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4
제 블로그의 글들은 대부분 합리적으로 살아간다라는 문제와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아빠가 되고 난 후 과연 합리적으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뭘까,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아이에게 뭘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들을 던지게 된 것이 제 블로그의 시작이었으니까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돌아보면 저는 그것을 책들속에서 찾기도 하고, 사색을 통해 과학과 역사와 철학에서 찾기도 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이번에 그것들을 정리한 것이 바로 합리적으로 살기 위한 세가지 원칙들입니다.
1. 나의 테두리를 인식하라.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논하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삶의 테두리, 사물의 테두리입니다. 합리적이지 못하게 되는 우리의 실패의 대부분은 바로 이 테두리를 보거나 적절히 확장하는데 실패하는데서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테두리의 문제를 저는 게임의 문제라고도 부르는데 사람들은 프레임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어떤 결정이나 어떤 질문에 대한 합리적인 답은 주어진 상황을 어느 정도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는가를 전제하지 않으면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에 실패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이없는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생을 보는데 있어서 어른과 아이의 관점의 차이를 생각해 봅시다.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을 보면서 철이 없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그런 어른들의 시각에 대해 아이들은 공감하지 못하곤 하는데요. 이런 관점의 차이도 어른과 아이가 서로 인생에 대해 다른 폭의 시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더 오래 살았던 어른들은 수십년단위 심지어 평생단위로 따져서 네가 지금 이러저러한 일을 하는게 남는거다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직 세상을 얼마 안 살고 본 것도 얼마없는 아이들은 자기가 보는 인생의 넓이가 훨씬 좁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동네 골목이나 자기반의 아이들세계가 온 세상에 해당하죠. 더 어린 아이들은 가족을 온 세상으로 생각합니다. 그 아이에게는 엄마에게 칭찬받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고 합리적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처럼 느껴 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인생을 더 길고 넓은 폭에서 바라보고 있는 어른의 시각이 무조건 더 합리적이란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깊이없이 길고 넓게 보기는 사실 간단합니다. 아래에도 쓰겠지만 종종 그게 더 실속이 없습니다. 테두리를 인식하라는 말은 그 테두리를 한없이 혹은 최대한 넓혀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건 어른이건, 배웠건 못배웠건, 부자건 가난뱅이건, 무명인이건 유명인이건 사람에게는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 각자의 방식은 모두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 방식이란게 최소한의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면 말이죠.
노인은 노인의 시각이 있습니다. 더 넓게 역사적 규모에서 사고하는 사람은 한 인간의 살고 죽는것 따위는 전혀 안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후생활 준비를 위해 유년기 청년기 중장년기를 모두 희생한 사람이 더 잘 살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없습니다. 그건 그런 테두리에서 살기로한 자신의 선택일 뿐입니다. 하지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종종 어떻게 될지 알 수도 없습니다. 엄마 칭찬에만 매달리는 아이를 비웃으면서 회사에서 주는 보너스나 진급, 직장상사의 칭찬에 목매는 어른은 생각해 보면 그런 아이와 그렇게 대단히 다른 것도 아닙니다. 결국 자기에게 보이는 세상만 전부인걸로 알기는 마찬가지이니까요.
