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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by 격암(강국진) 2015. 9. 26.

2015.9.26

우리는 흔히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 같은 말을 한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 신드롬이라고 불러야할 병도 있다. 내가 말하는 좋은 사람 신드롬이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종종 그 사람은 이용해 먹기 딱 좋은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으며 가만히 보면 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말도 못듣는 경우도 많다. 오히려 그런 말을 더 많이 듣는 것은 그런 의무감이 없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도대체 우리가 말하는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종종 좋은 사람이란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 정도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나는 좋은 사람이 되야해라는 의무감을 느낄 경우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 부탁이 정말 무리한 것일 때도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실제로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면 주변사람들은 점점 더 그 사람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서 그 사람의 일을 평가 절하한다. 고마움이 없어진다. 오히려 남의 부탁따위는 쉽게 받아주지 않는 사람이 뜻밖에 어떤 도움을 줄 경우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기 바쁘다. 대표적인 것이 엄마다. 자식들은 자기부탁은 뭐든지 들어주는 엄마의 친절과 봉사에 무감각해 지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마치 엄마는 자신에게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낯선 사람의 친절함을 만나게 되면 그건 또 대단한 것처럼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엄마만 이런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다른 사람을 위해 불평없이 일하면서 불공정한 취급을 받는다. 마치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애초에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좋은 사람을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이해하는 것은 세상을 사는데 별로 도움이 안되며 우리로 하여금 좋은 사람 신드롬에 빠지게 하고 자신에게 고마운 사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  좋은 사람을 이렇게 정의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존재한다는 가정이 깔려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존경할만한 종교인을 통상 좋은 사람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나쁜 사람들이다. 출가한 스님이나 신부는 세속적인 사회관계를 완전히 혹은 대부분 끊어버린다. 그리고 나서 종교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내 식대로 살아가겠다는 강력한 의지와 고집이 있다. 친부모에게서도 등을 돌리는 매정함이 있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건 일단 그 점에는 양보와 타협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고 해도 종교인인이상 남의 부탁을 다 들어준다고 해서 누가 당신의 종교를 포기하시요라고 하면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이 예는 언뜻 들으면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지나갈 수 있지만 중요한 요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종교인이건 종교인이 아니건 우리는 각자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이 있으며 그 안에는 어떤 규칙, 금기, 가치판단,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종교인의 경우에는 그것이 뭔지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어떤 종교인이 사람 좋아 보인다고 해서 그에게 그 방식이나 금기를 깨라고 부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불법을 포기하라는 부탁이나 고기를 한번 먹어보라는 부탁을 들어주는 스님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종교인이 아닌 사람은 어떤가. 그 사람이 의식하고 있건 의식하고 있지 못하건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가치판단과 삶의 방식, 삶의형식이 있다. 그 사람이 남의 부탁을 듣고 그것들을 쉽게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우리는 남의 삶의 방식을 잘 이해하는가? 우리는 스스로의 삶의 방식이 뭔지 고민하고 정리하면서 살고 있는가? 뭐가 양보할 수 없는 것이고 뭐가 양보해도 되는 것인지 알고 있는가?

 

형식이 없는 삶은 불가능하거나 의미가 없다. 우리는 그냥 살뿐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우리는 자기 나름의 윤리와 금기와 규칙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종종 너무 당연해서 자기가 그런 규칙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짜증난다고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것이 나의 규칙이라고 의식하는 사람은 별로없다. 그건 그냥 당연한 것이다. 많은 규칙이 그냥 당연하다. 

 

