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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무너진 자존심의 회복

by 격암(강국진) 2010. 5. 25.

자존심이 무너지는 문제는 심각한 현실적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체면과 자존심문제로 평생 고생할 일을 시작하거나 망친다. 한마디로 마음한번 고쳐먹었으면 온세상이 다를일을 가지고 평생 끙끙거리게 되는 것이 이 자존심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도 아니다.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던가 서양인들에 대한 동양인들의 자존심세우기는 집단의 문제인 것이다. 


이 자존심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은 많은 경우 그렇지만 보다 단순했던 시절을 회고해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은 것같다. 어릴적에도 우리는 자존심의 상처를 받고 남을 부러워 한다. 게임기를 가진 친구를 부러워 하거나 인기가 좋은 친구를 부러워 하고 잘생긴 친구를 부러워 하고 공부잘하는 친구, 운동잘하는 친구, 용돈이 많은 친구를 부러워 한다. 부러움은 항상이 아니면 대개는 자존심의 상처로 변한다. 나는 왜 저친구 같아질수가 없을까 하는 것은 상처가 되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부분에 도달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어린 시절의 상처들을 어떻게 극복했던가? 그 부러워 하던 것을 도달함으로써? 대개는 아니다. 자존심의 상처가 치료되는 과정은 대개는 우리가 보는 세계가 확장되면서 일어난다. 


우리는 잘생긴 친구를 부러워 하는 사춘기 소년을 상상해 볼수가 있다. 이 소년은 아 나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못생겼다고 무시당하다니 죽고만 싶다. 어떻게 하면 잘생겨 질수가 있을까. 이 소년은 이 고민에 영영 빠져있을까 아니면 운동이라도 열심히 해서 몸짱이 되고 자신의 소망을 달성하여 자존심이 회복될것인가? 그럴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가지 질문에 부딪히지만 어떤 질문에 대해 확고한 답을 얻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 항상 우리는 대강의 답만을 가지고 혹은 전혀 답따위는 모르는 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답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는가하는 것이고 다음 질문은 무엇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춘기의 번민속에서 그 답을 찾았기 때문에 사춘기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춘기의 질문들을 잊어버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못생긴 외모를 걱정하던 소년은 성장하면서 세상에는 잘생기고 못생겼다는 기준 말고도 많은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것이다. 우리는 흔히 초등학교때는 완벽한 인간처럼 보이던 동창이 커서보니 아주 평범하더라는 경험을 한다. 그것은 그만큼 초등학생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좁기 때문이고 어른들의 세상에서 가치를 주는 일이 초등학생들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소년은 어느날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거나 인터넷 게임동호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년의 시야가 확장되고 세계가 넓어짐에 따라 보는 눈은 달라진다. 소년은 이제 더이상 잘생긴 친구를 부러워 하지 않게 된다. 적어도 나는 왜 못생겼나하는 질문에 빠져서 괴로워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무너진 자존심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만도 아니다. 식민지 시대를 통해 상처입은 민족적 자존심을 살리겠다고 거꾸로 우리 역사를 재구성해서 역사상 위대한 일은 전부 우리 민족이 한것같은 과도한 자존심부풀리기로 나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대개 이런 일은 그리 결과가 좋지 못하다. 부자가 가난뱅이에게 너는 돈을 벌 능력이 없는 무능력자다라고 했을때 자존심에 상처입어서 아냐 나도 돈 많이 벌수 있어라고 반응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떻게 보면 부자에게 걸려드는 것이다. 


그 부자가 당신보다 축구를 못한다고 하자. 당신이 그에게 가서 당신은 둔해서 축구따위 못한다라고 먼저 말하고 자존심에 상처입은 그 부자가 축구로 경쟁하기를 시작하게 만들었다고 하자. 당신은 이미 축구에 관한한 유리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십중팔구 그 부자는 엄청난 노력을 해도 당신보다 축구를 잘하게 되기 어려울 것이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존심때문에 축구를 잘하려고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데 타고나길 마라도나로 태어나질 않았는데 잘할수 잇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인생을 왜 허비해야 하는가. 


돈벌기도 마찬가지다. 자존심에 상처입어 나도 할수 있다고 보여주기 위해 낭비하기에는 우리는 시간도 에너지도 너무 가진게 적다. 그렇지 않을수도 있지만 그 부자는 아마도 돈버는 일에는 재능이 비상하거나 이미 돈이 많아서 가난뱅이와 돈버는 걸로 경쟁하는일에 좋은 위치를 이미 선점하고 있을 것이다. 그 돈을 어디 쓸데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부자보다 더 부자가 되기위해 자존심을 위해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일본보다 우리가 잘났다는 증거를 줄줄이 역사에서 가져오는 것은 비슷한 면이 있다. 나는 역사를 연구하고 한국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작업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존심세우기위한 똑같은 차원에서의 경쟁이 되어서는 안된다.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국민들에게 너희들은 왜 우리보다 열등한가를 말하기 위해 써먹은 논리를 뒤집어서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완벽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수준으로 더 높은 수준으로 나가야 한다. 초등학생의 논리가 어른에게 그렇게 보이듯 제국주의적 논리를 말하는 사람이 유치해 보이는 성숙한 수준으로 나가야 한다. 그럴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존심의 문제를 넘기게 된다. 즉 자기 세계의 확대야 말로 자존심문제의 핵심적 문제이다. 우리의 세계가 좁을때 우리는 종종 자존심의 문제로 크게 고민하게 된다. (혹은 끝없는 자만심에 빠진다.)


이런 작업이 계속될때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런 태도 일 것이다. 우리는 모든 각자의 인생을 살수 있을 뿐이다. 대나무와 소나무와 매화가 서로 크니 작니 아름답니를 따지는것은 인간의 잣대일뿐 애초에 모든 초목은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수없고 끝없이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비교란 무의미하다. 


이건희 회장같은 부자를 소시민이 아 나는 왜 저렇게 부자가 아닐까 하고 부러워 할필요 있을까? 정운찬 총리처럼 석학소리듣고 서울대총장하다가 국무총리까지 되는 사람을 우리는 부러워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저 각자의 몫을 살아야 하고 살수 있을 뿐이다. 


각자의 몫이라고 해서 우리 모두가 고정되어 부자는 항상 부자고 가난뱅이는 계속 가난뱅이며 무식한 사람은 계속 무식하고 유명인은 계속 유명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흐르듯 변한다. 그리고 모두가 다른 각자의 인생을 산다. 비교가 불가능한데 자존심의 상처란 있을수 없을 것이다. 잘났다고 교만해 지는 것또한 웃기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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