우리는 누구나 유한한 존재이며 따라서 어떤 유한한 테두리안에서 삽니다. 다만 우리는 종종 그걸 망각합니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실험은 심리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실험중의 하나입니다. 실험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전기충격기 위에 있는 사람에게 질문을 하고 틀리면 벌을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벌칙인 전기충격은 진짜가 아니지만 벌받는 사람은 진짜처럼 연기합니다. 벌칙을 주는 사람에게 이 전기충격은 극도로 위험하다는 사실도 알려줍니다. 그렇게 해도 사람들은 가운을 입은 실험자가 이건 실험이며 책임은 내가 진다고 하면 종종 한정없이 명령에 복종합니다. 행동은 자기가 한다는 책임감을 잊고 전기충격의 강도를 극한까지 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복종의 프레임, 실험이라는 게임 혹은 테두리에 빨려들어가 자신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진짜로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그 실험이 끝난후 즉 실험이라는 게임의 바깥쪽에서는 자신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망각됩니다. 그냥 상황에 복종합니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실험은 우리가 얼마나 어떤 게임이나 테두리에 쉽게 적응하며 그 바깥쪽을 쉽게 잊어버리는가를 보여줍니다. 테두리의 바깥쪽에서, 게임의 바깥쪽에서 그 실험대상자를 관찰하는 우리는 고문을 서슴치않는 그들의 행동에 경악합니다. 전쟁중에 있었던 학살이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우리안에 흔히 있는 것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그럼 당신의 게임, 당신의 테두리, 당신의 프레임은 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복종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의 행동에 경악하면서도 우리가 자신의 삶의 테두리, 자신이 지금 빠져 있는 게임을 인식하는가는 잘 확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변 사람의 행동을 무심코 반복할 때 그걸 본 누군가는 똑같은 경악의 눈으로 우리를 쳐다 보고 있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합리성에서 테두리 문제자체를 생각해 보질 않습니다. 종종 자기가 대충 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 게임이 유일한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합리적인 판단이란 유일한 것이 되고 객관적인 것이 됩니다. 자본의 법칙이니 경제학적 원칙이니 친구를 돕는게 뭐가 나쁘니 하면서 다른 걸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것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광신자입니다. 언제나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라는 말을 쓸 때 마다 우리는 그걸 두렵게 생각해야 합니다. 광신자는 너무 쉽게 뭔가를 이건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여 자신과 남을 억압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렇게 하는 줄도 종종 모릅니다. 테두리를 보지 못합니다. 게임의 바깥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못합니다. 느껴도 그걸 무시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발전도 없고 주변의 변화에 대한 적절한 적응도 안됩니다.
테두리를 인식하고 산다는 것은 지금의 테두리안에서 성실하게 살면서도, 그 게임을 충실하게 참여하면서도 그 바깥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 바깥에 대한 위화감을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즐거운 학창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다만 거기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학자로서 자영업자로서 경찰로서 시민운동가로서 자신의 삶에 충실해야 하지만 내 삶의 테두리의 바깥 쪽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산다고 해도 외국을 모르면 한국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깥을 알아야 안쪽도 알게 됩니다. 나중은 없는 것처럼 사는 것도 문제고 나중만 생각하고 인생의 중요한 한 시기를 불행으로 채우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적당한 중간이 옳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테두리를 인식하고 그 테두리에 대해 우리가 뭘 느끼는가에 달린 문제죠.
테두리를 인식한다는 것은 바깥도 인식하는 것이지만 그 안쪽도 인식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감정이나 근황도 모르면서 나는 가족을 중심으로 산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지역사회가 내 삶의 터전이라면서 정작 그 지역의 역사도 모르고, 산책길도 모르고, 맛집도 몰라서는 말이 안됩니다. 우리가 어떤 게임을 하겠다면 그 게임의 법칙과 내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만한 능력이 안된다면 우리는 상황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큰 게임으로 큰 테두리로 우리를 던져넣은 것입니다. 공허하게 자신의 형편에 맞지 않게 넓기만한 테두리는 우리를 지루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기계나 녹음기나 나무인형으로 만듭니다. 복종만 하는 인간으로 만듭니다.
사랑과 추억이 없으면서 쉽게 그걸 내 삶의 터전 운운하는 것은 공허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배우고, 세상에 대해 배운 만큼 그 테두리 안을 충실한 삶으로 채웁니다. 물론 아는 만큼 세상이 보입니다. 물리학자의 눈과 생물학자의 눈과 자영업자의 눈과 예술가의 눈과 종교인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많이 알게 되면 어떤 위화감으로만 느껴졌던 테두리가 또렷해지는 날이 올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러면 다시 그 테두리 바깥으로 나가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저 보이는게 전부라고만 생각하고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건지도 모르면 우리는 합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대개 그저 상황이 시키는대로 복종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우리는 종종 실감도 안가는 넓은 세상을 얇팍한 생각으로 살다가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국민, 회사를 생각하는 회사원은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만 누군가가 그들에게 주입한 생각에 따라 그렇게만 생각하다가는 자기 개인의 삶이 망가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노예가 됩니다. 그것도 자신의 선택일 수 있지만 자신을 잃어버려서는 핵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그다지 대단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선택입니다.
