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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젊은이들이 살기 힘든 이유

by 격암(강국진) 2013. 10. 30.

2013.10.30

들어가며

 

88만원세대, 아프니까 청춘이다같은 책들이 대표적이지만 젊은이들의 힘든 삶을 분석하거나 젊은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담론은 많다. 그러나 청년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청년들이 살기 힘든 이유가 뭘까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젊은이들이 살기 힘든 가장 큰 이유는 자기가 못나서도 아니고, 원래 청춘은 아프기 때문이 아니고, 월급이 작아서도 아니고, 안정된 직장이 작아서도 아니다. 그런 이유들은 다 옳은 말이지만 진실의 절반이거나 작은 진실이다. 

 

젊은이들이 살기 힘든 이유로 첫째로 꼽아야 하는 것은 공동체의 붕괴다. 이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모든 해법들은 소용이 없거나 젊은이들의 삶을 오히려 더 힘들게 만든다. 인간의 삶이 살만한 것은 어떤 인간이 잘나서가 아니다. 그 이전에 협력하고 공존하는 공동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승엽이나 류현진이 잘나서 돈을 잘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애초에 프로야구라는 시스템이 깨어진다면 그들이 돈을 벌 수 있을리가 없다. 감독이나 선수들이 부패하여 승부조작이 마구 일어나고 대중의 흥미가 떨어진다면 그들은 비인기스포츠에서 재능을 가진 다른 선수들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공동체라는 말에 대해 우리는 너무 쉽게 그게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공동체는 종종 눈이 어두운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대부분의 성공담은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그들은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이야기하면서 아픈 기간을 통과했지만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기껏해야 절반의 진실이며 종종 진실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실상 어떤 공동체 속에서 남의 희생에 기반하여 성공한 것이다. 재벌3세가 내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다고 자화자찬하는 꼴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젊은이들에게 스스로의 책임을 통감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라는 말은 좋은 말이지만 성공에 있어서 공동체의 부분을 망각하고 폄하하는 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공동체를 파괴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문제는 '나' 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한 경쟁, 약육강식, 무한대의 시장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누가 가장 힘들까. 사회적 약자다. 그들은 가진게 없기 때문에 더 빨리 생존의 위기에 빠지고 살아남기 위해서 남의 노예가 된다. 그들이 살아남을 방법은 더 빨리 뛰는게 아니라 공동체를 부활 시키는 것이다.

 

공동체의 예들

 

잘 보이지 않는다는 그 공동체는 뭐가 있을까. 가장 중요하고 흔한 예는 가족공동체다. 한국의 가족공동체는 요즘 많이 달라졌다. 정확히 말해서 파괴되었다. 요즘의 노인세대와 중년세대가 가지는 가족관계는 중년세대와 요즘의 청년세대가 가지는 가족관계와는 다르다. 경우에 따라 다르고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과거의 그것이 운명공동체라는 개념이라면 요즘은 매우 서구화되어 있다. 즉 20살때까지 키우면 그 다음은 네가 알아서 살아라, 나도 내가 노년준비해 놓은 것으로 살겠다는 식이다. 

 

나는 과거의 가족풍습을 무조건 찬양하거나 그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다 답이 다를 수 있고 언제나 중요한 것은 일반론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내가 뭘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외가 거의 없는 일반론도 있다. 그것은 바로 뭐가 되었든 우리는 공동체의 힘에 의존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세포에 불과하다. 그 세포가 모여서 하나의 몸뚱아리를 이뤄야 변화하는 바깥 세상에 대처할 수 있다. 홀로 떨어진 세포하나는 무력하게 죽어버린다. 

 

가족공동체의 경우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가족공동체가 붕괴되었다고 할 때 과연 그 역할을 대신해 줄 다른 공동체는 강화되었는가? 그것은 지역공동체일수도 있고 사적인 네트워크에 의한 집단공동체일 수도 있으며, 크게는 국가공동체일 수도 있다. 하나의 공동체가 파괴되었다면 우리는 뭔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개인적 선택에 의해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할수 있다. 우리는 그게 뭐가 되었든 공동체 역할을 하는 뭔가가 필요하다. 

