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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우리가 서로 싸우게 되는 이유 : 책임의 문제

by 격암(강국진) 2014. 7. 9.

14.7.9

살다보면 사람들과 말다툼을 하거나 그 이상도 하게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그때마다 다른 것일까 아니면 여러가지 싸움과 다툼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세상의 여러 측면들을 다 고려하고 어느 정도 만족감을 가지고 답하려면 책 한두권을 쓰는 것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 나는 그보다는 하나의 키워드로, 그것을 붙잡고 세상을 관통해서 문제를 일순간에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키워드는 여러개가 있고 세상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봐질 수 있다. 그렇게 할수 있는 키워드 중의 하나는 바로 책임의 문제다. 

 

1. 일본 영화중에 피쉬스토리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를 보면 한 무명밴드가 피쉬스토리라는 음악을 녹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 노래가 어떻게 세계를 구하게 되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 노래에 들어간 공백이 어떻게 여러가지 사건을 순차적으로 일으켜서 종국에서는 지구를 멸망시킬 혜성을 폭파시키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과정을 여기에 자세히 쓰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매우 추천하는 재미있는 영화므로 직접 보기를 바란다.

 

이 글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그 줄거리 자체가 아니다. 다른 몇몇 이야기들이 그렇게 하듯이 영화 피쉬스토리는 어떻게 작은 것같은 일이 엄청난 사건과 인과관계로 서로 얽혀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피쉬스토리 정도는 아니지만 페이잇포워드라는 영화도 이런 것을 보여주며 시간여행 영화의 걸작인 나비효과도 그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에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단순히 거기서 멈추는 것은 아니다. 

 

피쉬스토리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영화의 중간을 다 잘라먹고 무명밴드가 노래를 취입하는 것만 보여주고 나중에 세계가 혜성으로 부터 구해지는 장면을 보여준다고 하자. 우리는 이 두가지가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모르므로 대개는 이 두사건은 서로 무관하다고 생각하거나 물론 모든 사건은 아주 작은 확률을 가지고, 정말 작은 확률을 가지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영화를 전부 본 사람과 영화의 중간을 건너 뛴 두사람은 말하자면 인과관계나 책임관계를 전혀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영화를 전부 본 사람은 노래를 취입하는데 있어서 뭔가 다른 선택을 하는 행동이 지구를 멸망시키게 되는 행동이 되고 마는 '이유'를 안다. 왜냐면 그것이 어떤 인과관계의 연쇄속에서 지구를 구하게 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임머쉰을 타고 누군가가 과거로 가서 그 음악녹음을 방해한다면 영화를 전부 본 사람은 그 사람이 지구를 멸망시키고 말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에 영화를 건너뛴 사람은 무명밴드에게 지구를 구할 책임이 주어져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2. 확률이란 우리의 무지가 만들어 낸 것이다. 즉 우리는 뭔가를 모른다. 따라서 확률적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을 확률적으로 이해한다. 확률이란 결국 우리가 모르는 이유때문에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다르게 쓴 것이다.  보통의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올 확률이 얼마냐고 하면 대개의 사람은 이분의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뉴튼역학에 따르면 동전은 결정론적으로 움직인다. 즉 정해진 초기조건을 알면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동전대신에 커다란 방석을 던진다면 우리는 간단한 손목조작으로 얼마든지 우리가 원하는 면이 나오게 던질수 있다. 즉 결과는 확률적이 아니다. 적어도 반반은 아니다. 동전을 던졌을때 앞면이 나올 확률이 이분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 동전이 앞면이 나왔을때 왜 그렇게 되는지 그 이유를 전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 쓴 1과 2의 이야기를 이제 합쳐서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나는 과정을 알 때는 미래는 과거와 밀접한 인과관계를 가지며 과거는 미래에 대한 확실한 책임을 져야 하게 된다. 반면에 우리가 그 과정을 모를 때는 미래는 과거와 확률적으로 느슨하게, 종종 매우 느슨하게 연결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책임은 종종 완전히 증발된다. 그것은 그저 운의 문제였을 뿐이다. 

이 지구상에는 굶어서 죽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에 태어난 우리같은 사람들은 종종 음식물을 그냥 버린다. 필요없이 음식을 낭비한다. 가난한 나라 사람은 때로 물도 부족해서 죽는다. 그것은 그 나라에 있는 콜라회사가 귀중한 물을 전부 써버리기 때문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과 우리의 음식낭비는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까.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과 우리의 콜라소비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것은 직접적 인과관계인가 아니면 느슨한 확률관계인가. 

