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세상사람들이 다 안다면 세상의 대부분의 문제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좋게 흘러갈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물론 상대주의를 말하는 것이요 세상에 절대는 없다는 것이지만 단순히 세상에 절대는 없고 모두가 자기 입장이 있다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말은 적극적으로 자기의 행동과 말에 대한 테두리, 공동체, 벽을 인식하려고 노력할 것을, 그게 뭔지를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한 촉구는 두가지 상반된 목표를 위한 것이다. 하나는 그 공동체, 그 벽을 인식하고 존중하기 위해서이고 또하나는 그 벽을 인식함으로서 우리가 그 벽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국가라는 테두리
물론 국가의 테두리는 날로 약해져 왔기는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공동체의 하나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오늘날 비자가 없이도 갈수 있는 나라가 많고 물건들이 세금도 없이 국경을 넘나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적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소속한 국가에 따라, 그 사회의 복지 수준에 따라 같은 사람도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며, 국경을 허물고 전세계인을 섞어서 평등한 수준으로 살아가 보자고 하는 주장은 설사 문화적 언어적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이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진보건 보수건 누구건 중국인들이 3천만명쯤 한반도로 이주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우크라이나의 분열과 참상을 보면서도 국가라는 테두리는 이제 시대에 뒤진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환상에 빠져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애국을 말한다. 애국을 말하기는 쉽지만 그가 사랑하는 나라가 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눈먼 사랑이 오히려 그 대상을 해치는 일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고 할때 애국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애국을 입버릇처럼 하는 사람도 반드시 나라를 위하고 있다고 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정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한국이란 곧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들은 문화적인 가치관적인 우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한국이란 그저 한국인의 총합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이란 한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돈의 총합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애국이란 어떤 사람에게 전통적 가치관을 수호하는 것이며 그럴때 만이 설사 전쟁이 나서 거지가 되더라도 우리에게 남게 되는 한국을 지켜낼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좋은 한국이란 그저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건 배부르고 행복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중국어를 쓰건 영어를 쓰건 상관없고 그들이 어떤 종교를 가지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기괴한 -지금의 입장에서 말이지만- 생활 습관을 가지건 상관이 없다.
어떤 사람들이게 한국이란 곧 한국의 외환보유고나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회사이기 때문에 외환보유고가 늘어나고 재벌회사가 잘나간다면 국가내부에서 몇십만명쯤 죽는 것은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몇십만명이라고 하니까 전쟁을 떠올리겠지만 한국에서 한해에 자살자가 만오천명이라는 통계를 나는 본적이 있다. 한국의 높은 자살률을 생각하면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한해에 만명씩은 더 죽는다. 이것은 오직 자살만 고려했을때 그렇다. 산업재해라던가 질병이라던가 교통사고라던가 다른 분야를 고려한다던가 태어나지 않는 죽음 즉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현실따위를 생각한다면 십년 이십년에 걸쳐 우리는 수십만명의 목숨의 운명을 바꾸고 있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도대체 뭘하자는 것인가
누군가가 나서서 말한다고 하자. 우리 좋은 정치를 합시다. 새정치를 합시다. 좋다는 정치는 뭔가. 어떤 정치가 좋은 정치인가. 그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일반론적인 답을 죽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속아서는 안된다. 일반론이란 반드시 나와 우리라는 개념과 결합되었을때만이 도움이 된다. 그렇지 않을때 그건 마치 서울역 앞에서서 연세대가려면 어떻게 가야하나요라고 묻는 사람에게 지구의 지각형성과 변이의 역사에 대해 늘어놓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신은 오래 오래 기다리면 당신의 시급한 문제에 대해 답이 나올거라고 믿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들은 끝없이 딴소리만 늘어놓는다. 당신은 그저 쓸데없이 지각형성의 변화에 대한 책에 대해 돈만 지불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의 집권여당에 감명받지 못한다. 왜냐면 그들이 돈 이야기말고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허하다. 그들이 말하는 잘사는 세상은 뭔가? 더 큰차, 더 큰 아파트? 지금의 집권여당을 상징하는 것은 은퇴하고 삶이 허망하다고 말하는 베이비부머나 소위 하우스푸어다. 그들은 철학적으로 공허해서 결국 술먹고 여자성추행이나 하고 아랫사람이나 순경이나 경비원에게 폭행 폭언을 퍼붓는 것으로 성공을 실감한다. 그들은 행복한 척 할뿐이거나 그런 척도 못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자살률은 역사상 최고로 높다. 전태일이 자살할 때 보다 지금이 자살률이 더 높을 것이다. 사람이 돈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문제는 경제라면서 모든 공적인 자리의 수장은 돈버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예를 들어 대통령이라면 적어도 남들이 공감할 수 있을 만한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설사 전쟁중이라도 전쟁의 능력만 뛰어날뿐 삶의 가치란 인간을 죽이며 사는 것에 있다는 미치광이를 우리의 지도자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인은 돈에 중독되어져 있다. 그리고 외부의 것에 중독된 것도 있다. 워낙 가난하던 시절부터 남의 것을 배껴다가 배우던 것에 익숙해서 그게 화성의 것인지 안드로메다의 것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일반론으로만 치닫는다. 즉 프랑스건 미국이건 일본이건 외국의 것은 그가 가진 테두리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걸로 우리를 구원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대안이 잘 안나오고 대안이 나와도 죽어버리는 것같다. 정치란 결국 대중적 지지가 필요하다. 누군가가 문제는 경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대중적 질문이 항상 그래서 당신의 경제적 해법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만 나온다면 그런 사람은 정치에서 매장되던가 경제전문가로 변신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문제없는 천재라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대중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자랑은 그 대중적 수준이 높다는 것이고 한국의 불행은 그 높은 대중의 수준을 하나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준높은 지식인이나 질서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현대 한국어의 상태와 비슷하다. 우리는 한글을 쓴다. 그래서 외국인들보다 오히려 쉽게 글을 배운다. 한문을 몰라 책을 못읽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둘째치고 서양에서 가끔있는 스펠링 테스트시험같은게 한국에서는 별로 없다는 점을 주목해 보라. 한글처럼 쓰기 쉬운 문자가 없다. 그말은 문맹률이 낮고 모든 국민들이 기본적인 것을 익히는 것에 있어서 빠를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한국이 인터넷 사용에 있어서 세계적 모범국가인 것은 한글과 여러모로 관련되어져 있다.
