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우리가 직면한 질문은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선택의 질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족이라던가 친구라던가 이웃이라던가 지역사회, 국가같은 식으로 여러가지 집단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똑같은 질문은 집단의 차원에서도 생긴다. 바로 집단으로서의 우리는 뭘 할 것인가 하는 의사결정의 문제고 이 질문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사회적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종종 이분법적인 착각에 빠져서 바다는 보지 못하고 해변가의 돌몇개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는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믿고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은 중도라고 부르는 사회적 관행보다 더욱 해가 되는 것이며 또한 더욱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이기도 하다.
독재
집단적 의사결정에 대한 이분법이란 집단이 의사를 결정하는 방식에는 독재와 민주주의가 있다는 주장이다. 하나의 집단이 독재로 의사를 결정할 때 그 집단의 의사결정 권한은 한사람이 가지게 된다. 독재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믿는다. 그 독재자나 왕 혹은 리더라고 불리는 사람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데 핵심적으로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 한사람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정보를 무시하게 된다.
독재적 권력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피해망상증에 빠지기 쉽다. 즉 독재적 권력에 저항하는 자들을 악으로 여기고 그들을 억누르는 것이 선이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독재 자체가 나쁘다거나 좋다거나 하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사실 경우에 따라 독재로 생각되어 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형태가 될 수 있다고 까지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작은 집단에서라면 그럴 수도 있다. 또 초등학교 교실이나 유치원 교실에서 선생님이 상당부분 독재자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에는 대부분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독재적 의사결정은 문제가 있다. 집단의 구성원이 가지는 대부분의 지식과 의견이 낭비된다. 이것은 특히 거대하고 복잡한 집단에서 문제가 된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왕조는 무너지고 민주주의 국가가 설 수 밖에 없다. 요즘 같은 세상에 중앙에 상소를 올려서 명령받고 일을 진행하는 식으로 어떤 왕이 모든 권한을 독점한다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줄서서 기다리게 될 뿐이다. 왕이 독재적 권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바로 정보의 독점이다. 그런데 누가 정보를 독점하면 그 집단이 대처가 너무 늦어진다. 전체 집단에 대한 진단도 엉터리가 되기 쉽다. 독재는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집단 구성원 대부분을 가능한한 바보로 만든다. 바보가 바보가 되는 가장 흔한 이유는 그들에게는 애초에 판단을 할 수 있는 정보가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재는 그들은 이런 정보를 처리할 능력이 없다고 하면서 독재자 이외의 사람의 눈을 가린다.
독재자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집안의 독재자적 입장에 있는 소위 가장이라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첫번째 덕목은 사람들의 말을 잘 듣고 사람들을 잘 관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누구나 찾아가서 미주알 고주알 떠들수 있고 들어주는 사람이어야 전체 집단의 중앙에서서 뭐가 공평한지, 뭐가 억울한지에 대한 가치판단이 선다. 그렇지 않고 대화하기 겁나게 권위만 강조하는 가장이라면 사람들이 필요할 때 도움이 되지 않고 부질없이 사람들을 제약만 하는 존재가 되기 쉬우니 결국 의미가 없다. 불이 났는데 기름을 붓는 결정을 내리는 가장이 있으면 사람들은 슬슬 그런 가장을 왕따시킨다. 가장에게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고 자기들이 처리해 버린다. 윗선에서 건드리면 항상 일이 망쳐지니까 정보가 뒤로만 흐른다. 이렇게 되면 결국 그런 가장은 껍데기일뿐 전체 집단의 짐이나 되고 만다. 가족과 세상을 제일 모르는 사람이 바로 그 가장이 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민주적 의사결정의 방식이란 모든 사람이 자기 의견에 따라서 주장을 펼치되 그런 주장이 서로 서로 경쟁하고 설득하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살아남게 되는 의견이 전체 집단의 의사결정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의사결정은 항상 시간의 제약이 있기 때문에 무한히 서로를 설득하고 자기 주장을 펼칠 수는 없으므로 결판을 내는 방법이 필요한데 그 방법이란 대개 다수결이다. 이 것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란 결국 다수결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투명한 정보공유와 설득의 단계를 무시하는 것이다. 다수결로 이기고 다수가 소수를 착취하면서 민주적인 결정에 반박하지 말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사람은 세상에 넘쳐난다.