나는 이 글을 우리가 서로 싸우게 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시작했다. 그 이유는 싸움은 우리의 관심이나 능력때문에 생기는 다양한 지식과 무지때문에 생기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허약하고 외로운 늙은 어머니가 있다고 하자. 그 나이든 어머니가 어떻게 사는지를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어머니가 어쩌다가 겨울철에 길에서 넘어져 허리를 다치고 그로 인해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다. 적어도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생활에 대해 전혀 모르는 무관심한 불효자는 어머니가 겨울에 넘어져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것에 대해 그저 느슨한 확률적인 생각을 한다. 불행한 일이지만 노인들에게 그런 일은 생기곤 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쩔 수가 없는 그저 재수없는 일인 것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자신이 어머니의 죽음에 어떤 책임이 있다고 하는 발상에 대해 매우 분노할 것이다. 그것은 그저 운의 문제, 확률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평상시에 얼마나 외롭게 살았는가를 아는 그 누군가는 부모를 그렇게 살게한 자식이 그 어머니를 죽인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장자에는 유명한 빈배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배가 우리가 탄 배와 부딪혔다. 거기에 사람이 타고 있다면 우리는 크게 화를 내지만 자세히 보니 그 배가 빈배였다면 우리는 화를 내지 않는다. 그 배가 빈배라면 강물이 하필이면 그 배를 그렇게 움직여서 내 배와 충돌하게 만든 이유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이유를 알 수가 없는 사건에서 책임은 증발되고 만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배를 조종했다면 충돌의 이유는 그 사람에서 멈춘다. 비슷하게 우리는 종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를 어떤 사람의 성격탓으로 쉽게 생각한다. 그 배의 움직임은 이제 완전히 그 사람때문이다. 그 사람도 강물처럼 다른 알 수 없는 뭔가에 의해서 움직여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돌의 책임을 묻기 위해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문제의 근본에는 우리가 뭔가를 안다던가 모른다던가 하는 지식, 인식, 무지의 문제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종종 뭔가에 무관심하여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알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알지 못한다. 당신이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에게 지독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런데 어쩌다 보니 당신에게 가난한 나라에서 온 연인이 생겼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관심이 생기고 관심이 생기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더 많은 것을 알고서 세상을 보면 전에 아무 생각없이 저 사람들은 위험하다던가, 저 나라 여자들은 우리나라 남자를 유혹하지 못해 야단이라던가 하고 말했던 것에 대해 후회하게 된다. 

무지는 확률을 만든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에 대해 무지할 때 그저 그 사람들은 자꾸 경찰에 구속되더라는 사실만 알면 우리는 그들을 나쁜 사람내지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피해야 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치 무너질 확률이 높은 빌딩에 들어가는 것을 자제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들에 대해 더 잘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대신 싸워준, 다른 사람보다 더 정의로운 사람, 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거나, 혹은 다른 억울한 일을 당해서 어쩔수 없이 싸운 피해자라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들도 당구공을 친 최초의 원인이 아니라 그저 다른 당구공에 맞아서 밀려서 다른 당구공을 친 또다른 당구공이었던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고래로 혁명의 투사들이 하는 일은 어떤 투쟁이전에 주로 정보를 퍼뜨리는 것이었다. 우리가 보지 않는 것, 고의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다시 보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세상은 달라보이게 되고, 다르게 보이는 세상은 혁명이 필요로 한 세상으로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의 근본에는 지식, 인식, 무지의 문제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말한 것과는 반대의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본다. 우리는 너무나 종종 우리는 무지한데도 우리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진화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에게 칼 포퍼가 한 비판이 이것이었다. 안다고 하는 것이 착각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응당 알아야 할것을 알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알 수가 없는 것을 안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뻔한 인과의 사슬을 보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인과의 사슬로 법칙으로 확신할 수 없는 것을 확실한 법칙으로 본다. 그렇게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무지와 확신의 벽이 세워지고 그 벽들이 어떻게 서게 되는가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던 불효자를 생각해 보라. 이정도면 왜 내가 이글을 우리가 누군가와 싸우게 되는 이유라고 썼는가에 대해 충분히 이유를 제시한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달라서 싸우게 된다는 말과는 다르다. 우리는 대개 스스로 우리의 무지와 확신의 벽이 어디에 서있는지 모른다. 뭘 모르는지 뭘 확신하고 있는지 모른다. 다 안다는 것은 애초에 유한한 존재로서 불가능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특히 더 무지하다. 관심도 없다. 그러면서 자신만 억울하다고 종종 생각한다. 그러므로 포용력이 있을 수 없고 다툼은 필연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뭔가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고 또한 동시에 우리는 너무나 많이 이러저러한 것은 법칙이다, 이러저러한 것은 원래 그렇다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우리가 알 수없는 것에 대해 확신을 하면서 살아간다. 

