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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자살, 좌절하는 젊음에게

by 격암(강국진) 2011. 4. 8.

또한명의 카이스트학생이 자살을 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1년 남짓한 동안 자살에 대한 글을 두번이나 쓴 적이 있으며 그 하나는 한국인은 왜 자살하는가 이고 또하나는 로봇영재의 자살에 대한 것입니다. 기왕에 자살에 대한 것을 두번이나 쓴적이 있으니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쓸 것은 없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내용은 새로울 것이 없더라도 시점에 있어서 다른 방향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전에 쓴 글들은 밖에서 관찰하고 사회적으로 분석하는 글이었기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한 나머지 자살이라는 선택을 고려하는 사람에게 특히 젊은 학생 개인 하나를 앞에 두고 해야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뭔가 완전히 새로운 말을 내가 할 리야 없으며 무슨 말을 하건 누구한사람에게나마 도움이 될런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앞선 세대의 일원으로서 좌절한 젊은이가 눈앞에 있다면 어떤 말을 할것인가에 대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을 해치는 것을 병이라고 한다면 죽음을 생각할 만큼의 좌절과 절망은 분명 치명적인 병일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좌절을 준 외적 요인을 비판할수도 있으며 동시에 좌절하는 젊음에게 힘을 내라던가 그렇게 약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말을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달콤한 위로는 아닙니다. 나는 오히려 좌절한 젊음의 나태를 꾸짓고 싶습니다. 나는 몇몇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마음을 굳게 먹어라 더 열심히 뛰어라 식의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나태는 당신이 학업에 나태했는가라던가 부모님의 자식으로 선생님의 제자로 혹은 국민으로 당신이 할 일을 제대로 못하지 않았는가 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아마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한 노력을 다해 발버둥을 쳤을 것입니다. 뭐니 뭐니해도 목숨만큼 중한것이 없는데 그걸 포기할 정도로 좌절했다면 겪어야 했던 아픔이 엄청났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묻고 있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사회와 주변사람에게 충실했는가, 자기 의무를 다했는가가 아니라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충실했는가하고 묻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기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했는가를 묻는것입니다. 그부분에 있어서 당신은 나태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을 돌보지 않고 일을 하고 공부를 하다가 건강을 해치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좌절로 인해 죽음을 생각하는 당신도 그 조건이 얼마나 힘든 것이든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입니다. 몸도 그렇지만 자신의 내적인 건강을 보살피는데 나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것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당신이 나만큼 힘들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내 마음을 아는가, 나는 죽도록 공부했다. 나는 정말 충실히 일하면서 살았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의 아픔을 모릅니다. 당신이 죽을병에 걸렸다고 해도 그걸 내 손가락이 아픈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성적으로 그리고 어느정도 간접적 감성에 의해 상상하고 느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모님이라고 해도 우리의 인생의 아픔을 대신 느껴줄 수는 없습니다. 

 

모른다면서 왜 말을 하는가. 나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다는 증거가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매일 매일 오늘 죽어도 나는 후회가 없다라고 생각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해야만 했던 일, 하고 싶었던 일을 선택하고 살았기 때문에 오늘 당장 죽는다고해도 큰 실망이 없다고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당장 꿈꾸는 대로 살 수는 없다고 해도 여태까지 뭐뭐때문에 참고만 살았는데 지금 죽으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은 큰 좌절의 위험을 폭탄처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당장 죽어도 후회가 없다는 사람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하루는 덤이고 새로운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닥치면 내일 내가 응당해야하는 것을 하면서 하루를 보낼뿐입니다. 극히 드문경우 그 응당해야 하는 것이 내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만 그것은 결코 좌절때문에 자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뭔가를 위해 생명을 던지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이 말들이 지금 더 성실하게 살라던가 하는 어떤 도덕적 덕목에 대해 뭔가를 실천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죽음을 생각할 만큼 좌절한 당신은 어딘가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언젠가부터 진짜 질문을 하고 진짜 질문을 따라가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자기의 질문에 답하는 인생을 살기보다는 남이 던져준 질문, 남이 정해준 의무, 남이 짜준 과정, 남이 만들어 놓은 근사한 목표을 쫒기만 바빠졌습니다. 

 

남이 준 것은 남이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칭찬이 나를 기쁘게 한다면 다른 사람의 무시와 폄하가 나를 슬프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에 노력하는 다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다른 사람의 손위에 올려놓은 꼴이 되는 것이고 그것밖에 없는 인생이란 바로 자기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가혹한 현실때문에 그러했겠지요. 우리는 무한히 강하지 않으니까요. 당신은 나보다 운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하지만 누가 누구보다 운이 좋니 나쁘니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의미없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다리가 하나 없이 태어납니다. 그 사람은 다리 두 개인 사람보다 운이 나쁘지만 운이 나쁘다고 이야기해봐야 다리가 하나 더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을 뿐이며 따지고 보면 개미나 바퀴벌레는 우리에게 그래도 너는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현재 서있는 장소는 서로 비교하고 불평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닌 현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가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다른 곳으로 출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아직도 자기 자신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보십시요. 

 

당신의 인생에서 '원래 그런거다'라는 말이 아주 많았다면, 당신이 어렸을 때부터 이미 당신의 인생은 10년후 20년후가 모두 정해진 도로인것처럼 계획이 쭉짜여있었다면,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가 사방팔방으로 쫙 정해져서 명백하다면 당신이 스스로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자기 자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만날때 이러저러하게 처신해야 한다던가 학생으로서 자식으로서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자주 말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미리 생각해둔대로 행동하며 살고 있다면 당신은 자기 자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인생이 의무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된다면 당신은 자기자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자신이 있는 사람은 자기자신을 믿고 그저 자기자신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미리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자신으로 반응하고자 합니다. 그저 의무이기 때문에 어떤 것들을 하기 보다는 자기 마음이 이끄는 것, 자기가 지금 해야한다고 느끼는 것을 행하면서 삽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단순히 아 이젠 내 맘대로 살자, 무계획하게 살자, 즉흥적으로 살자라고 말한다고 해서 자기자신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학교공부하듯이, 체력단련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 즉 여러가지 상식이며 관습이며 문화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이 정말 원래 그런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무섭게 우리에게 여러가지 의무를 들이댑니다. 우리를 세뇌해서 이건 원래 이런거라며 우리는 이러저러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것에 자기자신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과연 나는 나의 선택하는 능력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가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일에 나태하면 자신을 잃게 됩니다. 탈출할 수 없어 보이는 감옥에 빠졌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기억해야 하는 것은 겸허와 무지입니다. 자신이 뭔가에 대해 전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나 자신은 그리고 이 세상은 불확실한 것입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세상은 원래 이렇다라고 생각을 고정시키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의미나 자기자신을 상당부분 혹은 전부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해, 세상에 대해 영원히 무지합니다. 그건 다 아는거야라고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겨운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를 지킨다면서 나를 불확실한 것, 고정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그렇습니다. 나도 불확실하고 세상도 불확실합니다. 말로 다 이해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내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내일은 또 새로운 가능성으로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내일은 내일의 놀라움을 언제나 가지고 있습니다. 나도 세상도 불확실한것, 미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이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부족한 말이라도 기회로 삼아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절박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런 일이 일어나 당신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풍요롭게 되기를, 앞도 뒤도 막혀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탈출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창의력이 당신에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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