 

오늘날 젊은이가 살기 힘든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과거의 공동체는 깨어졌지만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협약도 나타나지 못했다. 나는 한국의 자살률이 전세계 최고가 된 것은 바로 이런 공동체 붕괴로 개인들이 외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먹고살기 힘들어서가 아니다. 해방이후에 한국이 극빈국가였을 때도 한국의 자살률은 이렇게 높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붕괴하고 사회는 무한경쟁으로 바뀌고 연약한 젊은이들은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 노예화되어가는 것이다. 그런 상황속에서 개인의 노력만을 생각하면서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를 반성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최고수준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최근에는 이혼률마저 세계최고수준으로 급등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가족이 붕괴하고 핵가족이 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부부공동체마저 연약해 진 것이다. 요즘은 부부도 경제권을 각자 따로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부부라도 서로 각자가 얼마나 가졌는지 잘 모른다. 나는 어떤 형태의 삶도 그것자체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대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선택은 결과를 낳는다. 부부공동체의 약화도 우리의 선택이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이 공동체를 약화시키기로 결정했을 때 당신은 그 역할을 해줄 다른 공동체의 강화를 고려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자식도 배우자도 없는 불쌍한 독거노인이 되기 쉽다. 바로 요즘 노인 자살률을 크게 올리는 외로운 노인들 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손자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대가족 공동체의 존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이 법적으로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다고 해서 부부공동체가 있는게 아니다. 공동체의 기반은 신뢰다. 니것 내것이 없을 정도의 신뢰가 있으니 죽을 날까지 기대어 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기 통장하나 들고 그것이 나를 지켜줄것으로 생각하면서 모든 공동체를 약화시키는 사람은 어리석은 것이다. 공동체 없는 개인은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의 핵심은 부동산이다. 너도 나도 부동산으로 재산을 가지고 있으니까. 청년이 살기 힘든 이유중 하나도 집값이 비싼 것이다. 그리고 주거비용이 비싼 것도 따지고 보면 공유의 경제, 거주 공동체의 붕괴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할아버지가 마당깊은 집에서 여러칸 집을 짓고 사는 시대에는 손자는 기본적으로 결혼을 하면서 집을 사는 비용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주거형태는 아파트로 바뀌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레 한국은 모두가 기본적으로 독립된 공간을 가지고 그 안에 내 것을 모두 가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변했다. 집은 커지고 그 이상으로 비싸졌다. 그리고 그만큼 지역공동체는 붕괴하고 마을개념은 사라졌다. 즉 공유의 경제가 더 깨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집이 없어서 살기가 힘들며 더 많은 집을 지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을 보면 오늘날의 자가 소유율은 해방 직후보다 오히려 낮다고 한다. 부동산이 주거하는 소비재가 아니라 돈버는 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진 것없는 젊은이가 공유의 경제, 공동체를 잊으면 비싼 돈들여서 다 자기가 사야한다. 그러니 빚을 지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그런데 한국에는 그렇지 않은 삶의 형태, 대안적 삶의 형태가 멸종되어져 간다. 때문에 사람들은 주변사람이 하는 것을 따라하면서 당연히 빚내서 아파트를 사는 것이 젊은이가 살아가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체 부활에 있어서 빼놓을수 없는 이야기는 물론 마을만들기다. 마을 만들기는 기본적으로 거주공동체를 부활시켜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비용은 떨어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마을 만들기가 일자리를 만들고 육아를 쉽게 하고 다른 공동체가 그러하듯 외부의 변화에 개인이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살기 힘든 이유는 이런 마을 만들기 공동체 운동도 아직 세상을 바꾸었다고 할만한 성과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요한 공동체는 국가공동체도 있다. 청년의 삶이 어려운 이유는 나라가 상식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고, 국가공동체가 붕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든 세대가 연금이나 세금의 형태로 젊은 세대를 착취하거나 한 몫챙겨서 외국으로 도망가거나, 돈 다쓰고 살다가 죽으면 뒷세대가 빚감당을 하겠지라는 식의 도덕적 해이에 빠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 공동체가 모든 것을 해줄 수는 없다. 즉 다른 공동체가 강화되지 않는다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은 느릴 것이다. 