이제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도대체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가르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타인을 가르켜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린 친구가 아니냐며 자신의 불륜행각을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걸 돕는 게 좋은 사람일까, 그걸 거부하는게 좋은 사람일까? 책상앞에서는 답이 있을지 몰라도 현장에서는 이런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렵다. 언제나 현실에서는 애매한 회색빛을 띠는 일들에 대해서 이걸 좀 안해주는 사람은 매정하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세 사람이 모였을 때 두 사람이 서로 입장이 다르기에 남은 한 사람이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그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부탁을 잘 들어주고 하는 식으로 좋은 사람을 생각하면 오히려 좋은 사람으로 살기가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란 어떻게 말하면 사람들이 서로에게 서로의 삶의 방식을 전도하게 되는 기회나 마찬가지다. 그 방식이 유사하거나 같으면 그 두 사람은 가까운 거리에서 공존하면서 더 강력한 공동체관계를 유지하면서 살 수가 있다. 그것이 서로 다르면 그게 불가능하다. 그런 경우 서로 서로가 같다는 착각하에 서로 서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오해만 사고 분노를 일으킬 것이다. 스님에게 스테이크를 주고 그걸 안 먹는다고 나를 무시하는구나, 왜 고기를 안 먹는다는 것인가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나의 금기와 나의 가치판단이 무조건 당연하고 상대방의 금기와 규칙은 사소한 것으로 이래도 저래도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다. 아이 뭐 그런 사소한 것가지고 그래라고 하면서 남의 인생을 엉망으로 흔드는 무신경한 사람은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좋은 사람의 의미는 오히려 아주 분명한데 왜냐면 그들은 바로 좋고 나쁜 것이 객관적으로 다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입장과 자신의 가치판단이 아주 당연하다. 일상의 많은 싸움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좋은 사람 신드롬의 문제는 여기서 분명해 진다. 자기 삶의 질서에 대해 생각없는 사람들이 하는 부탁을 다 들어주다보면 내 삶도 없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나쁜 짓을 하는 것이 된다. 도박장에 있는 도박중독자에게는 도박자금을 빌려주는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도박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도박을 더하라고 돈을 빌려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도박이 나쁜 거니까 그거야 당연하다고? 사실 모든 일은 불확실성이 있으며 그 흑백을 가리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다. 그걸 생각하면 좋은 사람의 길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좋은 사람이란 자기의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을 하고 좋은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삶의 방식이 비슷하면 가까이에서 더 많은 대화를 나눌수 있고 같이 살 수도 있다. 그렇지 못하면 타인에게 자신의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설사 자신의 선택때문에 지옥같은 고통에 빠지거나 내일 죽는다고 해도 우리는 모두 자신의 선택대로 살아야 한다. 내 방식이 아무리 당연하고 옳아도 우리는 적당한 거리에서 초대만 할 수 있을 뿐이며 그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것에 대해 섭섭해 할 것도 비난할 것도 없다. 각자 자기의 선택에 따라 결과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이란 삶의 방식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없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삶을 마구 흔들고 이유없이 멀어지다가 이유없이 제로의 거리를 가지려고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일단 자기가 괴롭다.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일관성있게 검토해 보질 않았기 때문에 왜 괴로운지 잘 모른다. 더 나쁜 것은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마구 흔들고 싶어하고 결정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너무나 많은 것이 그나 그녀에게는 당연한 것이니까 그렇다. 

 

우리는 어떤 좋은 사람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누가 있던 그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초대뿐이다. 그 초대에 응하고 안 응하고는 나에게 달린 것이다. 내 의지와 내 선택과 내 안목에 달려있다. 사실 좋은 사람은 지금도 당신에게 기회를 주면서 행복의 길로 당신을 초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당신은 차버리고 있을 가능성은 아주 크다. 

 

이 초대에 응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결정하는 방식에는 두가지가 있는 것같다. 하나는 이해를 하는 것이다. 그 삶의 방식이 뭔지, 어떤 댓가를 치루면 무슨 보답을 받는지를 이해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고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실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종교를 지식의 길로 이해하는 것과 같다. 불법을 이해해서 부처님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렵고 느리고 어쩌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능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두번째 방법은 믿는 것이다. 다는 커녕 거의 대부분 그 원리와 구조를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상대를 믿기에 그 초대에 응하고 그 방식으로 살아보기로 하는 것이다. 어울려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에게 나를 믿으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믿음은 그 자신의 선택이다. 소중한 사람에게 믿음을 얻지 못하는 것은 슬픈일이지만 어떤 사람이건 자신이 선택한대로 살아야 한다.

 

자기에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찾는 것이다.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괜찮은 삶의 방식을 이해시키거나 나를 믿게 해서 그런 삶의 방식을 전파하는 것이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남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 그것은 범죄에 가담하라는 부탁을 들어주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자기 삶에 대해 고민이 없는 사람은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가 없다. 내 눈에 좋아보이는 것이 어떤 나쁜 일일지도 모르면서 뭘 해준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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