몇년전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만 사회적 정의라는 것도 기본적으로 우리가 어떤 공동체를 즉 어떤 사회적 테두리를 전제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없이 생각하는 것은 허무하고 위험한 것입니다. 지역공동체가 없으면서 지역의 정의를 논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한국에 정의가 존재한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것을 전제해야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현실적으로 문화적이고 생활적으로 공동체가 존재하는데 그걸 무시하고 단숨에 인류공동체라던가 생명공동체의 사고로 뛰어넘는 것도 허무하고 아깝고 위험한 것입니다. 존재하는 공동체는 그 내부의 정의를 통해 어떤 이득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이죠. 우리는 그 테두리에 대한 존중이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테두리를 다 부시고 모두를 원자적인 개인으로 만들어 봐야 사람들은 거대법인같은 경제시스템의 먹이만 될 뿐입니다.
테두리를 인식하라라는 원칙에 관련하여 두가지 중요한 문제를 간단히 언급만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하나는 관점의 일관성입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이 어떤 원칙들과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스스로도 잘 모릅니다. 우리는 글쓰기와 자기성찰같은 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일관성 있게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의 테두리가 자꾸 혼동이 오는데 스스로가 그걸 모릅니다. 오늘은 한국사람처럼 살고 내일은 미국사람처럼 살고 하는 식으로 판단을 섞으면 결국 삶의 테두리라는 것자체가 엉망이 되는 것이죠. 삶에 일관성이 전혀 없는데 거기서 무슨 합리성이 있겠습니까. 화목한 가정을 꾸미고 그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면서 행동은 그 반대로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또하나는 수학적 관련성에 대한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의 모범은 수학적 확률론에 따라서 사고 하는 것입니다. 테두리를 인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라는 말은 수학이론에서는 베이지언 확률 계산 이란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 확률이론을 아시는 분은 이쪽이 간단한 설명일 것입니다. 테두리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말은 프라이어라는 선험적 확률분포를 전제하지 않고 우리는 확률을 계산할 수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프라이어는 바뀔수 있고 바뀌어야 하죠. 인간이 그걸 어떻게 바꾸는가 하는 것은 인간본성에 대한 중대한 연구주제입니다.
2. 나의 감정을 인식하라.
이 세상의 문제에 대해 과학이 뭐든지 답을 알고 있는 것같은 시대지만 사실 여러가지가 정의도 제대로 없습니다. 생명이라던가 사랑이라던가 감정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슬픔은 감정이지만 배고픔은 감정이 아닌 것같죠. 식욕은 좀 더 애매합니다. 그래도 우리의 판단과 행동이 우리의 감정에 휘둘린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과 기쁨과 분노와 즐거움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결과적으로 말도 안되는 재앙을 초래하기도 하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종종 우리는 감정을 제어하라라는 조언을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기서 나아가 아예 합리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 우리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말도 안되는 생각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뭔가를 선호하고 애착을 가지는 것 자체가 감정입니다. 가치 판단에서 감정을 뺄 수는 없습니다. 감정을 제거한 합리적인 판단이란 가치판단을 제거한 합리성이라는 말처럼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 위한 합리성이 되는 것일까요?
이때문에 저는 수학적인 결론이 가장 합리적인 것이라는 주장에도 경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학은 잘 정의된 것들을 기반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그러다보면 우리가 지금 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테두리 바깥의 것, 박스 바깥의 생각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 문제를 정의할 때의 생각에 갇혀버리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의 목표는 이것이며 지금의 상황은 이러저러하므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것을 해야 한다라고 논리적으로 사고 하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웬지 머리 어딘가에서 경고음이 들립니다. 내가 지금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느낌을 무시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 문제는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어온 문제입니다. 한쪽에서는 인간의 직관적 사고가 얼마나 앞뒤가 안맞는 엉터리 결과를 주는지 아는가라면서 실험적 증거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인간은 쉽게 암시에 속고 기억도 조작됩니다. 직관적 확률계산은 종종 엉터리입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그런 직관을 무시하는 사고가 또다른 어리석음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게르트 기거렌처는 생각이 직관에 묻다라는 책에서 마약범을 잡는 경찰의 이야기를 합니다. 경험많은 경찰은 마약범을 보면 직관적으로 뭔가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추적하여 확인해 보면 실제로 마약범인 경우가 많은 것이죠. 그런데 그 경찰이 판사앞에 가서는 물론 제 직관에 따라서 이 사람을 체포했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공식적인 이유 증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실은 어느정도 비합리적이라고 게르트 기거렌처는 말합니다. 왜냐면 그 경찰은 종종 자기의 직관이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죠. 야구선수는 높은 타율을 올리면 자기가 왜 공을 칠 수 있는가를 설명할 수 없어도 됩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훌룡한 선수지만 경찰은 제아무리 척척 범인을 지목해 낼 수 있어도 거기에 합리적인 이유를 가져다 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는 편견을 가진 인종차별주의자쯤으로 지목될지 모릅니다.