독재에 비해 민주적 의사결정은 물론 많은 절차가 필요하다. 다수의 의견을 조합하여 하나의 결정으로 압축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어떤 질문이 던져지고 어떤 정보가 제공되는가에 따라 다수가 지지하는 답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항상 전원투표를 하는게 가능하지도 않다. 그래서 그 절차를 이용해서 결과를 왜곡할 방법도 무수히 존재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전문가의 의견이다. 전문가의 영역은 민주적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을 국민투표로 결정해서 모두가 한표를 행사해야 할까 아니면 의사의 의견대로 해야 할까? 그런데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어느 정도나 전문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가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 불명확함이 있다. 예를 들어 댐을 짓는 문제라고 해서 이것이 반드시 건축가의 전문 영역일 수는 없다. 그것은 경제학자의 영역에 속하는 부분도 분명히 가지고 있고 지역 주민의 행복같은 문제가 되고 보면 전혀 전문가 문제가 아닌 부분도 있다. 이렇게 정보를 조합하는 방법들이 여러개일수 있기 때문에 민주적 절차라는 것이 언제나 자명하고 독재와 분명히 나눠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독재의 문제점은 크지만 민주주의가 항상 선은 아니다. 좋은 독재도 있고 나쁜 민주주의도 있다. 독재는 결과가 어떠하건 그것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에 대해 분명한 답이 있다. 즉 독재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적어도 욕을 누가 먹는가는 정해져 있다. 그런데 민주적 시스템에서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모두가 시스템이 결정한 것이며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복잡한 시스템으로 갈 수록 독재의 문제점은 심각해지지만 아무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민주주의 시스템의 약점이 너무 심해지면 그것은 그나마 한사람이라도 책임감을 느끼는 독재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민주주의는 강력한 공동체 정신이나 애국심이나 종교적 윤리 같은 집단에 대한 구심력이 존재하지 않을 때 제대로 작동할수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 자체가 그런 구심력을 만들어 내는게 아니다.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인 그들은 역사와 문화적 소통에 의해 만들어 진다. 민주주의면 충분하다고 믿는 것은 자유시장과 같은 시스템을 만들면 누구도 책임감 따위 느낄 필요없이, 모두 규칙만 지키면 좋은 세상이 올거라고 믿는 것과 같은 오류다. 좋은 세상은 사람들이 모두 세상에 대해 책임감을 느낄 때 온다. 그런데 시스템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시스템이 요구하는걸 다했으니 내 할일을 다했다는 태도가 생기기 쉽다.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가 지옥으로 변할수 있는 통로다. 바로 조금씩 조금씩 윤리적으로 타락하면서 망해가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 뒤에서, 거대한 시스템 뒤에서 어느새 우리는 책임감을 잊게 된다. 복잡한 시스템을 발전시킨 미국에서 경제위기가 있을 때 모럴 해저드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형식과 결과
여기까지 읽은 사람중에는 의문에 빠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두가지 방식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걸 읽고 보니 그래 맞아 의사결정이란 바로 이 둘중의 하나 이거나 그 중간의 어떤 것이 아닌가. 여기 뭐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수 있다. 집단의 의사결정에 대해 이분법에 빠지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내가 위에 쓴 것이 다 시시하고 본질적이지 않은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 착각이란 세상일을 단순화 시키는 것이다. 소설에는 희극과 비극이 있다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이 말은 옳은 말이고 어떤 문맥에서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는 학생이 소설은 어떻게 쓰는 건가요라고 묻는데 거기에 대해 누군가가 소설에는 희극과 비극이 있단다, 자 소설이 뭔지 잘 알았겠지 이제 써보렴이라고 한다고 하자. 그 학생이 소설을 쓰는데 도움이 될까? 어리둥절해 하는 그 학생에게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어른이 아는척하는 목소리로 소설은 물론 그렇게 단순하지 않지, 희극과 비극도 있지만 그 둘이 번갈아 나타나서 섞여있는 중도적 소설도 있단다라고 한마디 더 설명한들 과연 그 학생은 소설을 잘 쓸 수 있을까? 설사 거기에 더해서 희극이 뭔지 비극이 뭔지에 대해 기기묘묘한 설명을 길게 덧붙인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소설이 뭔지를 ‘느끼고’ 소설을 쓸 수 있게 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실은 소설가적 재능을 가진 학생의 재능을 파괴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이 다르고 철학자의 이름을 외우는 것과 철학을 하는 것이 다르고 삶에 대한 온갖 이론을 아는 것과 산다는 것이 서로 다르다.
