들이 빨간불을 켜도 멈추지 않으니까 그렇다.
그건 사회적인 맥락이고 개인적인 맥락은 또 다르지 않은가라고 말할수도 있으며 물론 사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다 맥락이 다르다. 그러나 과연 인생은 결국 아물어 없어지는 상처로만 살아지는 것일까. 당연히 모든 것은 정도 문제일 것이지만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은 감수성의 문제를 사소한 것을 만들거나 억누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해서 그 와중에 우리는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한 상처를 만들어 낼수도 있다. 인생도 유기적인 생명체라는 것을 잊고서 말이다. 사람의 에너지란게 대단하다면 대단하지만 사소하다면 참 사소하다. 사회적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그밖의 일에 완전히 무감각해진 사람은 세상에 많다. 한가지만 열심히 하려고 해도, 경쟁에 이기려고 해도, 그야말로 가진 모든 것을 성공으로 가는 증기기관차의 보일러에 땔감으로 다 쳐넣어야 할판이다. 그러다보면 문득 내가 방금 땔감으로 태워버린 것이 회복불가능한 소중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과 비슷한 말에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제목도 있다. 서울대 교수가 쓴 이 책을 나는 비판하지는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말의 의미를 앞과 뒤를 다 살피지 않으면 무의식중에 우리는 어떤 이데올로기의 신자가 된다. 너무 당연히 좋은 말이고 지당한 말인데도 그렇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은 실패는 있기 마련이며 결국 성공으로 가는 한 단계라는 메세지를 전한다. 그것은 분명 청춘에게 도움이 되는 말이지만 한쪽 편으로만 그렇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실패한 인생들에게 주는 마취제다. 또한편으로는 성공을 위해 다시 뛰라는 도전정신을 고양시켜주는 흥분제다. 모두 적당히 적절히 쓰면 좋은 것이고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미국의 청년이라면 이런 메세지가 그다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으며 그 의미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에서 아버지에게 기대려는 연약한 아들딸들을 본다. 아프니까 청춘을 쓴 사람이 노숙자라면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젊은이들은 성공한, 사회적으로 지위를 가진 사람이 따스한 시선으로 자신들을 봐주길 원하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버지는 물론 아들딸들을 따스히 안아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만 자꾸하는 아버지는 자식들을 노예로 어린애로 만든다.
진짜 아버지는 무한경쟁으로 몰아넣는다는 말이 아니다. 진짜 아버지는 자식에게 독립을 강조하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라고 말할 것이다. 의미는 유기적으로 이어진 맥락에서 나온다. 독립한 자식은 아버지가 섭섭해 할런지 모르지만 너무 자주 아버지에게 기대지 않는데 결국 아버지는 언젠가 죽고 없어지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일이다.
미국의 청년이라면 아프니까 청춘따위의 메세지는 통하지 않는다. 미국은 워낙 어릴때부터 독립적 인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독립적 개인이고 동등한 수준이라면 아프니까 청춘따위의 메세지는 감동의 메세지가 아니라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메세지다. 예를 들어 어떤 사장이 고용인들에게 아프니까 사원이라는 메세지를 전하면 사원들이 고맙습니다라고 하겠는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메세지는 그 모든 선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청춘과 청춘이 아닌 사람을 구분한다. 청춘들이 행복하기만한 시대가 있다고 해보자. 중년들이 노년들이 고통에 시달린다. 거기서 어떤 청년이 중년을 위로한다고 아프니까 중년이라고 책을 쓰면 중년들이 열광할까? 같은 눈높이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좀 다른 어조가 되지 않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중요한 메세지는 뭘까. 중요한 질문은 있는가. 그냥 인생은 도전하는 것이고 아프기 마련이야로 끝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로 다른 종류의 패배주의가 아닌가?
나는 실패가 두렵다. 이 문장으로 돌아가서 글을 맺도록 하자. 우리가 인생과 세계에 대해 어떤 이해, 어떤 그림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성공 실패의 의미가 달라질뿐만 아니라 그것에 접근하는 태도도 전혀 달라지게 된다.나는 보다 유기적이고 일회적이고 실존적인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같다. 이것은 물론 겁쟁이의 긴 변명일수도 있고 실제로 그런면도 있다. 나는 겁쟁이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것이 겁난다. 그러나 겁쟁이도 용감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질 수는 있을 것이다. 당신들은 뭘 믿고 그렇게 용감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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