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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참여를 돌아보며

by 격암(강국진) 2014. 3. 18.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를 가르켜 참여정부라고 하고 그 노무현을 대선에서 지지하는 것이 주요 원동력중의 하나가 되어 만들어졌었던 정당은 스스로를 참여당이라고 말했다. 참여란 말하자면 적어도 하나의 정권을 만들어낸 이념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제 벌써 12년이 지나고 노무현 대통령도 가시고 없는 지금 참여라는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여라는 말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한다는 의미에서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내부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그저 IT기술같은 것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유통시키고 되도록 모든 일을 직접투표로 해서 결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멈춘 점이 아쉽다. 


그같은 것은 물론 중요한 것이고 지금도 중요하다. 투명성 과 개방성이 없다면 부패없고 상식적인 정치는 이룩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들이 그렇듯이 어떤 한가지 문제점을 올바로 진단했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문제는 그로 인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과신은 또다른 문제를 만든다. 섣부른 시스템의 파괴나 교체만이 답은 아니다. 부패없는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시스템을 그대로 들여온다고 해도 그 안에 지금의 한국인이 있을 때 그 시스템은 이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비극적인 문제를 가져오거나 나쁜 결과를 줄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일군의 사람들을 가리켜 그 사람들때문이라고 말하기 좋아한다. 기득권층이라던가 나쁜 정치인이라던가 재벌들이라던가 어떤 지역의 사람들이라던가 말이다. 물론 모두가 동등하게 책임이 있지는 않다. 범죄자는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곰팡이가 피는 것은 눅눅한 방전체의 분위기 때문이듯 악이란게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의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 뼈져리게 느끼지 못하면 진정한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는데에는 부족함이 있다. 우리는 잘못된 질문에 빠져 있지 않는지 고민해야 한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마치 돌멩이는 크고 작은게 있고 단단하게 있는가 하면 잘 부서지는 놈이 있고 구멍이 뚫린 것이 있는가 하면 매끈한 놈이 있듯이 사람도 그렇게 다 다르다.  그 다른 사람들을 너무 쉽사리 n분의 1 운운하면서 평등한 권리 이야기만 하면 세상이 좋게 될거라고 믿는 것은 한놈이 모든 권력을 차지해야 한다는 독재에 대한 생각만큼이나 큰 착각이다. 


나는 현여당을 좋아하지 않지만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중에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은 안다. 반대로 나는 야권을 지지하지만 스스로 진보운운하는 사람들중에 정말 상종하기 싫은 사람도 많다는 것도 안다. 사람이 혈액형이나 왼손잡이인가오른잡이인가로 결정되지 않듯 어딜찍었는가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한국의 정치가 실패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당 지지자나 야당 지지자중의 어느 쪽이 반대편을 압도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문화적 정신적 사회적 틀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다. 내가 보기엔 모두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있다. 자기가 물러서면 자기만 당하고 그것은 사소한 양보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된다. 모두가 마음속에 공포를 가지고 마치 늑대에 둘러싸인 순진한 어린아이같은 자아상을 가진다. 저 늑대들을 공격하고 죽이지 않으면 난 살아갈 수가 없다는 식이다. 그런데 내눈에 보이는 저 늑대는 또 반대로 생각한다. 자기는 순진한 어린아이고 나는 음흉한 늑대다. 그래서 바보 아니라면 알수 있는 남의 아픔에 눈을 감고 자기 발가락 아픈 것만 크게 소리친다. 싸움은 극단적이 된다. 항상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바보들, 파렴치범들이 날뛰기 좋은 판이 된다. 


참여란 구호는 아주 훌룡한 것이고 정당한 지적이지만 권력의 구조를 해체하는 구호일뿐 권력의 구조를 창조하는 구호는 아니다. 이제 21세기 한국을 지탱해갈 새로운 구조는 필요하고 따라서 낡은 구조를 해체하자는 의미에서 그것은 필요한 것이고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세상에는 구조라는 것이 전혀 없으며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일만 하게 되는, 예를들어 모든 일들을  정당원들이나 국민들이 일일이 직접투표에 의해 결정하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 


참여당은 물론 열린우리당도 단명하고 말았던 것의 근원적이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 노무현 정권이 끝나고 그 반대되는 이명박 정권이 탄생한 이유도 그것이 아닐까. 참여를 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비전이 부족했다. 이것이 부정한 것이라는 지적은 할수 있으며 반권위주의적인 세상을 만들수는 있지만 새로운 세상을 지켜낼 구조를 만들어 내는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그저 낡은 구조를 허물기만 하면 저절로 모든 것이 잘 돌아갈것이라는 생각은 안일했던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부동산 투기는 잡지 못하고, 가장 새시대에 부적당한 사람들이 오히려 물을 만난듯 자유를 누리고, 결국 비극이 만들어 진것이 아닌가?


왕을 없애는 것이 공화국의 탄생은 아니다. 공화국과 같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권력분립이니 정보유통이니 국가 재정의 구조니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 민주십년이라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말하지만 그 십년이 지나고 나자 마치 그 기간이 꿈처럼 끝나고 말았다. 지식인 사회가 과연 바뀌었는가? 지금의 언론이 새로운 세상에 대해 새로운 구조에 대해 알리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가? 국민이 공화국이 뭔지 모르는데 왕만 없애면 공화정이 서는가? 나라의 재정적 구조가 바뀌었는가? 정보유통은 바뀌었는가?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김일성의 망령과 싸우고 있지 않은가? 


