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22.
나도 그렇지만 어른들은 종종 어린 아이들이나 청년세대에게 말한다. 너는 커서 뭐가 될것이냐, 너는 꿈이 뭐냐. 이런 질문은 삶에 목표가 없을 때 우리는 방황하게 되고 시간을 낭비하게 되기 때문에 무엇을 위해 시간을 쓰는 지를 고민하라는 뜻에서 던지는 것이다. 나는 과연 그런 질문을 던지는 의도가 올바른 것인지, 그게 바람직한 것인지는 아주 명확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절대로 언제나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꿈이 있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분명 하루, 한달, 일년 그리고 한 생을 보내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내 꿈은 이거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리고 그런게 있다고 해도 그게 정말 꿈을 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누군가가 우리의 머리속에 넣어준 남의 꿈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그러니 우리는 정말 꿈다운 꿈을 꾸고 있지 못한 셈이다.
우리가 꿈이 없는 이유는 뭘까. 거기에는 두가지 큰 이유가 있다. 하나는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꿈이란 가치에 대한 것이다. 뭐가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나는 그것을 한다는 것이 꿈이다. 그런데 여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나는 아침으로 계란후라이를 먹는게 꿈이다라고 말하기는 쑥스럽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꿈이라지만 이런 걸 꿈이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꿈이란 뭔가 원대하고 대단해야 할 것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 중에 내가 뭐가 하고 싶은가를 찾는다.
그렇지만 꿈이란 그 시작은 대개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다. 그 꿈을 향해 걷다보면 거기에 여러가지 군살이 붙어서 마치 세상을 구하기 위해 그 길을 걷는 것처럼 말할 수 있게 되고 그런 의미도 첨부되는 것일 뿐이다. 왠지 장사를 해보고 싶다거나 왠지 컴퓨터 만지는 일을 하고 싶다거나 왠지 길게 걸어보고 싶다거나 왠지 뭔가를 써보고 싶다는 소박한 일에서 꿈은 시작되는데 처음부터 내 머릿속에 있는 것중에 대단하고 엄청난게 뭐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면 답이 안나온다. 나와도 그것은 나의 꿈이라기 보다는 세상이 대단하다고 떠드는 세상의 꿈이다. 우리는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했다는 역사를 말할 때 세상을 밝히고자하는 꿈을 실현한 에디슨 뭐 이런 식으로 광고카피를 만들어 말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본인이 그렇게 말했더라도 그 꿈의 시작은 아주 소박한것이었을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거 재미있지 않아?' 뭐 이정도였을 것이다. 대단한 의미는 본인과 사회가 나중에 가져다 붙인 것이다.
꿈이란 가치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치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일까 사회적인 것일까? 세상사람이 뭐라해도 나만 좋으면 된다라고 종종 말들은 하지만 현실을 보면 그 정반대에 가깝다. 우리는 남들이 근사하다고 말하는 것을 주로 쫒는다. 다시 물어보자. 가치라는 것, 꿈이라는것은 개인적인 것일까 사회적인 것일까. 내 생각에는 가치가 개인적인 것이거나 사회적인 것 둘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것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다 같은 하나 마나한 소리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것도 아니고 사회적인 것도 아니며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둘다도 아닌 답도 있을까?
있다. 그 답은 우선 개인과 사회를 나누는 선을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마치 우리땅 주변에 선을 긋듯이, 여기까지는 내땅 저기부터는 남의 땅으로 말하듯이, 나는 여기에 있고 사회는 저기에 있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다.
우리는 성장하고 주변 환경과 끝없이 서로를 주고 받는다. 꿈을 생각하고 가치를 생각할 때 먼저 개인과 사회를 구분하고 각각의 꿈, 각각의 가치를 생각한 다음에 그것을 합치거나 조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개인은 여기에 있고 사회는 저기에 있다는 구분을 전제로 한다.
이런 구분을 잊어버리자라는 말은 말장난같지만 내 경험에 적어도 한가지에 도움이 된다. 꿈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쓸데 없는 걱정과 계산을 덜하게 된다. 개인이 어쩌니 사회가 어쩌니 생각하는 것은 그냥 단순히 이거 멋진데 라고 생각하는데 방해가 된다. 너의 꿈을 쫒아라, 세상이 뭐라고 하는 것은 신경쓰지 말아라 라는 말이 세상에 흔하다.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말이란 항상 그것을 이해하는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것은 틀린 말이 될 수도 옳은 말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꿈을 쫒아라'라는 말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너'와 '세상'을 신경쓰는 순간 우리는 종종 쓸데없는 함정에 빠진다.
우리는 너도 세상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는다.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잊는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내가 누군지 알고,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안다는 착각에 빠진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들이 보면 부질없는 집착이 되고 제약이 된다. 그래서는 꿈을 가지기 더 힘들다. 내가 누군지, 세상이 어떤지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자신이 그런 걸 안다는 생각도 하지 말 때 우리 마음에 뭔가 떠오를 수 있다. 이거 멋진데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같은거 말이다. 그게 꿈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나와 세상을 구분하는 것 그러고 나서 뭔가 대단한 일을 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꿈을 가지기 힘든 첫번째 이유다. 자꾸 어떤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꿈을 가지기 어려운 두번째 이유는 미래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나도 종종 그렇지만 우리는 종종 뭔가가 되려고 한다. 뭔가를 가지고 싶어 한다. 우리는 그런걸 종종 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정말 될까? 세계적인 스타 배우를 보면서 나도 영화배우가 되고 세계적인 명성과 엄청난 돈을 얻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의 꿈은 이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꿈을 꾸는 방식이다.