 

흔한 조언의 뿌리

 

이러한 점은 사람에 따라 그다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극복은 그렇게 쉽지 않다. 이런 사고방식은 그 뿌리가 매우 깊기 때문이다. 그저 단순히 나를 도와준 사람에게 고마워 하지 않아서는 곤란하다라는 작은 도덕적 반성정도에 그쳐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족 공동체의 붕괴만 해도 아마 많은 젊은이들은 유교적 가족 질서는 끔찍한 감옥이며 자유가 나는 좋다라는 말에 금방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사회적 원칙에 익숙하다. 우리는 편견없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도 익숙하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말을 세뇌 받는 것처럼 듣는다. 그러나 모든 말들이 그렇듯, 이런 말들도 한계가 있으며 진실의 일부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은 평등하다라는 말을 부정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다면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은 어떤가.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국경을 열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한국의 국적을 가질수 있으며 중국인 노동자 몇천만명쯤 불러와 한국에서 살게하자고 하는데 동의하는 한국인은 얼마나 되는가. 자유가 뭐고 평등이 뭔가. 그것들은 무한대로 투명한 개념이 아니다. 

 

편견은 좋은 것이 아니지만 진짜로 편견이 적은 견해란 인간은 편견없이는 세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꺼이 수정할 자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만들어진 우리 자신을 쉽사리 던져버리고 어떤 절대적 진리에 빠지지 않게 된다. 남들이 자랑하는 진리는 흔히 이것이야 말로 진짜로 편견없는 견해다라는 식으로 선전되지만 세상에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세상에 규칙없는 게임은 없다. 따라서 자유로운 경쟁이 최적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자유시장의 신화도 신화일 뿐이다. 우리는 정해진 규칙을 지키면서 게임을 하는 것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동시에 이 규칙의 의미와 변화의 필요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모든 규칙을 당연한 것으로만 알 경우 우리는 장님이 된다. 애초에 규칙이 만들어졌던 의미는 잊어버리고 이건 규칙이니까 라고만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전철이 올 때는 철로에 내려서서는 안된다. 하지만 술에 취한 사람의 목숨이 위험할 때도 우리는 당연히 규칙을 지켜야 하는걸까? 

 

맺는 말

 

세상에는 여러가지 그럴듯해 보이는 말들이 돌아다닌다. 그 말들은 어떤 문맥에서는 정말 맞는 말이겠지만 어떤 문맥에서는 완전히 엉터리가 된다. 자기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나 계층이 단합하여 투쟁하여야 한다는 말 같은 것도 그렇다. 이 말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절반 이하의 진실일 뿐이다. 언제나 인간을 더 편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궁극적으로 화합이지 투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부간에도 남편이나 혹은 아내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고 규칙으로 정하라같은 조언은 수도 없다. 가사노동은 어떻게 분담하고, 자녀교육은 이렇게 하고, 재정관리는 이렇게 하고 하는 식이다. 그것 역시 틀리지 않지만 절반 미만의 진실일 뿐이다. 더 큰 진실은 부부의 행복은 부부간의 신뢰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투쟁해서 더 많이 빼앗아 와서 행복해 지는게 아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이해하고, 더 많은 대화를 하는 것이 먼저 전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외부에 잘 보이게 되는 어떤 숫자나 분석에 근거해서 바람직한 부부는 이렇다 저렇다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의 삶이 힘든 이유는 어떤 의미로 그들이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에게 살 곳을 주지 않고 비싼 돈을 내지 않으면 교육을 시켜주지 않는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버린 것이다. 즉 공동체의 붕괴다.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은 그렇겠지만 모두는 먼저 나의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 보고 살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공유의 경제를 실현할 방법을 찾고, 가족과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안타깝지만 깨인 눈으로 세상을 새로 보지 않고 남이 하는 말에 쉽게 따라 가도 될 만큼 한국은 따뜻한 세상이 아니다. 특히 당신이 적절한 공동체에 속해있지 않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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