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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한가함과 절박함

by 격암(강국진) 2014. 2. 7.

2014.2.7

 

댓글을 읽다가 한가지 단어가 제 눈을 끌었습니다. 그것은 한가함이라는 단어였는데요. 그 단어와 반대되는 단어는 절박함이라는 단어겠지요. 한가함과 절박함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잠시 생각하다가 글쓰기 버튼을 눌렀습니다. 생각을 좀 더 해보자는 의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누군가가 저를 칼로 찌르려고 하는 순간, 또는 제가 굶어서 죽기 일보직전에 있는 순간 우리는 보통 어떻게 하면 저 칼을 피할수 있을것인가 혹은 어떻게 하면 먹을 것을 구해서 굶어죽는 일에서 벗어나야 할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절박한 순간에 눈앞에 있는 위험을 생각하지 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한가한 생각이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세상사람들은 종종 어떤 위험과 위기와 오류를 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저거 문제다. 급한 문제니까 저걸 고쳐야 한다. 그런데 저걸 고치지 않고 다른 것만 보고 있는 사람들은 참 한가한 생각을 하는군 하고 말입니다. 

 

이 모든 생각은 지극히 뻔한 것같지만 실은 그렇게 뻔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을 우리는 또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첫번째 예로 돌아가 봅시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훌룡한 분으로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 분들에게서 종종 발견하는 것은 그분들은 총이나 칼앞에서 혹은 굶주림으로 임박한 죽음앞에서 바로 눈앞의 임박한 위기만을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하면 그것이 그분들이 위대하고 훌룡한 사람으로 생각되어지는 이유입니다. 그분들은 그렇기 때문에 기꺼이 본인의 소신과 철학과 삶의 일관성을 위해서 총에 맞을 위험을 감수하거나 실제로 맞아죽거나 배고픔을 참거나 실제로 굶어죽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대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아주 자주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위대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배고픈 것에 집중하고 맞아서 아픈 것에 집중하여 순간 순간 눈앞의 것에 집중하고 몰려다니는 사람의 삶을 우리는 하찮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이 태어나 안빈낙도하여 배고픔 속에서도 낭만을 찾을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짐승과 같은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의 끝에서 다시 생각을 더해보면 우리가 한가한것이라고 말하고 절박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우리가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에 크게 달린 거라는 것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이 나라의 운명, 우리 민족의 역사가 중요하다고 믿었던 민족지사는 거기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자신의 생명을 챙기는 일에 매달리는 것은 참으로 한가한 일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정말 진심으로 '이 나라가 지금 이렇게 위기에 처해있는데 한가하게 먹고살 이야기나 내 생명 하나 망가지는 것을 신경쓰다니 당신들은 정말 한가한 사람이 아니냐.'라고 외칠 것입니다. 

 

출세나 돈이 급한 사람은 우리 아들 입시가 코앞이다, 내가 지금 진급 심사를 받고 있다, 이런 절박한 문제가 코앞에 있는데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정말 한가한 생각이 아닌가하고 말할지 모릅니다. 힘들고 비참한 어떤 사람들의 현실을 보고 분노한 사람은 이 사람들이 당장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죽게 생겼는데 일단은 살리고 봐야 할 것아닌가. 다른 이야기는 다 한가한 이야기가 아닌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를 고민하는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의 비극의 근원은 인간들 개개의 어리석음이다. 우리가 인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서는 비극의 순환과 재생산을 끝낼수 없으며 그것은 마치 오늘의 굶주림을 해결하자고 종자를 먹어치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로 절박한 것은 우리 인생의 의미를 밝히는 일이고 그럴 때만이 이 세상도 살만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결국 우리가 우리가 보는 위기, 절박한 상황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야기는 하나마나가 됩니다. 절박하다는 단어가 사실상 지금 다른 이야기할 여유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더 절박한 것으로 인식할 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외부로 부터 닫아걸게 됩니다. 그것은 종종 우리가 답을 찾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뭘 절박한 것으로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며 이에대해 여러 생각이 있을 수 있음을 제대로 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자기를 지키는 상대주의자입니다. 즉 생각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절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여러가지를 믿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 여러가지의 절박함이 인식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상대주의자는 기본적으로 모든 가치를 파괴합니다. 예를 들어 민족이나 국가같은 개념은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국가의 위기를 말하면서 외세와 싸워야 한다고 말할때 누군가는 우리 가문만 안전하면 나는 나라가 망해도 상관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이런 말은 통상 분노를 일으킬테지만 그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너는 나라라는 테두리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아시아가 유럽과 싸워 이겨야 하며 아시아의 안에서는 나라가 합쳐지던 말던 심지어 어떤 나라가 망하던 말던 상관없다고는 왜 말하지 않는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우리 가문이 망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아시아를 위해 우리나라가 망하는 것은 애통한 일이라는 말이 어떻게 정당화 될수 있는가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어떤 가치도 세상에 우리가 만들수 있는 수없이 많은 테두리중의 하나에 근거한 것일뿐이니 다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가면 개한마리의 생명이나 인간의 생명이나 왜 가치가 차이가 나야하는지 알수 없게 됩니다. 내 손가락끝의 세포하나의 가치와 다른 사람의 생명의 가치가 왜 차이가 나야하는지 알수 없게 됩니다. 

