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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사회적 참여 잘 할수 있을까?

by 격암(강국진) 2013. 12. 13.

세상을 보면 의견이 생기고 말도 하게 된다. 참여도 하게 있다. 의견을 내는 것이건 참여를 하는 것이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중요한 일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내가 하면 할 수 있냐의 문제'. 이걸 줄여서 내잘수 문제라고 부르자. 내잘수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고 나를 포함해서 누구에게나 해결이 어려운 문제이며 피할 없는 문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누가 봐도 엉터리 같은 방법으로 이걸 우회하거나 무시하고 해결한 척한다. 그리고 결과 세상은 조금 살기 나쁜 곳이 된다.

 

사람들이 비판이나 평가의 경우 종종 쓰는 한가지 방법은 비판은 내가 하면 잘할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역사상 최고점 기록을 가진 김연아의 스케이팅을 보고 김연아보다 스케이트 타지 못할 같으면 의견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전세계 모든 사람의 침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당연히 저것보다는 내가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동산이나 교육, 국방, 과학등 어떤 사회적 문제를 말할 때 당연히 이렇게 해야지 그러면 문제는 사라진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부동산 보유세를 올리면 한국 부동산 문제는 즉각 사라진다라는 식으로 말하는것이다. 즉 잘할수 있을까에 대해 잘할수 있다고 확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탐욕스러운 인간이나 어리석은 인간, 배신자로 부르곤 한다.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보통 좋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자명한 답이 있으니 내잘수 문제같은 것은 사소한 것이다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지만 답들은 자명하지도 않을 뿐더러 실용적으로도 의미가 별로 없다. 물론 내잘수 문제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침묵만 지킬 수는 없다. 내가 해도 잘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말은 해야만 하는 것이 옳아 보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내잘수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는 사람들의 의견이란 매우 제한된 의미만을 가진다. 그건 마치 돌고래가 육지에 있는 코끼리에게 물속에서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하면 되지 그걸 안해라고 묻는 식이 있다. 바보같은 돌고래는 코끼리가 돌고래인 자신과 다를 뿐만 아니라 자신은 물에 있고 코끼리는 육지에 있다는 환경의 차이도 인식하지 못하고 의견을 내고 있다. 자신이 코끼리처럼 몸이 무겁고 육지위에 있다면 일미터도 못 움직일거면서 말이다. 자신을 모르고 환경을 모르니 의견이 거의 무의미하다

 

우리는 이렇게 어리석은 돌고래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어리석을지 몰라도 세상에는 똑똑하고 경험많은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이 모두 이런 어리석은 돌고래는 아니지 않겠는가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나를 포함하여 우리중 이 돌고래보다 현명한 자는 매우 드물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아는 것을 알지 우리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 거기에는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기본적인 관점의 문제도 있다. 우리는 종종 그런게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공부많이 하고 말잘하고 특히 말싸움에 능한 사람이 많다. 세상에는 권력을 휘두르며 주변사람들과 아랫사람들이 네네하고 굽신거리니까 자기가 매우 똑똑한 줄 아는 사람도 많다. 이래서 유명해지고 권력을 가진 다는 것은 좋은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두려운 일이다. 성공은 자신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할 뿐 뭘 모르는지를 더 모르게 만든다. 자기를 모르고 다른 사람을 모르고,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은 내잘수 문제에 대해 대처할 수 없다. 무식한데 부지런한 사람은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 낸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남의 삶에 비집고 들어가서는 모든 것을 망쳐놓고 만다. 이명박 전대통령은 내가 해봐서 안다라고 말하는 말버릇이 있었다. 이 말이야말로 나에게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확신범을 가장 무서워 하고 싫어한다. 쉽게 이건 이거라고 확신하는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도 없다. 

