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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걱정이란 무엇인가.

by 격암(강국진) 2011. 9. 16.

2011.9.16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빈둥거리거나 영화나 드라마보기로 시간을 때워도 피곤한 날이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몸은 편안히 있었으나 마음이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고 마음이 달리고 있었던 것은 결국 걱정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상사의 한마디 말이나 성적표, 아내나 친구와 있었던 일, 아이들 걱정등 우리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걱정을 합니다. 걱정을 한다는 것이 단지 생각을 한다라는 정도의 뜻이라면 상관없습니다만 걱정은 대책없이 우리의 에너지를 갉아먹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안해도 피곤한, 스트레스에 쩔어있는 것같은 나날이 계속되게 만드는 것이 이 걱정이란 녀석입니다. 

 

그렇다면 걱정이란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봐야겠습니다. 걱정이란게 뭘까요? 곰곰히 생각해 보니 걱정이란 역시 하나의 이론입니다. 미움이 우리가 왜 고통스러운지에 대한 하나의 이론이듯이 걱정이란 우리가 뭔가가 꼭 필요하다는 하나의 이론입니다. 뭔가가 꼭 필요하다고 믿는데 그것이 나에게 없습니다 혹은 떠나가려고 합니다. 그에 대해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 걱정을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론의 뿌리와 경계

 

어떤 것을 하나의 이론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그것이 반드시 틀리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실은 전부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이론은 완전히 옳지도 그르지도 않습니다. 문맥에 따라 옳을 수도 있고 어느 정도의 진리를 담고 있지만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하나의 이론입니다. 그래서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이론의 뿌리와 경계를 보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터무니 없게도 자신이 변태성욕자가 아닐까 하는 걱정에 빠져 있다고 해봅시다. 이 이론의 뿌리에 해당하는 것은 변태성욕자가 되면 안된다고 하는 생각이고 경계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이 변태고 무엇이 정상인가를 나누는 분류입니다. 

 

많은 이론의 경우, 우리는 뿌리로 나갈 것도 없이 분류에서 큰 문제를 발견합니다. 하나의 이론은 나는 변태성욕자다라고 하는 것이며 그 이론의 반대는 나는 절대 변태성욕자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론의 반대 혹은 의식적인 부정은 그 이론의 긍정만큼이나 좋지 못합니다. 본래 경계가 없는 것에다가 경계를 긋고 원하는 것을 보기위해 그 경계선에서 멀찌기 도망가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행동과 말과 생각을 검렬하고 자신이 변태가 아니라는 믿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결국 끊임없이 나는 변태가 아닐까 하는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변태적 행동에 대한 집착처럼 보일 때도 있기 때문에 나중에는 뭐가 뭔지 알 수없게 되어 결국 걱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이 있으며 극렬한 반공주의자는 공산주의자와 비슷해 지듯이 뭔가를 크게 두려워하고 100% 순결해 지려는 생각은 우리를 그것에게 지배당하게 만듭니다.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오히려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서 그 생각을 안 할 때 나타납니다. 즉 변태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고 생각할 때 걱정은 사라집니다. 걱정이란 우리가 뭔가가 꼭 필요하다고 믿는 것에 대한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정상인으로 남아있는 것 즉 변태가 아닌 것이 필요하다는 집착, 그 생각자체가 잠시잠깐이라도 없어지면 걱정도 없습니다. 

 

