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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로봇 영재의 자살

by 격암(강국진) 2011. 1. 11.

언젠가 카이스트에서 로봇영재라고 불렸던 한 학생이 자살한 일이 있었다. 이 학생은 공고출신이었지만 초등학교 2학년이래 국내 여러 로봇경진대회에서 60여차례의 상을 받고 카이스트에 입학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입학한지 1년만에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그의 성적은 좋지 않았고 얼마전에는 이성친구와도 헤어졌었다고 한다. 언론들은 당시 거의 하나같이 그가 영어로 강의하는 미적분수업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과 같은 일들을 거론하면서 그것들이 바꿔야 할 점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즉 학교 수업을 더 따라가기 쉽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그것일까? 나는 그와는 다른 것이 궁금했다. 그는 60여차례나 로봇경진대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데 그 경진대회는 어떤 대회들이었을까. 그는 성적이 나쁘니까 자기를 비관하고 자살에까지 이르렀다는데 성적이 나쁘면 자살을 해야 할만큼 자기 존재를 비관하게되는 현실은 어떻게 만들어 진 것일까. 카이스트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면서 공고출신의 학생을 뽑은 것일까. 


나는 그를 모른다. 더구나 한 개인의 일에 근거해서 일반화를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 쓰는 것은 그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그 사건이 영감을 준 생각들에 대한 것이며, 이런 환경하에 있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적어도 아직 그런 비극적 결론을 내리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이런 생각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여기 기록해 두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상을 많이 받고 그걸로 카이스트에 입학해서 세간의 화제가 되고 로봇영재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이것은 물론 좋은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모두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상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그게 뭔지 생각해 보자. 상이란 상을 주는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을 가지고 주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상을 받고 누군가는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초등학생이 만드는 로봇을 보고 상을 줄 때 누가 어떤 기준으로 줄까? 중학생은 어떻고 고등학생은 어떨까? 


그것이 과연 그걸 상업화해서 당장 세상에 출시하고 세상에서 쓸 수 있는 로봇인가 아닌가하는 기준일까?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건 그냥 어떤 가능성에 대한 것이 된다. 그런데 가능성이란 보기 나름이다. 누군가가 크레파스로 둥글게 원을 하나 그린 것도 실은 아주 원대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뭔가의 가치는 보기 나름이다. 누구는 달에 갈 로켓을 만든다고 부품만드는데 옆에서 소달구지 들고 와서 내것은 그래도 움직이는데 네 것은 그저 파쇠덩어리라고 비웃는다면 이런 일은 반드시 옳지 않을 것이다. 노벨문학상 작가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초등학생이 글을 쓴 것이 꼭 노벨문학상 작가가 될 미래를 더 잘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2학년생이 로봇을 만든 것이 그가 커서 로봇공학자가 될 가능성을 더 잘 암시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가 지금 시를 쓰고 있다던가, 친구를 좋아하고 있다던가 하는 사실이 그가 커서 로봇공학자가 될 가능성을 더 잘 보여주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시를 썼다고 로봇경시대회에서 상을 받지는 않지만 말이다. 


과학이나 공학이 무엇인지 너무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환상을 가진다. 거대한 나무가 처음에 조그만 나무일까? 처음엔 씨앗이다. 가장 나무처럼 생긴 씨앗을 고르면 가장 큰 나무로 자랄까? 상이란게 뭘까. 영재란게 뭘까. 


그런데 우리는 자꾸 누군가에게 상을준다. 나는 상을 받는 그 누군가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나 그녀는 분명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렇게 어린 아이들이 받는 상이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종종 나무처럼 생긴 씨앗에 상을 준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 상이란 누군가가 타인이 상상하고 예언한 것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예언은 생각보다 그리 잘 맞지 않는다. 미리 미리 이 아이는 되고 저 아이는 안되고 하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그런데 로봇영재라 불렸던 그는 끊임없이 경진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무려 60번이나 상을 탔다고 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 남이 주는 칭찬과 평가에 모든 걸 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게 안타깝다. 그가 정말 로봇공학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는 남이 주는 상이 아니라 좀 더 자기 자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았을까? 고전을 읽거나 멋진 영화를 감상하면서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인간에 대해 좀 더 배웠다면 그것이 로봇공학자가 되는 것에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상은 점점 늘어가고 그에 따라 자기 안에 존재하는 그 상을 받는 나도 커져만 간다. 그래서 고등학생의 나이에 영재로 불리고 드디어 카이스트에 들어가는 공고생으로 신문에 날정도의 신화를 만든다. 그러나 신화는 거기서 끝나고 만다. 끝없이 어릴 때부터 그에게 이것이 영재라며 말해주던 목소리가 한순간에 바뀌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로봇대회에서 상받으려면 외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나 미적분을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의 내부는 온통 영재, 상받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해낸 중요한 업적인 카이스트에 대한 믿음으로 차있다. 카이스트 입학은 그가 받은 가장 빛나는 트로피이므로 카이스트는 완벽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만약 카이스트 시스템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면 틀린 것은 분명 자기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가 받은 다른 상도 위대한 카이스트의 교수중의 누군가가 심사위원으로 준 것이 아니었을까? 상받기를 좋아하는 그는 권위에 약하다. 카이스트는 몽땅 엉터리라고 부정하고 혼자서 자기의 길을 가거나 카이스트가 인정해 주건 주지 않건 카이스트가 만능이 아니라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의미로 카이스트같은 권위가 그를 인정해주고 버렸으며 그는 그것에 완전히 절망해 버렸다. 그의 삶은 상받기와 타인의 인정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대학에서 영어로 수업하는 것을 대부분 찬성하지 않는다. 영어는 중요하다. 나는 적어도 이공계학생이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어공부하는 것을 반드시 전공공부하는 것과 섞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일은 결국 교수와 학생간의 소통을 막는 일이 되고 말뿐이다. 애초에 공부가 그렇게 만만한 것이라는 말인가. 미적분을 한국어로 배우면 너무 쉬운 학생은 얼마나 되나. 영어는 따로 또 열심히 하면 된다. 


