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선과 모터사이클관리술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4. 1. 10.

2014.1.10

%사실 나는 이책을 여러번 소개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의 독후감을 제대로 쓴 적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독후감을 쓰고 이 책을 정리하기로 한다. 

 

 

 

梓慶(재경)이라는 목수가 나무를 깎아 鐻(거)를 만드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 귀신같은 솜씨에 놀랐다. 노나라 임금이 보고 물었다. ‘자네는 무슨 기술로 이렇게 만드는가 ?’ 재경이 대답했다. ‘저는 목수일뿐 특별한 기술이 있겠습니까 ? 그러나 한 가지가 있기는 있습니다. 저는 거를 만들 때 기를 함부로 소모하지 않고, 반드시 齋戒(재계)를 하고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사흘을 재계하고 나면, 축하나 상을 받고 벼슬이나 녹을 타는 생각을 품지 않게 됩니다. 닷새를 재계하고 나면 비난이나 칭찬, 잘 만들고 못 만들고 하는 생각을 품지 않게 됩니다. 이레를 재계하고 나면 문득 제게 사지나 몸뚱이가 있다는 사실마저 잊습니다. 이때가 되면 이미 공무니 조정이니 하는 생각도 없어져, 오로지 기술에만 전념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외부적 요인은 완전히 없어집니다. 그런 뒤 산속에 들어가 나무의 본래 성질을 살펴 모양이 더할 수 없이 좋은 것을 찾습니다. 그러고 나서 거기서 완성된 거를 보게 되면 하늘과 하늘이 합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드는 것들이 귀신같다고 하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장자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내가 장자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 ZMM)을 읽고 남기는 독후감을 이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이 책의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는 책안에서 장자를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장인들이라고 말할수 있을 진짜 기술자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그가 말하는 장인들, 진짜 기술자들의 태도는 바로 이 짧은 이야기에서 잘 표현된다. 

 

두껍기만하고 난해하기로 이름난 이 책의 핵심이 이거라고 하면 어떤 분들은 애개 겨우 그거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이다. 이게 거의 전부다. 다만 문제는 이 이야기를 저자가 보는 대로의 시각에서 볼 수 있는가하는 것이 문제다. 그걸 위해서 바로 이 두꺼운 책이 등장한다. 이 두꺼운 책은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위의 장자 이야기를 저자가 읽는 방식대로, 그 문맥에서 읽게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저자는 이것을 백업 문제라고 말한다. 하나를 이야기하기위해서는 그 앞의 것을 이야기해야 하고 그 앞의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시 그 앞의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사실 이런 책의 특징 자체가 우리에게 다시 약간 다른 메세지를 던진다. 그것은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지식이 중요한 것이었다면 두꺼운 책을 요약해 보려고 하면 나는 아주 긴 요약이 필요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식을 모아놓은 백과사전은 요약이 안된다. 요약이 본래의 책과 같은 양이 될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지식에 대한 책이 아니라 반지식적인 책이다. 즉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인들의 문화 특히 서구문화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이 책보다 열배나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그 많은 이야기와 지식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앞의 장자이야기나 그보다 더짧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자가 말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를 보면서 종교적인 느낌을 가지는 것이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백만가지 가지는 것보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핵심에 가까운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문맥과 느낌이다. 이 책은 철학적 소설이고 철학이 인문학의 핵심적인 부분이라면 이 책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인문학의 본질은 체험이고 느낌이지 지식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문명을 당연시여기면서 살고 있다.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이 너무 당연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의 이름을 굳이 말하자면 서구문명이라고 말해야 할테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나름의 오해의 소지가 있다. 즉 마치 동양사람들은 그런 문명의 최면에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당연한 것은 대개 정확한 이름이 없다. 당연해서 굳이 이름을 만들지 않고 만들었다고 해도 널리 쓰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름이 없기 때문에 설명이 길어지는 것이다.

 

그럼 뭐가 당연시 된다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뭔가를 본다는 문제로 돌아가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책상이 있고 그 위에 꽃이 한송이 놓여있다고 하자. 우리는 꽃을 본다. 꽃이 저기에 있다는 것은 당연하고 자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꽃이다. 개나 망치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뭔가를 본다라고 하는 인식의 과정을 생각해보기 시작하면 그것은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눈은 어떤 감각신호를 받는다. 그 감각신호는 다시 단순화되어 어떤 이미지를 만든다. 그 이미지가 바로 우리가 인식한 꽃이다. 우리가 인식한 꽃은 실체 자체가 아니다. 그건 마치 티브이 중계를 보고 있는데 티브이 화면에 누군가의 얼굴이 나왔다고 할때 그 얼굴이 그 사람의 머리 그자체가 아닌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흄은 우리가 실체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가진 것은 감각신호뿐이니까 말이다. 소위 말하는 객관성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눈을 감으면 빌딩이 안보인다. 그럴 때 빌딩이 여전히 거기에 있다는 증거는 없다. 이건 마치 미친 사람의 소리처럼 들리는데 말하자면 흄은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두 미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을 맘대로 보는 미친사람들이 모여서 객관성을 주장하는 과학을 만들어 낼수는 없을 것이다. 유령을 마구 보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걸 못본다면 과학은 불가능할테니까. 미친 사람의 눈에는 망치가 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칸트는 이에대해 우리가 사물을 그냥 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어떤 틀을 통해서 그것을 본다고 말한다. 시간이나 공간 그리고 그것의 연속성과 같은 개념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틀이다. 인간은 모두 이런 틀을 공유한다. 틀의 공유는 객관성이란게 가능할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과학이라는게 쌓아 올려질 수 있는 기반이 될수 있다. 