이론의 뿌리란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어떤 것이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언제나 생각의 연쇄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이가 공부를 안해서 걱정이라고 해봅시다. 이 걱정은 아이가 공부를 해야한다는 필요성에 대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공부를 잘해서 뭘 하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인성을 기른다거나 대학에 잘 간다거나 직업을 잡는다거나 하는 그 뿌리에 해당하는 또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뭐뭐가 없으면 안되기에 뭐뭐가 필요하다의 연쇄가 있습니다. 그럼 다시 우리는 그 뿌리의 뿌리가 뭔지를 생각하고 이 연쇄가 절대적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그 과정에서 다시 그 뿌리를 만들어 내는 분류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걱정의 깊이는 어떤 이론에 대한 믿음의 정도와 같은 것입니다. 걱정이 모두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이렇게 따져보다보면 많은 경우 뭐뭐하면 절대로 뭐뭐한다와 같은 이론의 절대성은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A하면 당연히 B지라고 단정짓는 일이 많기 때문에 걱정은 더욱 깊어집니다. 직장을 잃으면, 사랑하는 그이를 잃으면, 얼굴이 못생겨지면, 사람들이 나를 놀리면, 주어진 일을 다해내지 못하면, 인기가 사라지면, 당연히 나는 살 수가없다라고 단정짓기 때문에 이 이론의 강력함만큼 걱정은 깊어지고 우리의 에너지는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모든 걸 그냥 잊어버리란 말인가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냥 잊어버린다는 말에는 안 좋은 냄새가 납니다. 그것은 도피나 반대의 냄새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의 이론에 대한 반대는 그 이론을 해체하지 못합니다. 공부해야되라고 아이를 다그치는 아이만큼이나 공부따위 안해도 돼, 자유롭게 놀아라고 말하는 부모도 하나의 이론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가 더 잘 클거라는 이론입니다. 

 

하나의 나쁜 이론은 그 정반대도 종종 나쁜 이론입니다. 반면에 하나의 진리는 종종 그 정반대도 진리입니다. 산에 올라가는데 누군가가 절벽을 곧바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해봅시다. 반면에 이의 이론에 반대해서 절벽은 전부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산을 좀 타 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절벽을 올라간다고 해서 반드시 빨리 정상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첫번째 이론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던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절벽이 나오면 자꾸 피하는 것이 꼭 좋은 생각만은 아니지요. 

 

이것이 나쁜 이론과 그 반대 그리고 보다 진리에 가깝지만 정반대로 들리는 말들의 예입니다. 결국 절벽이냐 아니냐에 집착하고 있던 사람들은 절벽에 집착하건 그 것에 반대하건 거의 같은 수준을 맴돌고 있습니다. 산을 위에서 보고 생각하지 않는한 절벽이냐 아니냐에 집착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걱정도 사라지지 않지요. 

 

아이의 공부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공부를 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직장에서 진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진급따위는 애초에 가치가 없으니 진급은 안하는게 좋다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돈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돈을 하찮게 보고 돈을 버는 것을 거부하라는 말도 아닐것입니다. 이쯤 되면 A도 아니고 A가 아닌 것도 아니면 답은 어디에 있냐고 말할 분도 여전히 몇분 남아계실 겁니다. 답은 좋은 선택을 하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자기를 지키고 자기를 믿으면 걱정은 사라집니다. 

 

장자 전자방에는 걱정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여기서 그 대화를 약간 줄여서 소개해 봅니다. 

 

견오가 손숙오에게 묻기를 선생님은 세 번이나 재상의 자리에 올라도 그것을 영예로 생각하지 않고 세 번이나 거기서 물러나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손숙오가 답하기를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오는 것을 물리치지 아니하고 떠나는 것을 붙잡지 않을 뿐입니다. 얻고 잃음은 나와 관계없는 것. 그러기에 걱정하는 기색이 없을 뿐입니다.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더구나 그 영예가 지위때문이라면 나하고는 상관이 없고, 나때문이라면 그 지위와는 상관이 없는 것. 나는 그저 의연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 보려하는데 어느 겨를에 사람들이 나를 귀하게 여기거나 천하게 여기는 일 같은 데 마음을 쓰겠습니까. 

 

여기에는 내가 뭔가가 꼭 필요하다는 집착이 없으며 뭐를 피하거나 무시해야 겠다는 반대도 없습니다. 변해가는 외적인 것이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누구도 자신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자기를 지키고 있는 한 나는 나일뿐이라는 태도이며 그래서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쓰다보니 설교하는 투가 되었지만 대부분의 글이 그렇듯이 이 글도 저 자신에게 하는 설교이니만큼 혹시 건방지다고 말하실 분이 있으면 오해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저에게 질문을 던지고 저에게 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걱정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오늘의 질문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고 우리가 지금 해야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할 뿐이며 다른 모든 일들이 어떠해야만 한다는 것은 그럴듯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은 이론입니다. 극단적으로 오늘저녁에 내가 죽어야 한다면 죽는 일을 걱정해 뭐하겠습니까. 그것 역시 나는 계속 살아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걱정으로 낭비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남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쓰는 것이 역시 현명한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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