 

유한한 존재로서 세상을 보는 관점

 

얼마나 많은 지식을 알건 얼마나 경험이 많건 분명한 것은 사람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점은 내잘수 문제를 논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세상은 금강산같이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는 곳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바위와 돌이 있다. 조약돌도 있는가하면 모래도 있으며 집채처럼 큰 바위도 있다. 길쭉한 녀석이 있는가 하면 둥근 녀석이 있고 옆으로 평평한 녀석이 있는가 하면 위로 솟은 녀석도 있다. 그러나 제 아무리 그 크기를 자랑하는 녀석도 세상의 크기와 비교하자면 어차피 작기는 좁쌀처럼 작은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꼭 크다고 더 좋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미터쯤 길이가 되는 돌멩이가 90센치쯤 되는 돌을 보면서 너는 짧다고 하거나 백킬로쯤 되는 돌이 구십킬로쯤 되는 돌을 보면서 너는 가볍구나 라고 하는 말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대학시절의 추억이 있는 중년이상의 사람들은 가끔 그 추억에 웃는다. 책몇권 더읽고 대학교 2학년생이 대학교 신입생에게 네가 민주주의가 뭔지 아냐고 말하고 네가 인생이 뭔지아냐고 근엄하게 떠들던 모습의 추억때문에 말이다. 시간이 지나 멀리 떨어져서 그 광경을 다시 돌아보니 짧은 돌앞에서 조금 더 긴 돌이 너는 짧다라고 말하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긴 돌은 긴 돌이란 말인가. 책한권 더 읽은만큼 인생의 정답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말인가.

 

여기에는 단순히 겸손하자라는 교훈을 넘어서 어떤 철학적 문제가 있다. 즉 어떤 질문에 대한 최고의 답은 하나이며 우리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질 수록 우리는 거기에 다가가게 된다는 믿음이다. 그러니까 책한권 읽은 사람보다는 책 열권 읽은 사람이 최고의 답을 말할 가능성이 크며 우리는 나이를 먹고 많은 것을 배울 수록 여러가지 질문들, 예를 들어 인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해 더 올바른 답을 말할 수 있게 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것은 마치 산을 등반하는 것과 같아서 두걸음이라도 더 걸은 쪽이 정답에 가깝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틀린 생각이다. 실제 세상에서는 질문의 의미라는 것이 종종 시간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고 변화한다. 문자로 나타내었을 때는 한 줄의 변하지 않는 질문도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질문이 되고 같은 사람에게도 시간과 경험이 달라짐에 따라 다른 질문으로 질문이 변화한다.

 

실제 예를 통해 이야기해 보자. 최고의 신랑감을 찾아 헤매는 여자가 하나 있다고 해보자. 이 여자는 아직 어린 나이인 열살무렵에 담장너머로 보인 옆집의 오빠를 보고 반했다. 그래서 바로 옆집의 오빠가 저렇게 대단하다면 세상에는 얼마나 멋진 남자가 많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세계를 두루 살펴서 세계 최고의 신랑감을 찾아내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물론 가능하다면 그 남자와 결혼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여자는 계속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심사하고 그들과 연애도 해본다. 시간이 지나 이 여자가 40살이 되었을때 이 여자가 만나본 남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녀는 몇명의 멋진 남자를 기억하고 있다. 자 이 여자는 그녀가 애초에 세웠던 목표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일까?

 

다양한 경험을 얻었기에 그녀는 연애하는 법에 대한 책이라도 쓸수 있을지 모른다. 남자란 이런 존재라고 강연도 할수 있을지 모른다. 인기도 얻고 사람들이 과연 옳은 말씀이라고 감탄하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고의 신랑감은 누구인가라는 본래의 질문에 답하는 문제라면 그녀가 답에 가까이 다가간 것은 없고 오히려 더 멀어졌으며 그녀에게 연애에 대해 결혼에 대해 조언을 듣는 여자들은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그녀는 수많은 남자를 거치며 청춘을 보냈을뿐 결혼으로 골인하는 연애를 해보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결혼이 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만난 최고로 짜릿한 사랑은 아마도 순진하고 바라는 것 없는 소녀시절에 만났던 옆집 오빠였을 것이다. 같은 남자라도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가졌던 소녀의 사랑과 백명쯤의 남자를 거쳐본 중년의 여자가 그 남자와 만났을 때 하는 사랑이 같을 수가 없다. 신랑감을 찾는다는 행위와 그 시간이 최고의 신랑감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의미를 계속 바꿔왔다. 동시에 자기 자신을 변하게 했거나 자기 자신이 자연스레 변하는 것을 막아왔다. 그녀는 노력과 집착의 결과 어른이 된다는 것이 뭔지 모르는 40살먹은 철부지가 된 것일 수도 있다.