오늘날 역사는 예전처럼 진지하게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같다. 역사를 쓰는 이유가 그거 하나는 아니겠지만 역사를 쓰는 중요한 이유는 현재와 과거를 인과관계의 사슬위에서 기술하여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것이다. 돌이 동쪽에서 지금 우리가 서있는 여기까지 굴러왔으니 계속 내버려두면 서쪽으로 굴러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역사다. 반면에 역사를 완전히 무시할때 돌의 미래는 알 수가 없다. 돌은 서쪽으로 갈 수도 있고 동쪽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 무시의 흐름은 우리가 뭔가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메세지가 받아들여진 것이 한 이유로 발생한 것이겠지만 역사없이, 어떤 선입견과 편견없이 세상을 보고 그것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편견없는 중립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문제의 기본도 이해를 하지 못한 사람으로 가장 편견에 빠져있는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세상을 보는 역사를 스스로 쓰는 일밖에 없는 것같다. 물론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자신이 직접 쓴 역사가 없이는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남에게 무조건 의지해야 하는 판이다. 만약 세상에 대한 지식이 객관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저 마구 지식을 흡수하면 되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할 수없고 해서도 안된다. 

요즘은 세상이 너무 복잡해서 사람들의 입장이란게 끝없이 다르다. 누군가가 공중목욕탕에서 나체로 걸어다니더라고 해서 학교에 벌거벗고 가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눈가진 사람이 자동차 운전을 한다고 해서 장님이 자동차를 몰고 거리로 나서면 금방 죽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남에게 귀를 기울이되 스스로가 스스로의 관점을 만들고 그 관점에 따라서 판단해야 한다. 자전거타기는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결국은 자신의 균형감각에 따라서 타야 한다. 남이 우회전한다고 나도 핸들을 돌리면 그는 안넘어지지만 나는 얼마든지 넘어진다. 비슷한 조언은 부동산투자판에도 주식투자판에도 얼마든지 있다. 신문이나 무슨 전문가의 말을 참고는 해야겠지만 결국 자기의 자산을 어떻게 투자하는가 하는 것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내려져야 한다. 이것은 단지 집이나 주식을 살 때만 그런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측면에서 그렇다. 

그래서 사색과 글쓰기가 중요하다. 물론 남의 말을 듣고 남이 쓴 것을 읽어야 하지만 스스로 글을 쓰면서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며 살지 못한다면 자기의 선택, 자기의 역사, 자기의 관점을 가질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요즘같은 세상은 너무 불안하고 위험한 세상이다. 당신은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살인자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노예문서에 도장을 찍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간단히 역사를 잊는다. 사람들은 간단히 작은 세계속에 웅크리고 만다. 마치 화살이 날아오는데 눈을 감으면 그 화살이 사라질 것처럼 행동한다. 사람들은 마치 세상이 어제 시작된 것처럼 세상을 살아나간다. 기억이 아주 짧거나 거의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역사없이 관점없이, 가치관과 철학없이 삶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주입한 어떤 관점에 따라, 철학에 따라 살고 있다. 역사없는 삶, 뿌리 없는 삶은 열심히 살아도 시작부터 패배한 삶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망해버린 나라 조선에 대해서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조선을 긍정하지 않고 한국인으로 제대로 살 수는 없다. 왜냐면 한국은 조선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에 대한 비판을 한다는 것이 조선의 부정에 이르고 과거의 발전적 계승과 연장선상에서 사고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절대적 부정과 좌절로 파악할 때 우리는 비판같은 행위를 해야 할 이유 자체를 부정한다. 스스로가 구제불능이며 희망이 없다면 생각이고 행동이고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아예 한국인이기를 포기하고 한국이라는 문화공동체의 존속자체를 포기하게 된다면 비판도 의미가 없다.  나는 원래 무가치한 놈이라서 절대 안된다고 굳게 믿으면서 그래도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지 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스스로 한국인이기를 포기했다면 계속 한국을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 솔직히 말하고 진정한 이방인이 되어야 공평한 것이다. 

물론 정도의 문제일뿐 누구도 혼자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남에게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살 수는 있을지 몰라도 홀로 살아갈수는 없다. 그러니 좋은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우리는 살만한 환경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문화적 공동체를 의식하고 그런 공동체가 자라나는데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세상 누구도 믿지 않고 인간은 원래 절망적인 존재라고 믿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끝없는 다툼과 싸움속에 밀어넣는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싸우며 살게 되는 이유는 신뢰의 가치와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에 기대고 그 공동체안의 상식에 기대어 살아간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 누구를 믿을 것인가를 선택하고 또 그 신뢰, 그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만큼은 누가 대신 할 수 없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결국 우리라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도 각각 자기를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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