경찰관의 감이란 훈련받은 전문가의 감이지만 다니엘 카네만은 우리는 모두 일상속에서 대단한 기적들을 행한다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운전하다가 옆줄에 선 운전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하는지 즉각 알아채고 전화를 받으면 첫단어만 들어도 그 사람이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직관적 깨달음이며 우리가 의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증거를 따지고 찾아서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직관을 지나치게 억누르고 일일이 그 이유를 따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판사앞에선 마약경찰과 같은 입장에 처하게 만듭니다. 물론 사람의 직관이나 감이란 종종 틀립니다. 그러나 모든 직관을 배재한 수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느낌을 모두 배제하고 살려고 하면 반드시 그 결과가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믿음의 형성에 대한 인지부조화 이론이나 무의식의 존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그저 우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 내부에는 층층이 엄청나게 근거없이 쌓아올려진 난잡한 믿음의 구조물이 있습니다. 인지부조화 이론은 신포도의 우화로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은 믿음의 형성과정을 지적합니다. 내적으로 뭔가가 불편할 때 우리는 그걸 편하게 만드는 믿음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걸 진짜로 믿습니다. 그렇게 쌓여진 믿음들은 우리 내부에서 여러가지 감정들을 만들어 냅니다. 종말론자들은 남들은 당연히 화가 나야할 위선앞에서도 말도 안되는 믿음에 근거하여 기쁨에 빠집니다.
감정이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어떤 부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메세지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이 엉망인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우리는 엉터리 메세지때문에 감정적 혼란만 빠질 뿐이겠죠.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이 주는 정보를 무시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의식하는 세계의 테두리 안에 우리를 영구히 가둬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순간에 의식적으로 보고 기억하는 것은 절대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실 여러가지를 동시에 보거나 기억하는데 별로 소질이 없습니다. 이걸 위해서도 역시 우리는 우리와의 대화가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 저 밑에 있는 믿음의 구조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 몸과 마음을 청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않으면 엉터리 메세지를 받을 테니까요. 자기를 돌보지 않는 가운데 합리적으로 살아가려고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다는 또다른 이유인 셈입니다.
적어도 아직은 과학적 마음의 이론은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데 한계가 큽니다. 스티븐 핑커는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2003년의 책에서 이제까지의 마음에 대한 이론은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틀리고 맞는가를 논할수는 있는 수준까지 온 마음의 이론 즉 진화심리학적 이론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가 여러번 강조하는 것은 그 이론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말하는 이론이며 그 차이에 비하면 아인쉬타인과 어린애의 차이는 별거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그 최신의 이론이 옳다고 해도 그 일반론적 마음의 이론은 7살난 아이나 범죄자 그리고 아인쉬타인이나 뉴튼, 간디와 슈바이처, 부처님, 예수님, 소크라테스, 공자를 구분하지 않는 이론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에서도 마음의 이론이란 고작 이정도 입니다. 최신의 과학이론들이 내놓는 실험결과를 읽으면서 사람들은 그를 통해 우리의 논리적 오류를 배우고 더 합리적인 사람,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될것을 기대할지 모릅니다. 뭐뭐든 배우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무겁고 복잡한 개념들과 실험적 사실 속에서 자기 감정과 자기 자신이 실종되어서는 안됩니다.