 

지식은 어느 정도 독과 같다. 책에 씌여진 지식은 이것은 이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섯불리 지식을 삼킨 사람들은 대부분 비극적 운명을 설파하는 운명론자가 된다. 그리고는 자신보다 조금 더 경험이 적고 지식의 양이 적은 사람에게 야 다 부질없어, 니가 인생이 뭔지 알아, 니가 과학이 뭔지 알아, 니가 연애가 뭔지 알아? 이렇게 말하곤 하는 것이다. 마치 10센치쯤 긴 돌이 짧은 돌에게 너는 너무 짧다고 말하고 자신은 길다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마치 자신은 인생이 뭔지 과학이 뭔지, 연애가 뭔지 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다. 지식이 그들의 성장을 막은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 겸손하게 살자라는 말에서 멈추는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보다는 우리가 직면하는 세상의 문제의 성질에 대해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문제도 질문도 변화하고 다른 사람이 볼 때 달라진다.

 

정치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이라고 한들 그 사람이 과연 자기 가족의 인생이라도 다 꽤뚫어볼까? 사람은 자기도 제대로 모른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한국을 위해 이런 미래가 옳다라고 할때 그 사람은 수천만명의 한국인들을 모두 만나고 이해하고 하는 말이 아니다. 좋다니 누구에게 좋은지 어떻게 아는가. 당신은 그들을 아는가. 절대적 의미에서 한국을 위해 바람직한 시스템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을까?

 

내가 독일에 갔을때 열차에 타는데 티켓을 검사하는 곳이 없는 것을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중국인 학생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때 누군가가 이건 매우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했다. 이러면 누가 돈을 내고 티켓을 사겠냐는 것이다. 독일은 물론 독일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그런 것을 막지만 그 중국인 학생의 지적도 타당하다. 아마 모든 중국인이 그 중국인 학생같고 중국에서 그 시스템을 시행한다면 열차시스템이 엉망이 될것이다. 그런 시스템을 주장한 공무원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시스템이란 옷과 같다. 중국인이 입었을때 엉망이라고 독일인이 입었을때 엉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독일인의 입장에서는 티켓도둑을 잡기 위해 소모하는 여러가지 절차와 기계들 때문에 들어가는 온갖 비용을 낭비하는 중국인이 어리석다고 할지 모른다. 도둑이 들지 모른다고 집에 전기철조망을 치고 여러가지 총을 사서 대비하는 사람은 어떤 동네에 사는가에 따라 어리석은 사람이 될수도 매우 현명한 사람이 될수도 있다.

 

잘난척하는 사람에게 하는 속된 말에 니팔뚝굵다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제 아무리 팔뚝굵은 인간이 있다고 한들 그 인간이 수천만명의 삶앞에서 겸허하지 않는다면 수천년의 역사앞에서 겸허하지 않는다면 그 인간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이다. 산속의 아담한 돌멩이 하나가 자신이 모래알보다 크다면서 자신이 천하의 크기처럼 크다고 자랑질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배우면 얼마나 배웠으며 경험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는 것인가. 우리는 모두 유한하다.

 