나는 카이스트가 분명히 공고학생이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어 놓고 특차라는 형식으로 공고학생을 왜 받았는지 모르겠다. 마라톤 선수 뽑으면서 패션도 중요하다면서 패션으로 뽑고 선발된 다음날 부터 오늘부터는 하루 40km씩 뛴다고 하면 과연 옳을까. 


나는 죽은 학생이 진짜로 영재인지 모른다. 아닐 수도 있고 진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고를 나온 그에게 재능이 있었다면 그것은 시스템에 걸맞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과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끝까지 시스템 바깥에서 경쟁했어야 했다. 어쩌면 그는 대학따위 나오지 않고도 멋진 기계를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스템에 들어가기 위해 시스템이 요구하는 길을 걷지 않는다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축구로 세계를 제패해서 국가적 영웅으로 뛰어오르며 모두가 그의 강함을 존경한다고 해도 그 축구선수는 축구라는 경기바깥에서는 평범한 군인보다 약할 수 있다. 그가 있고 싶은 전장은 어디인가, 그가 되고 싶었던 것은 누구인가. 그는 생각했어야 했다. 사실 카이스트에 적응하기도 힘들지만 카이스트에 적응해서 최고가 된다고 해도 반드시 그것이 또 세계최고의 학자가 되는것과는 다르다. 카이스트가 아니라 하버드나 MIT에서 최고의 학점을 받는 학생이라고 해도 반드시 훌룡한 학자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는 로봇영재가 무슨 말인지 모른다. 만약 줄넘기 영재라던가 마라톤영재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건 혼자서 하는 기록경기이기 때문이다. 로봇을 만든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자동차영재는 뭘까? 자동차를 혼자서 만드는 사람? 자동차 매니아는 자동차에 관련된 것을 결국 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뭘하건 그는 대개 아주 일부만 한다. 그는 운전만 하는 F1 레이싱선수일지 모르고 그는 자동차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일수 있다. 그는 타이어나 엔진개발에 힘을 쏟을 런지도 모른다. 제일 광범위하게 이것저것 다하는 사람은 아마 소득이 가장 적은 자동차 수리센터 직원일 것이다. 자동차영재란 그런것인가? 수리센터 직원? 로봇영재는 어떤가. 로봇수리센터 직원? 로봇이 대중화되지 않은 지금 우리는 로봇영재는 둘째치고 로봇이 뭔지도 잘 모른다. 


로봇산업에 대한 대중적 흥미를 끌어올린다는 차원에서 경진대회를 열고 상을 주는 것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상을 받는 의미를 오해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아이에게 왜곡된 세상을 보여주고 그것이 온 세상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어른들의 입맛에 따라 아이들을 가혹하게 굴리고 하는 일이 항상 바람직한 일은 아닌것 같다. 틀이라는 것이 종종 필요악이기는 하지만 그 틀이 너무 강조되면 남이 만든 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이 세상을 버린 로봇영재는 로봇을 만든다는 것이 뭔지를 얼마나 깊게 생각했을까? 상을 받다가 그런 걸 잊게 된 것은 아닌가? 그에게 상만 퍼부어주던 어른들이 뭔가 다른 걸 줬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가 진짜 멋진 로봇공학자를 만났다면 뭔가 다른 조언을 받지 않았었을까? 그는 환상을 쫒고 있었고 제대로 된 롤모델을 만나지 못했던 것같다. 그랬더라면 그런 비극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세상이 만들어낸 환상, 세상과 그 스스로가 만든 매트릭스속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환상이 깨어지자 그의 온세상이 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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