우리가 꿈을 꾸는 방식을 다시 말해보자. 남자로 태어나서 나는 남자가 되는게 꿈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대개 우리는 여기에서 저기로 가려고 한다. 우리는 여기 서있는데 우리가 꿈이라고 말하는 저기로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일은 맘대로 되는게 아니라서 저기까지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방식의 꿈꾸기는 매우 부질없는 것이다. 세상은 변하고 불확실한 것이다. 우리가 '저기'로 갈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그것을 꿈꾸지 않아도 어른이 되고 어른은 늙어서 노인이 된다. 밥을 한끼 먹으면 그걸 먹은 만큼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사람을 하나 만나면 그 사람을 만난 만큼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도 확신하지 못하는데 '저기'에 갈지 안갈지 어떻게 알겠는가?
제대로된 꿈꾸는 방식, 꿈꾸는 방식이라기 보다는 살아가는 방식은 오직 하나다. 그건 지금 이순간 여기에서 나는 뭘 할 것인가를 선택 하는 것이다. 우리가 테니스 경기를 한다고 하자. 나는 경기를 이기고 싶다. 전략도 짠다. 하지만 내가 할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매 순간 나에게 날아오는 공을 치는 것이다. 우리는 테니스 게임도 어떻게 흘러가는지 예측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정교하게 계획을 세워서 테니스게임에 임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우리는 대개 우리의 스타일로, 우리가 반복연습해서 잘하는 식으로, 우리가 지금 가진 기술과 힘으로, 문득 문득 떠오는 영감에 따라 공을 친다.
테니스게임도 그런데 인생을 예측해서 살아간다는게 말이되는가. 나는 꼭 성공한 영화배우가 되어야지 라는 꿈을 중얼중얼 외우고 살아가는 것은 테니스게임을 하면서 나는 이겨야돼 나는 이겨야돼를 외우고 시합하는 것과 같다. 어느정도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대개는 방해만 된다.
꿈이란 종교같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화가의 꿈은 화가라는 삶의 형식대로 삶의 공을 치면서 살겠다는 것이고, 과학자의 꿈도 정치가의 꿈도, 사업가의 꿈도 그 스타일로 공을 쳐보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이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하게 제대로된 꿈꾸는 방식이다. 우리는 오직 지금 이순간, 여기를 살 수 있을 뿐이며 우리는 오직 인생의 순간 순간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미래는 알 수 없다. 성공은 노력을 요구하지만 노력하면 꼭 성공한다는 말도 오만이다.
우리가 종종 저지르는 실수는 체험과 체험하는 대상을 혼동하는 것이다. 맛을 느끼는 체험과 맛있는 빵을 혼동하는 거랄까. 체험이란 외부의 것, 객관적인 사실로만 이뤄지는게 아니라 내가 그것들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면 등산가처럼 걸어갈 일이 아니라 헬리콥터를 타고 정상에 갈 일이고 수십킬로를 가고 싶다면 마라톤 선수처럼 뛸 일이 아니라 자동차를 타고 갈 일이다. 맛있는 음식도 배가 부르면 소용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보석왕관도 남의 것을 그냥 들고 있어야 한다면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업가로 사는 체험이나 정치가, 과학자로 사는 체험과 사업가, 정치가, 과학자라는 자리나 이름을 혼동할때 우리는 처음 꿈을 잊고 엉뚱한 것을 쫒는다. 테니스 선수가 이기고 싶다고 상대편 선수를 총으로 쏴버린다고 하자. 게임에 이긴걸까? 그렇게 이길거면 애초에 연습은 뭐하러 했을까. 애초에 테니스게임을 이기겠다는 꿈은 왜 꾼걸까. 목표가 중요하다고 해도 그 목표를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그 과정이다. 그런데 목표를 꿈으로 부르면 우리는 종종 과정을 그 목표를 위해서 왜곡하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가 가질수 있는 것이 체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외부적으로 봤을 때 그것은 꿈을 이룬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과정이 왜곡되는 순간 꿈은 끝난 것이다. 꿈이란 목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장사꾼으로 부르고 장사꾼으로 성공했다고 말해도 장사꾼의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장사꾼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체험이 아니다.
꿈은 저기 멀리 미래에 있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산다. 꿈이란 우리가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사는 순간 성취되는 것이고, 그렇게 살기를 멈추는 순간 깨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가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안다면 오히려 의미가 없다. 안다는 것은 미래가 결정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가 이미 체험되어졌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 꿈이 이미 소진되고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고 결정해야 하는 일은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결정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안되면 어떻하지? 어쩌겠는가. 내 할일을 다했는데 일이 그렇게 되는 것을. 이것을 잊을 때 우리는 해야할 일은 하지 않게 되고,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절대로 변할수 없는 진리로 믿게 된다. 사기꾼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속인다.
'주제별 글모음 > 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짜는 거의 공짜로 얻게 된다. (0) | 2014.03.12 |
---|---|
젊은이들이 살기 힘든 이유 (0) | 2013.10.30 |
실패에 대한 우리의 자세 (0) | 2013.10.18 |
청춘소설과 우리의 세계 (0) | 2013.08.08 |
부족한 사람이 외우고 다닐 두가지 (0) | 2013.05.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