문제는 더더더 추상적이고 고급에 수준에 이르면 한국어는 완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문으로 만들어진 말들로 범벅을 하거나 외국단어를 그대로 쓰지 않으면 그런 대화를 하기 어렵다. 그래서 대학교 교과서를 못읽는 대학생도 있다. 사람들은 멋대로 이해한 추상적단어를 남발하며 대화하고 그래서 토론은 종종 상대방을 경악시키는 싸움이 되버리고 만다.
김용옥은 고전 번역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내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현대한국어의 완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우리를 통합할수 있는 철학적 사고가 우리 언어에 자연스레 존재할때 우리는 통합이 가능하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외국의 철학을 외워서 말하기 보다는 자신의 철학을 쉽게 말하는 철학자가 필요하다.
내가 보는 희망
오늘날 정치권은 대개 희망을 주지 못한다. 그들은 개혁의 시작이기라기 보다는 개혁의 대상일 뿐이다. 학계에서도 나는 깊은 인상을 받지 못한다. 학자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결국 돈에 얽혀있고 분열되어져 있다. 한국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우리는 교수집단을 믿을 수 있다라는 말따위는 하기 어렵다. 좋은 분들의 노력이 있다고 해도 집단으로서 학계가 한국의 개혁의 원천적 힘이 되기는 어려워보인다. 그것은 언론이나 사법부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는 한국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기자와 사법부를 믿을 수 있다라는 말을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그들도 노력하고 있을 것이고 그래야 하지만 희망이 되기는 어려워보인다. 그들은 이미 돈으로 이뤄진 기성질서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보기에 그래도 한국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각 지역의 마을만들기 운동이나 공유경제에 신경쓰는 사람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연결되고 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있다. 그들은 돈에 얽혀서 상식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부터 떨어져서 과연 바람직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희망이 없을 때 직접 희망을 찾아보자고 나온 사람들 그 사람들이 희망이다. 물론 그것은 작은 희망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희망은 실천의 영역에서는 서로 돕고 살자는 경제운동의 모습을 띄게 되고 그저 그런 대단한 뜻없이 우리 동네 청소좀 해보자는 모습이 될때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스스로 우리 삶을 개선해 보자는 주체성이고 그것의 궁극은 새롭지만 낡은 철학의 재정립이다. 아는 것은 본래 행동과 다르지 않다. 자동차를 팔고 자전거 타는 행동이 바로 새로운 철학이다.
콜롬버스의 달걀처럼 뭐든지 대안이 등장하고 그것이 본격화되고 나면 그것은 당연한 것, 원래 널리 알려져 있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안을 만들고 실천하는데에는 실천이 필요하고 그 이상으로 많은 철학적 모색이 필요하다. 과연 잘산다는게 뭔지에 대해 솔직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의 시작이 앞에서 거론한 공유경제며 마을만들기 같은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은 움직임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역축제를 하되 어떻게 하면 될까를 고민하는 것이 철학이다. 나는 그것이 조선패망의 시대에 일어났던 동학운동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리학적 질서가 더 이상 조선을 지켜줄수 없다고 생각했을때 어떤 사람들은 다시 외국에 기대는 것을 생각했지만 한국의 내부에는 동학운동같은 것을 통해 잘사는 것에 대해 주체적인 질서를 세워보려는 노력을 했던 것이다.
동학운동처럼 우리의 작은 희망들은 짓눌려 없어지고 우리는 또다시 어려워질 것인가. 아니면 잡초처럼 여러곳에서 생명력이 타올라서 그것이 한국의 개혁을 이끌 것인가. 답은 물론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섯불리 낡은 생각에 따라서 공사판을 벌리고 큰 빚만 진 지자제가 얼마나 많은가. 전망이 좋기만 하지는 않다. 게다가 계속 시간을 끌면 아마 한국이 너무 노화되어 새것이 나오기 어려운 나라로 변하지 않을까.
맺는 말
나는 다시 말해보고 싶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환경이나 테두리 없이 홀로 존재하는게 아니다. 나와 환경과의 관계, 나의 행동, 선택과 환경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나나 우리가 잘산다는게 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낡은 껍데기는 치워버려야 할것이고 소중한 우리의 뼈대는 쓸수 있을때까지는 존중해야 할 것이다.
물론 산다는 것은 고독한 배움의 길이고, 성공보다는 실패로 이어지는 것이기는 하다. 최종적 성공이라는게 없으니까 삶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우리가 목표를 잃으면 삶은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코앞이 급하다고 코앞만 보다가는 짐승으로 추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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