 

이렇게 뭔가를 본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게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흄도 칸트도 아니다. 더 중요한게 망각되어져 있다. 그것은 우리가 과연 모든 것을 보았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실체라고 불릴수 있는 어떤 것을 지극히 단순화 시킨 것이 아닐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남자고 한국인이다. 나의 두가지 특성으로 나를 소개하자면 이 사람은 한국인 남성입니다라고 소개하게 될 것인데 그 소개는 틀리지는 않았는지 몰라도 내가 가진 수없이 많은 특성중의 아주 일부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책상위의 꽃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과연 모든 것을 다 보고 있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에 꽃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우리는 굉장히 많은 것을 무시하고 있다. 우리가 무시하는 것을 전부 이야기할 수는 당연히 없지만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자. 여기 종이 위에 숫자가 써있다. 당신은 그저 종이와 숫자를 본다. 그런데 그걸로 그것을 전부 다 보았다고 말할 수는 당연히 없다. 우리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아는가? 사실 그 숫자는 보물이 묻혀있는 장소를 말해주는 좌표이거나 로또당첨번호일지 모른다. 의자를 하나 본다. 그런데 이 의자의 의미중의 하나는 이 의자는 유명한 미술가의 작품으로 엄청난 역사적 물질적 가치를 가졌다는 것이라고 하자. 우리가 의자만 볼때 그것을 알수가 있을까? 티브이 이야기도 해보자. 티브이는 많은 화소들로 이뤄져있다. 우리는 그 화소들이 깜빡이는 것을 보고 다 보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화소들의 깜빡임만 보고 있다면 우리가 토론회를 보고 있는지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있는지를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절대로 다 볼수 없는 그 전부는 결국 이 세상 모든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가르켜 퀄리티라고 부른다. 퀄리티는 우리가 아는 것 모르는 것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며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있을수 없기 때문에, 그런 구분이 등장하기 이전의 것이기 때문에 이런 작가의 관점을 가르켜 일원론이라고 부른다. 퀄리티는 정의하고 설명할 수 없다. 왜냐면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퀄리티를 단순화 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이 이해한 퀼리티를 기반으로 해서 노자를 읽었을때 도와 퀄리티는 같은 것으로 느껴진다고 말한다. 즉 자기보다 더 퀄리티를 잘 설명한 사람이 이미 있는데 그게 바로 노자의 도라는 것이다. 노자가 애매하게 읽히는 것은 그 설명이 애매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단순화를 거친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때문에 애매하게 보이는 것이다. 세상을 빨갱이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회주의적으로 애매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문제는 애매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너무 단순한 그 사람의 눈에 있다.  

 

그렇다면 너무 단순한 것은 그런 사람들 뿐인가.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서구문명 그 자체의 뿌리인 그리스까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논리적 사고 그자체의 뿌리에 있는 단순화가 있다. 그 단순화에 중독된 현대인들인들은 애매하게 굴러가는 세상에 대해 불안감과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종종 퀄리티를 볼 수가 없다. 역시 문제는 기술이나 세계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눈에 있다. 세상에 분노하지 말고 우리 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그 단순화는 바로 기계적 사고, 정의에 기반한 논리적 사고다. 이것이면 이것이고 이것이 아니면 이것이 아니라는 배중률의 사고다. 그리고 일단 그 단순화가 적용되고 나면 세상의 어느 부분은 또렷해지고 인간은 지식을 축적할 수있는 큰 힘을 얻어서 오늘날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했듯이 커다란 빌딩과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 내지만 반대로 우리가 장님이 되는 부분이 생긴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다같은 말은 이제 대부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말은 우리가 과학으로 포탄을 이렇게 쏘면 그 포탄이 개똥이네 지붕에 떨어진다는 것은 예측할수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인지, 윤리적인것인지는 과학으로 답할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대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조직화되어가면서 인간은 점점 가치와 윤리를 잊게 된다. 동네의 우물이 신성한것이라면서 잘 돌보았던 과거의 사람들을 미신적이라고 부르면서 사람들이 먹는 물에다 태연히 독을 타는 현대인들은 자신들을 문명인이라고 부를때도 있다. 플라톤이전의 소피스트가 아르테라는 그리스말로 표현했던 전체적 인간적인 완전성과 덕성을 잃어버리고 인간은 어느새 감정없고 판단력없는 기계가 된다. 시를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된다. 그렇게 변해가는 자신이 싫어서 어떤 인간들은 무작정 낭만주의를 외치는 문명파괴자가 되기도 한다. 