세상의 이름과 분류는 실존 앞에서 실로 작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소설을 희극과 비극으로 분류하는 것은 분명히 어떤 문맥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을테지만 소설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멀다. 이러한 오류는 흔한 것이라서 강조가 좀 필요하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름을 만들고 그걸로 지식의 나열을 만들고 어떤 시스템을 만들고 그 세부사항에 대해 미친듯이 길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때로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 이걸 다 알면 뭘 알게 되는 것인지, 정말 내가 뭘 아는 것인지. 세상 사람들이 집단적 의사결정하는 방식을 굳이 독재니 민주주의니 하고 분류하고 이름붙일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거기에 다가 역사별로 각 나라별로 이런 저런 시스템이 있다는 예를 붙이고 더 중간적인 설명을 계속 붙일 수는 있고 더 많은 지식을 설파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좋은 판단이란 무엇인가라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런 지식은 그런 지식이 얼마나 부분적인가를 아는 사람에게만 도움이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독이 된다. 왜냐면 그런 이야기에 빠져서 그걸 전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재니 민주주의니 하는 이름에 지나치게 연연하고 집착하며 어떤 걸 지지한다느니 믿는다느니 하면서 그런 이름이나 관습에 빠지면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독재가 뭐고 민주주의가 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이해를 하고 나면 이제 거기에는 독재도 없고 민주주의도 없다.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 좋은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본래의 목적 뿐이다. 그리고 일단 그런 이분법을 잊어버리게 되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소설이 있듯이 경우에 따라 우리는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내려지는, 각자가 적당한 책임감을 느끼며 결단해야 하는 판단이 있을 뿐이지 독재나 민주주의가 있다던가 그 두개의 중간 어딘가에서 적당한 타협이 있다던가 이런 시스템이 저런 시스템이 항상 좋은 판단을 보장해 줄거라는 생각 따위는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속의 우리는 말에 빠져든다. 왜냐면 사회가 그런 몰상식을 우리의 머리에 심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우리 대신에 독재가 옳다던가 혹은 민주주의가 옳다던가 하는 가치판단을 대신하고서 그것을 종교적 믿음처럼 학교에서 방송에서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너무나 오랜동안 선생님의 입에서 교과서에서 영화속에서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었다. 대개는 기존의 시스템을 반복해 가르치면서 수단을 목적처럼 배운다. 교통신호를 누군가가 미리 정해놓은 것처럼 생각은 미리 너보다 똑똑한 다른 사람이 다 해놓았으니 이런 저런 규칙을 따라라 그러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다고 배운다. 규칙을 따르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 대중교육의 핵심이기 때문에 점점 생각을 안하게 되는 것이 문제다.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것을 의심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안다. 그런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의 세뇌다.
형식에 집착하는 것은 오류를 만든다. 예를 들어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그러는 가운데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는 주장을 보자. 민주주의의 기본을 이루는 듯한 이말도 모든 말이 그렇듯이 어떤 특정한 문맥속에서만 옳은 것이다. 집단이 어떤 결과를 토론을 통해서 도출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이 자신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확실히 알고 있는가에 대해서 정확하고 솔직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점은 흔히 잊혀지고 만다.