그래도 더 배웠고 그래도 더 경험있으니 조금이라도 더 옳은 판단을 한다? 누구에게 말인가. 어떤 문맥에서, 어떤 맥락에서 말인가. 이것이 답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보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유한하고 그래서 모두 어떤 벽을 가지고 있다. 그 벽의 이름은 무지다. 우리는 그 벽너머는 보려고 하지 않거나 볼 수없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나 사랑을 외치는 사람도 사실은 한국이나 더 작게는 자신의 직계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쪽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 사람이 말하는 사랑이란 한국인에 대한 사랑이고 내 가족에 대한 사랑일뿐이다. 물론 그나 그녀도 그 테두리바깥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들은 뭐 거기는 그 사람들 책임이지 내가 모든 걸 신경쓸 수는 없잖아라던가, 그 인간들은 원래 이러저러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 경찰에게 도둑은 그저 잡아야 할 대상일뿐이지 그가 왜 도둑질을 했는가를 고민해야 할 대상은 아닐 수 있다. 등록금 투쟁을 하는 학생에게 사회와 학교는 등록금을 받아가는 존재, 내가 투쟁해야 할 대상이지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를 고민해야 할 대상은 아닐 수 있다. 학생을 그저 등록금 내는 수입원이나 내 출세에 필요한 자료쯤으로 보는 학교가 있다면 그들은 학생의 마음은 알지 못할 것이다. 남편을 그저 돈벌어다 주는 사람으로 보는 아내는 남편을 자신의 세계바깥에 놓는 것이다. 그녀에게 남편의 좌절과 기쁨은 알바 아니다. 그저 매달 돈이 제대로 입금되고 있나만 신경쓸 뿐이다. 자식이 부모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식을 볼 때도 그럴 수 있다. 그게 전부 벽이고 우리는 크고 작은 세계속에서 산다. 매일같이 신문배달부 소년을 만나도 그 소년이 그 벽너머에 있을 때 우리는 그 소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보는 세계가 유일한 세계이며 전체세계라는 생각에서 빠져나오질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세상은 오히려 또렷히 보인다. 질문들은 유일한 의미를 가지기 시작하고 따라서 확실한 답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말을 쉽게 하기 시작하는것이다. 네가 민주주의가 뭔지 알아, 네가 인간이 뭔지 알아, 네가 결혼이 뭔지 알아 이런 말 말이다. 이들에게 내잘수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모든 인간들이 사는 세계가 자기 눈앞에 쫙 펼쳐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입장이란 것도 아주 분명하게 보인다. 세상일이란 마치 수학문제 푸는 것처럼 기계를 조작하는 것처럼 이걸 누르면 저런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누가 스위치를 누르건 이 스위치를 누르면 이러저러한 일이 생긴다. 내가 하건 네가 하건 상관없다.

 

여담이지만 실은 이것이 어떤 의미로 과학자의 세계이기도 하다. 최대한의 객관화를 통해 최대한의 협업을 추진하는 과학계는 이렇게 단일하고 객관적인 세계를 가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21세기의 비극은 이 것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이 많고 과학적 세계관을 온 세계로 확장해서 질문이 있으면 최고의 답은 하나로 존재한다라는 식의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는가.

 

참여와 의견을 내는 것의 본질은 정답을 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정답은 너의 정답이 아닐 수 있고 오늘의 정답은 내일의 정답이 아닐 수 있으니 과거를 다시 살 수도 없지만 미래를 미리 살 수도 없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지만 그날이 닥쳤을때 우리 자신은 지금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좋아하는걸 선택해 봐야 그날의 우리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조선시대 사람이 최고로 좋아했던 꿈을 이룩하면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과연 좋기만 한 일일까?

 

참여와 의견내기의 본질은 초대다. 내가 사는 세상이, 내가 사는 방식이, 내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그래도 쓸만하니 같이 살자고 하는것이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연인이 결혼하자고 프로포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제안이므로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정치가는 국민을 다 아니까 그에 적합한 정책을 실시하는게 아니다. 정치가는 국민들에게 우리 이런 관점, 이런 삶의 방식에 따라서 살아보자고 동참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의 관점이 넉넉한 폭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그것을 믿으면 우리는 그안에서 잘 살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렇게 소통하고 공감대가 만들어 지면 우리는 서로의 세계의 상당부분을 공유하는 삶 즉 공동체의 삶을 시작한다. 정의와 상식은 공동체를 전제하지 않고는 논의될 수가 없다. 공동운명체니까, 서로 신뢰가 있고 서로 의존하니까 정의가 있고 상식이 있다. 한무더기의 사기꾼이나 서로에게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 서로를 그저 이용해 먹을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정의와 상식을 논한다는 것은 뜨거운 냉기같은 단어처럼 자체 모순적이다. 우리는 식탁위에 올려진 스테이크나 깔고앉는 의자와 정의와 상식을 논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뜨거운 가슴이 없어도 냉정한 시장의 법칙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이다.

 

참여와 의견내기의 본질은 나의 세계로의 초대이므로 우리는 거기에서 두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초대할 자신의 세계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내가 가진 무지의 벽은 어디에 서있으며 나의 세계는 얼마나 큰가에 대한 고민없이, 즉 자신의 집을 청소하고 둘러보는 일도 없이 누군가를 우리의 세계로 초대할 수는 없다.