유령을 보는 사람과 유령을 보지 않는 사람중 합리적인 사람은 유령을 안보는 사람이라고 간단히 판단 할 수는 없습니다. 합리성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 문맥과 테두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원한을 품고 죽으면 유령이되서 나타난다고 믿는 사람은 이웃의 죽음을 안타까운 일로 생각하는데 유령따위 안믿는 어떤 사람은 이웃이 불에 타 죽어도 어린 학생들이 물에 빠져 죽어도 아무것도 느끼는 것이 없다면 여기서 우리는 어느 쪽을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요. 과학적 연구에서 그렇게 하듯이 뭔가를 잘라서 작은 조각으로 나눠서 확실하게 만든 사실에서는 가치와 감정은 실종됩니다. 기름이 없는 제트기보다는 녹슬어도 앞으로 가는 자전거가 훌룡한 것입니다. 무겁고 반짝이는 지식들과 개념들을 삼키다가 자기 감정을 잃으면 그건 처음부터 안 배운 것만도 못합니다.
3. 내게 주어진 시간을 인식하라.
인간은 현대사회 속에서 살아가도록 진화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걸 생각하면 우리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지나치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와 광고와 자극에 노출 됩니다. 이백년전만 해도 인터넷도 자동차도 없는 마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시계도 없는 시대에 약속시간 10분이 늦었다 안늦었다는 아무것도 아니었겠죠. 그때문에 모든 것이 빠르고 복잡해진 오늘날, 부자연스러운 환경에 사는 우리의 직관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광고를 볼 때마다 우리의 생각이 바뀐다는 것만 봐도 이걸 알 수 있습니다. 직관을 너무 믿지 말라고 하는 조언이 세상에 홍수를 이루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확실의 앞에서 선 유한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뭘 어떻게 하건 언제나 좋은 결과만 생산하는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판단에 대해 가장 합리적인 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판단은 되도록 하지 말라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유보할 수 있는 판단은 유보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그런 판단을 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우리는 끊임없이 이쪽이든 저쪽이든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합니다. 하지만 판단을 하지 말라는 조언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가능한한 가볍게, 단순하게 살라는 조언이기 때문입니다. 무한히 가벼워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벼워 질 수 있는 만큼은 가볍게, 단순해 질 수 있는 만큼은 단순하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단순한 삶은 우리가 해야할 선택의 양을 줄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줄어든 선택의 양만큼 해야하는 선택을 시간적 에너지적 여유를 가지고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이리저리 삶을 쓸데없이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은 모든 판단을 시간을 쫒기면서 내리고 결과적으로 수없이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더 코가 꿰여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길다면 긴 평생도 마치 영원을 살 것처럼 살면 한순간에 다 낭비해 버리고 마는 것처럼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사기꾼이 싫어하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라 천천히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전문가야 말로 사기꾼에게 속기 쉽다고 하더군요. 전문가들은 어떤 좁은 경험안에서 자신을 특화시켰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 많은 선입관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정밀부품일수록 제자리가 아니라 다른 장소에 넣어지면 소용이 없듯이 전문가란 평상시와는 다른 문맥속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약간의 암시를 주면 아주 엉망으로 판단을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2002년에 프레데릭 브로셋이라는 사람이 54명의 와인 전문가에게 여러병의 포도주를 시음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 와인중에는 백포도주에 맛을 내지 않는 식용색소를 넣어 만든 적포도주도 있었습니다만 그 전문가들은 단 한명도 이것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후일의 실험에 따르면 2-3%의 사람들은 이것이 백포도주 맛이 난다는 것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와인의 비전문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맛에 대해 선입견없이 접근할 수 있었지만 전문가들은 붉은 빛을 보면 선입견을 강하게 가지기 때문에 오히려 그 맛을 구분해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판단을 피할 수 없는 때는 많습니다. 어떤 때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 자체가 결론이 됩니다. 지나치게 시간을 쓰면 그것 자체가 낭비가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합리적 행동은 최대한 시간을 쓰고 마지막까지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충분히 시간과 정보를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되 결론은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어떤 경우는 다행히 뭔가 사정이 바뀌어서 문제와 질문자체가 사라집니다.
결론을 내리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위험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외부적으로 이거다 저거다라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 경우 그 믿음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스튜어트 서덜랜드는 비합리성의 심리학에서 한 실험을 언급합니다. 대상자들은 가짜로 만들어 낸 자살 노트들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걸 가짜노트와 진짜 노트로 분류하도록 만듭니다. 나중에 그 사람들은 그 노트들이 실은 모두가 가짜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만 그들은 자신의 분류가 틀렸다는 것을, 그것들이 거짓이라는 것을 잘 못믿는다고 합니다. 사람은 이거다 저거다 결론을 내리고 나면 거기에 나름대로 이유를 가져다 붙이곤 합니다. 그 안에서 그럴듯한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까지 되면 심지어 이 모든 것이 틀린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자신의 이론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즉 자기가 자기 이론에 갇히는 것입니다.