여기 천마리의 임팔라가 있다고 하자. 한마리의 임팔라는 사자를 99% 확실하게 봤다. 그런데 다른 임팔라는 그쪽에 사자가 있는지 없는지 거의 모른다. 이 경우 단순히 다수결을 따른다면 이 임팔라 무리는 사자를 발견하는데 거의 항상 실패할 것이다. 이 민주주의 과정의 문제는 주어진 질문에 대한 답을 누가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가에 대한 고려가 없이 그저 모두가 자기 의견을 내고 그걸 단순히 평균내는 것에 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임팔라가 아니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된다. 사실 이런 일은 인간사회에서 매일 일어난다. 사람들간의 토론이나 의사결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스스로 관찰해 보라.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를 알면서 백을 알고 천을 아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럴지도 모른다는 것 뿐이면서 확실히 그렇다고 말한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아는척하고 있는 척하는게 권장되기조차 한다. 소위 자기 피알의 시대아닌가?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 능력으로 취급되지 않는가? 세상은 조금 과장하면 거짓말 대회처럼 흘러가지 않는가? 현대사회에서 악이라는게 있다면 그 악은 대개 자기가 아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말하고 더 많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서 생겨난다. 자기 인생도 관리가 안되는 찌질한 인간들이 내가 구세주라고 나서는데서 악이 생겨난다. 많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나만 솔직해지면 다른 사람들이, 더 어리석은 사람들이 선택될 것이다. 그래서 모두 모두 보지도 않은 사자를 봤다고 한다. 과연 인간사회가 이렇지 않은가? 우리는 임팔라보다 항상 현명하다고 확신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적어도 임팔라가 무리로 나뉘어 전쟁을 일으켜서 집단학살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좋은 판단을 위한 조건
나는 좋은 판단을 내리는데에 있어서 한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충분히 느리게 판단하는 것이다. 얼마나 느리게 해야 할까. 될수 있는한 느리게다. 대부분의 판단에는 시간제약이 있다. 그러므로 한정없이 늦어질 수는 없다. 그러나 느리게 할수 있다면 최대한 느리게 해야 한다. 그렇게 느리게 최종 판단을 유보하면서 노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 우리는 도대체 세상이라는게, 나라는게, 남의 사정들이라는게 어떤 것인지를 느끼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적게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는 것같다. 우리는 모두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너무 빨리 말하고 너무 쉽게 이건 이거라고 단정짖는다. 일개 개인이 홀로 자신의 문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그런데 여러사람의 의견을 듣고 집단의 결정을 내리려고 하면 문제는 정말 어려워 진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난 정말 힘들어라고 말할때 이게 무슨 뜻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이 말하길 하나는 난 힘들다고 말하고 또 하나는 난 괜찮다고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힘들다고 말하는 쪽이 더 곤란한 상황에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누가 이건 이럴지도 몰라라고 말하면 그건 분명히 그런 경우가 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경우에는 설사 그나 그녀가 이건 이게 틀림없어라고 말한다고 해도 거의 그런 단정은 의미가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틀리면서 근거도 없이 확신에 차서 말을 하기 때문이다.
몇년전에 용산개발현장에서 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불에 타서 죽은 사건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사건을 용산참사라고 불렀다. 그런데 불과 몇년지나지 않아 그 개발이 수지가 맞지 않아서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살다보면 딱한 일이란 생기기 마련이긴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안타깝다. 누가 누구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만큼 확신에 차있었는데 그 확신이란게 이렇게 연약한 거품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집단에서 결론을 내리는 방법이란, 즉 옳은 판단으로 가는 길이란 실로 끝도 없다. 어떤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어떻게 얼마나 믿는가에 따라 그것은 다 다른 방법으로 결론이 난다. 아직도 몇몇 순진한 사람들은 정확한 사실에 기반하여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판단하면 옳은 판단이 나온다고 믿지만 그건 순진한 생각일 뿐만 아니라 대개의 경우 매우 위험하다. 현실사회의 논의 과정은 과학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과학의 과정을 따라하다가는 지나친 확신이 생기게 된다. 하나의 사실만 오류로 판명나도 거대한 판단이 송두리째 무너질수 있는데 사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 중 대개는 얼마간 거짓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대개 서로를 모른다. 자기가 누군지도 거의 모르니까 남이 누군지 아는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서로를 좀 알려면 말 이상의 것이 필요하고. 조용히 상황을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간단하게 이거라고 판단하고, 혹은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잊어버리고서 공평하다느니 정의라느니 하는 것을 논해봐야 이 세상에 안 아픈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종종 사람들은 무슨 미친 사람들처럼 이거다 저거다 이야기하면서 우우 몰려다닌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시스템이 어떠니 팩트가 어떠니 논리가 어떠니 누구의 경험이 어떠니 하면서 떠들어봐야 무의미할게 뻔한데 더 일을 복잡하게만 만든다. 우리가 믿을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더 많이 더 넓게 볼수 있는 깨어있는 사람도 없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모두 납득할수 있는 판단이라는게 나올리가 없다. 열심히 세상을 느끼면서 할 수 있는대로 해도 그럴텐데 서둘러 이게 옳다느니 저게 옳다느니 하고 단정짓는 마음으로 뭐가 될 리가 없다.
우리는 세상이 흔히 내 밖에 있는 저 한무리의 악때문에 천국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악이라는게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도 밖에도 다 있다. 그것은 당황하고 공포에 찌든 마음이며 거짓말하고 과장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으로 답이 보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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