 

또 하나는 변화와 소통을 대비하는 것이다. 두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는 것만으로 행복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재앙이 되기 쉽다. 애초에 결혼따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들은 세상에 많다. 우리가 누군가를 초대하고 초대가 받아들여지면 우리는 변화를 각오해야하고 공존을 위해 이제 같은 세상의 일원이 된 사람에게 그 사람의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한다. 누군가를 우리의 세계에 초대하는 것이라고 해서 완전히 우리의 세계가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결혼이 무조건 한쪽사람의 식대로 사는 것이 될 수는 없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대비하고 상대방과 나에게서 각자 소중한 부분이 뭔지, 어떤 것을 양보해야 하고 어떤 것은 양보하기 어려운지에 대한 소통이 있어야 한다. 한국에 일용직 노동자가 부족하면 임금을 많이 요구하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를 받으면 된다라는 생각은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그들은 로보트가 아니다. 인간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 우리 이웃으로 제대로 대우할 생각이 아니면서 뭔가를 약속해서는 안된다.

 

어떤 정치가들은 그런데 소통이 없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정복뿐이다. 내가 우리 나라에 필요한게 뭔지 잘 알고 있으니 그 정답을 주는 대로 받아적으라는 식이다. 그나마 그 사람에게서 자기의 세계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있으며 그가 보여주는 세상이 수많은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는 폭넓은 세상이면 다행이지만 대개는 그렇지가 않다.

 

자기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사람은 자기집의 크기를 모른다. 그저 서너명, 그저 한 오백명 들어갈수 있을까 말까 하는 집에 오천만명을 초대하면 어떻게 될까? 사기치고 다른 사람을 짓밟아 내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의 세계는 고작해야 그 가정의 안쪽이다. 그래놓고 나는 훌룡한 가장이니 대통령을 해봐야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거기에 소통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나 그녀는 사람들을 좁은 방에 몰아넣고 밀어댈 것이다. 깔려죽는 사람이 수도 없이 나올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사회적 맥락에서 악이란 주로 그럴만한 자격이 안되는 사람이 권력을 얻고, 유명세를 얻는 것에서 탄생된다. 그들은 장님이고 귀가 먹어서 자기의 작은 집을 사람들에게 강권하면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 결국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내가 현정부나 지난정부를 싫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한계가 있지만 그들은 소통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정말 알지 못한다. 언제나 그들이 생각하는 답을 강요할 뿐인데 그 답이란게 실은 또 매우 아름답지가 못한 것이다. 천박하게 고깃국에 쌀밥먹는 이야기를 북이나 남이나 아직도 하고 있다.

 

참여와 의견내기란 문화의 전파다. 세상을 보는 방식을 제안해 보는 것이다. 따뜻한 점퍼는 따뜻해서 좋다고 하지만 한겨울에 미니스커트를 입는 여자들도 있다. 좋다는 것은 결코 자명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모두가 배부른 나라, 모두가 하루에 밥 여섯끼 먹는 나라가 좋은 나라가 아니다. 적어도 극빈층이나 문화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한병에 수백만원 하는 양주를 마셔도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마시는게 사람이라면 고작 녹차한잔을 놓고 격식을 차려서 마시면서 기분을 내는게 또 사람이다. 화려한 침대위에 앉아서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사람이라면 자원봉사한다고 한겨울에 바깥을 뛰어다니면서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참여와 의견내기란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살면 좋다, 너도 좋고 나도 좋다 이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볼 때 우리 모두가 서로의 발을 밟지 않고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런 식일때 돈도 아끼고 가족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농사꾼이 농사만 지으며 삶이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불교도가 되고나서 부터 일을 더해도 행복해 졌다. 자신의 삶이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문화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초대와 동참, 문화의 전파를 빼고 그저 내가 해봐서 아는데 라는 식의 태도로는 무책임한 결과만 양산될 뿐이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알기는 뭘 안다는 말인가. 우리가 어찌 사대강변의 역사를 몇년동안에 휩쓸어 버리면서 내가 이것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독단할 수 있을까. 알기는 뭘 안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면 내가 하면 더 잘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가치기준이 존재하는 어떤 세계를 전제하고 묻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더 좋다라던가 더 나쁘다라는 말이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고 세계는 변화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건 그게 더 재미있고 좋아보인다면, 힘든 세상살이에 위안이 된다면 같이 어울려 보는 것이다. 같이 놀았다가 재미없으면 다같이 재미있는 것을 찾는다. 그래도 결국 재미가 없으면 나중을 기약하고 관둘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재미와 위안은 역시 같이 사는데서 나온다. 혼자서만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은 역시 별로 재미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참여하고 세상일에 대해 논평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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