 

이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문제는 이렇듯 위험하지만 피할수 없는 문제입니다. 나는 절대주의자가 아니라고 단순히 선언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면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모든 벽을 허물고 완전한 허무주의로 달려가게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것을 절대로 말하는 것은 어렵고 또한 위험한 것으로 말해집니다. 뭔가를 절대로 말하는 순간 당신은 쉽게 논파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숨기는데 익숙합니다. 진짜 진심을 내놓을때 자신의 삶이 위험에 처한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한떼의 회의주의자들이 몰려들어와 당신의 믿음을 산산조각내버릴테니까요. 절대도 안되고 상대도 안된다는 것 이것이 문제지요. 

 

저는 스스로를 자기를 지키는 상대주의자라고 말했습니다. 제의견은 이렇습니다. 절대는 없지만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되고 지금 우리가 서있는 위치를 잊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 의미에서 테두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절대적 의미에서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건 돈을 위해 싸우다 죽건 명예를 위해 싸우다 죽건 욕망을 위해 싸우다 죽건 다 허망한 것입니다. 절대적 가치란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는 우리의 생명조건 즉 우리의 삶이 처한 위치를 망각한 절대주의적 입장에서의 사고입니다. 즉 모든 것을 위에서 보면서 상대주의적으로 사고해서 모든 것을 의미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주의적 상대주의 혹은 전지적 시점에서의 상대주의랄까요. 우리는 바깥에서 위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나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합니다. 

 

생명조건, 삶의 조건이란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유가 뭐건 지금 이러저러한 상황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일본에 있는 연구원이고 당신은 학생이거나 어떤 직업을 가진 샐러리맨이거나 장사꾼이거나 백수거나 사업가이거나 한 것입니다. 하지만 변해가고 학습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거대한 바닷속에 떠다니는 단순한 단세포생명같은 존재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다 전체를 생각했을 때 나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우리는 밝혀낼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으로 던져져서 지금 여기 서있는 생명으로서 지금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뿐입니다. 

 

그러한 선택이 이어질때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남아있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의 질문에서 다음의 질문으로 계속 넘어가야 합니다. 젊은이는 젊은이의 질문을 다 마쳤기 때문에 중년이 되는게 아닙니다. 중년의 질문을 던지게 되었기 때문에 젊은이는 젊은이의 질문을 중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노인의 질문을 미리 생각하여 답을 내면 좋은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의 삶의 목적은 노인이 되는게 아닙니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의 질문에 집중하고 진실되게 살아야 합니다. 젊은이는 젊은이로서의 삶의 조건에 맞게 삶이 던져주는 질문에 충실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아침을 먹어도 점심때가 되면 배가 고프듯 질문에 부딪히는 문제는 사는 문제 그 자체입니다. 세상의 불확실성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답이 절대적일까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질문은 우리가 변해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제 눈에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국가는 있습니다. 민족도 있고 한국문화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런 것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생존하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호족국가로 전국이 나뉘어져 있는 시대에 태어났다면 저는 각 지역의 독립성이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보존되는 현실에 맞춰서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존이란 절대는 아닙니다. 제가 살아생전에 그럴것같지는 않지만 지금대로 살다보면 우리는 기꺼이 세계국가라는 개념에 동의하고 국가적 민족적 개념은 약화시켜야 할 때가 올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될 때가 되면 그렇게 해야 하듯이 그때가 되면 또 그렇게 살아야겠지요. 

 

이 문제는 이정도만 하고 다시 한가함과 절박함의 문제로 돌아가 끝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흔한 답으로 돌아온 것같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을 충실하게 삽시다. 각자의 삶이 절박하게 내미는 문제와 열심히 싸웁시다. 남의 싸움을 가지고 한가하다거나 쓸모없다고 하지 맙시다. 그러나 물론 삶을 충실하게 산다는 것은 언제나 확장과 소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이지 우주공간에 홀로 떠서 존재하는게 아니니까요. 남의 고통이나 즐거움이 나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일 수 없습니다.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을 지금 내 눈앞의 절박함에 매몰당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 사람은 그 절박함을 절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도 그의 선택이기는 합니다만 그런 식이면 오히려 우리가 답을 찾을 수 있는 돌파구를 찾을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도 가져야 하지요. 

 

최근에 인상적인 사진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위대가 거울을 가지고 가서 자신앞에 선 진압대가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한 것이었습니다. 시위대와 진압대간의 관계란 서로 대립하는 관계 싸워 이겨야 하는 관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관계에서 절박한 문제란 저 나쁜 진압대를, 저 나쁜 폭도를 어떻게 무찌를 것인가하는 질문이라고만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농담이나 웃음 거울 같은 것이 뜻밖의 돌파구를 마련합니다.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 시킵니다. 어떤 시위판은 흥겹게 노래를 하고 웃음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인들의 키스하기를 시위로 만듭니다. 절박함에 삼켜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확장이 답을 줄 수 있는 예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시위문제뿐만 아니라 입시공부에 찌든 분들도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문제를 다르게 보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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