아직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는데 이거다라고 결론을 내버리고 특히 그걸 입밖으로 내뱉으면 우리는 그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가에 대한 이론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결론에 맞는 정보만 보게 됩니다. 결론은 뒤집어지기가 어려워 집니다.
언급할 만한 중요한 예는 우리가 우리 인생에 결론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이것이다라고 하면 그것이 성공이건 실패이건 우리는 마치 연극이 끝난 후의 배우처럼 됩니다.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는 사람이죠. 그러므로 살아있는 한 삶의 결론은 좋은 결론이건 나쁜 결론이건 내려서는 안됩니다. 그래봐야 그 결론에 갇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잘보고 그 다음에는 즉흥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후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잘봤다라는 것은 시간을 두고 정보를 구하고 결론을 내리지 않은채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봤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테두리의 관점에서 그것의 의미를 느끼는 것입니다. 테두리 안에서 테두리 바깥에서 그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일은 당연하게도 앞에서 말한 테두리를 잘 의식하는 일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즉흥적으로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한 후에 결론을 내릴 때도 너무 논리적으로만 따질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느쪽으로인가 쏠려있다면 그걸 하면 됩니다. 그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이 충분치 못해도 그렇게 선택하는 쪽이 옳습니다. 그걸 선택하지 않으면 후회할 테니까요. 이 일도 두번째 원칙인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번째 원칙을 어느정도 까지 지켯는가에 따라, 우리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건강하게 유지해 왔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항상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판단과정보다 더 훌룡한 판단과정이 있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다시 판단해도 그런 식으로 판단할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차피 결과론적으로 이게 옳다 저게 옳다는 말은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선택을 내리는 순간은 미래는 불확실했기 때문입니다. 삶은 정답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틀리는 것도 삶의 일부입니다. 언제나 맞을 수는 없습니다.
내 친구가 답을 알고 있었고 그가 강력하게 어떤 답을 말했는데 나는 반대로 선택해서 틀렸다고 해도 우리는 반드시 후회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원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그 친구가 뭘 말하면 얼마나 믿을 것인가의 원칙, 그 판단을 내릴때 나는 그친구를 얼마나 믿을 수 있었는가하는 것에 대한 원칙입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친구에 대한 신뢰를 좀 더 올려야 하기는 하겠지만 미래에도 친구가 이거라고 주장한다고 무조건 그걸 할 수는 없으니까요.
안타깝지만 우리는 대개 한정없이 결정을 뒤로 미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는 주어진 시간안에서 과감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그게 최선이니까요. 시간을 넘겨서 결정하는 것보다는 그게 좋았으니까요. 지나고 나서 이랬으면 더 좋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고 언제나 최고의 행운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는 느리게 살고 느리게 만나고 느리게 아이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할 수 있는 만큼, 주어진 시간이 있는 만큼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거듭하는 이유는 후회를 하게 되면 우리는 도박을 하려고 하고 존재하지 않는 지름길을 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착실하게, 길게 보면 확률적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으며 결과가 어찌되건 내가 선택한 길을 걷는게 아니라 한방에 큰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에 유혹됩니다. 사실 사람들이 복권을 산다는 것은 사람이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 선전에 잘 속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흔한 예중의 하나입니다. 확률계산을 해보면 저금을 하는게 훨씬 훌룡하기 때문이죠. 그래도 우리는 복권탄 사람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 참지 못하고 복권을 사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복권에 당첨되기도 어렵지만 그렇게 당첨되어 행복하게 사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말이죠.
후회를 하게 되면 합리적으로 믿는바대로 자신이 선택한 테두리 안에서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합리적이라는 것에 반감을 가지는데 그건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는 엉터리 주장에 대한 반감입니다. 합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결과의 문제일 수가 없습니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한 것이며 우리는 항상 유한한 테두리에서 그 결과를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문맥이 달라지면 결과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 것은 합리적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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