 

저자는 말한다. 문제는 우리가 다시 퀄리티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그런데 그렇게 되자면 훈련이 필요하다. 기본적인 것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너무 쉽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만들어 낸 사고의 틀을 깨부시는 것이 필요하다. 그 결과로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물론 퀄리티를 얻는다. 즉 양질의 삶, 양질의 시간, 양질의 사랑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의미있는 삶, 의미있는 시간, 의미있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검션이란 단어를 통해 검션을 살리는 방법이라고 소개하는 내용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행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그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때 즉 의미를 못느끼는데도 습관대로 마구 일을 처리할때 우리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의미있고 양질의 어떤 것을 얻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작가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애매하게 말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퀄리티라는 단어가 영어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퀄리티라는 말은 어떤 사물이 가진 모든 특성을 의미할때도 있고 어떤 대상의 좋은 점만을 의미할때도 있다. 다시말해 망치가 있는데 이 망치의 색, 무게, 촉감같은 것이 모두 퀄리티라고 할수도 있지만 퀄리티를 가진 망치란 종종 아주 잘만들어진 망치를 말한다. 퀄리티를 가진 글이란 잘 쓴 글을 말한다. 우리가 글을 읽으면서 여기서 퀄리티를 본다라고 느낄 때 그것은 좋은 장점을 가졌다는 뜻이다. 글자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발견했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앞에서 일원론을 말할 때의 퀄리티는 모든 특성 즉 우리가 볼 수 없는 특성의 총합을 말한다. 

 

이걸 작은 의미에서의 퀄리티와 넓은 의미에서의 퀄리티라고 말한다고 하자. 그럴때 작은 의미에서의 퀄리티는  우리가 어떻게 발견하고 보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물론 글을 잘쓰고 노래를 잘하고 연구를 잘하고 싶다. 아무 의미없는 어떤 것을 보게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작가는 낙시를 갔을때 처럼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라고 조언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참선의 의미는 이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더 큰 자기를 느끼려고 해야 한다. 작가는 참선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마음의 평화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어떤 목표를 이루려는 마음을 가졌던 자신이 인도에서 산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길에 올랐을때 자신이 더 육체적으로 튼튼했지만 실패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은 저 산에 오르겠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매순간 매순간 바로 앞의 일에 대해 제대로 대처할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앞에서 장자에 나왔던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악기를 만드는 장인은 재계를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서 출세하거나 돈버는 일에 대해 잊도록 한다. 그렇게 했을때만 그 장인은 신이 깃든 작품을 만들어 낼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로 보게 되는 것은 우리의 무지와 우리의 지식이 만나는 경계선이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것은 보지 못한다. 반대로 너무 잘 아는 것도 잘 보지 못한다. 우리는 항상 숨을 쉬고 있지만 다른 일을 하다보면 숨쉬는 것을 잊어버린다. 옷의 촉감도 계속 느끼지만 다른 일을 하다보면 그것을 잊어버린다. 

 

우리가 어떤 걱정이나 욕심에 빠져있을때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를 작게 만드는 것이다. 이럴때 우리의 시야는 좁아지고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볼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착각한다.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우리는 이 몸뚱아리가 아니라 가족과 이웃과 지역사회와 나아가 온 세상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다. 가족이 망하면 나도 망하고, 나라가 망하면 나도 망한다. 그런데 걱정과 욕심이 우리를 작게했을때 우리는 그저 우리 피부에서 일어나는 일만 보고 다른 것은 장님이 된다. 그 결과는 물론 커다란 비극이 무르익는 것이며, 그의 인생의 의미가 축소되거나 사라지는 것이다. 그 결과는 마치 복권당첨번호를 손에 들고서 늘상 돈걱정하는 남자가 그 돈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일 수 있다. 그는 퀄리티를 볼 수 없는 것이다. 

 

사소한 것 하나를 하나 더 지적하자면 그가 퀄리티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시키는 클래식과 로맨틱의 양자구분은 그 자체가 단순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 서양과 동양문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서양과 동양이 있는게 아니다. 통상 말하는 동양이란 중국 일본 우리나라를 합치는 극동지역을 말하는데 그것말고도 많다. 이것은 이 책의 전체문맥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책 자체가 가지는 메세지를 스스로 부정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면서 그를 흉내내고 있다. 세상에 있는 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의 시각은 우리의 무지를 망각하는 좋지 못한 습관이다.

 

마지막으로 써두고 싶은 것은 이 책은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즐거움을 준다는 점이다. 이 독후감은 내가 이 책을 여러번 읽은 후에 쓰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제쳐두고 어떤 특정한 부분에 집중해서 쓴 것일 수 밖에 없다. 그 점을 고려했으면 좋겠다. 나는 사실 처음 이 책을 읽을때에는 오토바이 여행 이야기가 매우 좋았다. 이 글이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좋아하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즐겁게 읽는데 도움이 줄수 있다면 좋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