물론 10년도 워낙 문제많은 10년이었으니 할려고 해도 제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그걸 한국사회의 역량부족이라고 부르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아이엠에프는 재앙이자 우리나라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였다. 망했으니까 새로운 구조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서고 협동조합이 서고 지자제가 서고 남북평화공존의 시대를 열고 사회적 구심력을 만들어 낼 지적인 중심을 세우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 그 모든 시도들이 대부분 자취만 남기고 실패했다. 


남북관계는 옛날로 돌아갔고 한국은 삼성과 현대만 있는 것같은 쏠린 경제를 가지고 있다. 가계부채는 천문학적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말과 눈이 아직도 낡아있다. 옛것이 안된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데 새것이 뭔지 모르겠으니 그 눈이 절망으로 채워져서 결혼도 안하고 아이도 안낳고 자살률이 전세계 최고를 기록한다. 비록 지금 당장 사는건 북한보다 잘살지 모르지만 문득문득 한국사회에서 수령님만세를 외치는 북한의 냄새를 느낀다. 종북소리를 듣는 사람이상으로 남에게 종북소리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말이다. 


물론 핵심적 질문은 그 새로운 질서, 새로운 구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일 것이다. 참여로 실패한 한국. 그리고 그 역풍으로 두번의 낡은 정권을 가진 한국은 이제 정말 그 질문에 집중할 때가 되었다. 일단 이글은 답이 뭔가를 말하기 보다는 질문을 분명히 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시대의 질문이 뭔지 확고히 알려지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해방이후 이제까지의 삶이 아파트로 상징된다고 생각한다. 온식구가 한방에서 자고 비새는 지붕에서 살던 극빈의 나라에서 삶의 기본적 욕구는 김일성이 했다는 말처럼 쌀밥에 고깃국먹는 그런 원천적 의식주의 충족이었다. 


그런데 원천적 의식주의 충족이 안될때 인간은 인간이하가 되지만 사실 원천적 의식주만 강조하면 인간은 그저 배부르게 사육당하는 짐승이상이 되지 못한다. 배부르고 편해도 인간이 돼지우리에서 짐승취급받으면서 모두와 똑같은 사료를 먹으며 사는 것은 행복을 줄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인간답게 살기를 원한다. 보다 많은 자유를 원하고, 보다 많은 개성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하며 채찍질 속에서 사료를 받으며 살기보다는 보다 더 나를 표현하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살고 싶다.  더 크고 좋은 집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개성을 가지고 살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숨도 쉬고 먹기위해서만 사는게 아니라 다른 것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공간말이다. 그러면서도 더 아름다운 사회적 관계속에서 살고 싶다. 자살은 외로워서 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것이 인간이 사는 법이다. 


그렇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속박을 깨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를 똑같은 돼지로 키워내기 위해, 군대에서 부터 훈련시키는 그 권위주의를 깨야한다. 그리고 대량생산을 상징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는 산업구조를 가져야 한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소수의 과학자 엔지니어 전자산업종사자, 자동차 산업종사자를 가지겠지만 다른,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갈수 있기 위해 일자리가 창출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마을만들기, 협동조합운동, 지자제 활성화, 관광산업육성같은 것이 되어야 하고 남북 평화공존 나아가 자유왕래가 이런 것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의 복잡성을 증가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물질에 대한 것같지만 그 이전에 인간답게 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즉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먹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자아성찰에 대한 것이다. 워낙 없이 살다보니 그랬는지 몰라도 먹고살수 있을 만큼 가져도 더 많이 가지면 더 많이 행복해 질거라는 생각에 우리는 중독되어져 있다. 역설적으로 그런 생각이 사회적 구심력을 약화시켜서 한국이 더 부자가 되는것도 막고 있다. 유명한 화가는 돈을 잘벌것이다. 그렇다면 돈을 잘벌겠다는 야심을 가지면 그림을 잘그리게 될까? 인간적으로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모두가 가질때 한국사회는 살기 좋은 곳이 될것이다. 살기 좋은 곳이 되면 돈은 벌리게 되어 있다. 


돈중심의 사회에서 자아성찰, 가치중심,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사회로 변해야 우리는 모두가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고 간섭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수가 있다. 1차원적인 사회가 2차원 10차원 100차원적인 사회로 변해야 모두가 자기의 성을 꾸밀 공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누가 빌딩지어 살면 어떤가. 나는 내가 행복할 오두막이 있으면 더 행복할수도 있다. 한국사람들은 서로 비교하고 서로 압력을 넣어서 서로의 자유와 행복을 빼앗는다. 무식할 수록 더더욱 그렇다. 


나는 그래서 4대강공사같은 것이 정말 싫다. 그런 공사를 절대로 하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엄청난 공사를 무신경하게 몇년에 종이위에 선죽죽 그어서 해치워 버리는 그런 무신경이 싫은 것이다. 1차원도 너무 1차원 적이다. 역사의 흔적을 가진 우리 강산을 똑같이 만들어 버린다. 상상력을 더욱 제한한다. 더더욱 사람들이 숨쉴곳이 없게 만드는 짓이다. 마치 2-30년뒤에는 한반도 다쓰고 죽자는 식처럼 보인다. 


참여는 훌룡한 것이다. 단지 그것은 시작일 뿐 끝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인간답게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를 답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다운 삶이 어떤 수치에서 나오는가를 고민하는 일도 해야 할 것이다. 수출총액이나 GNP같은 것에 그 것이 잘반영될까? 만원짜리 밥이기만 하면 파전이든 오무라이스든 개밥이든 다 똑같은 것일까? 우리는 인간답게 살고 있는 것일까?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고민이 깊을 수록 우리에게 빛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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