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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우리가 서로 싸우게 되는 이유 : 역지사지

by 격암(강국진) 2014. 7. 10.

14.7.10

역지사지란 입장을 바꿔서 문제를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걸 할 수 있는 놀라운 잠재력이 있다. 그래서 소설책을 보거나 드라마를 보면서 감동하고 이야기에 빠져들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능력을 항상 잘 발휘할 수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우리가 뭔가를 얻거나 잃으면 우리의 처지는 달라지게 되는데 그에 따라 우리의 생각은 또 바뀐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된다는 것을 자주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다. 추울 때 더울 때 생각을 못하고 아플 때 건강할 때 생각을 못하며 가난할 때 부자일 때 생각을 못한다. 

 

역지사지의 문제는 가지는 것, 소유의 특성때문에 더욱 큰 문제가 된다. 소유란 비대칭적인 특징을 가진다. 내가 좋아하는 예는 오렌지쥬스다. 10% 오렌지 쥬스만 마시다가 100%를 마셔보면 맛이 더 있지만 또 그 차이가 못 견디게 멋지다는 정도는 아니다. 그저 조금 더 좋다는 정도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100% 오렌지 쥬스에 익숙해 지고 난 뒤에 이제 10% 쥬스를 마셔보면 도대체 이런 걸 어떻게 마시는가 싶은 것이다. 이 비대칭성은 카네만의 전망이론이라는 경제이론에 의해서도 지적되고 있다.

소유의 비대칭성 문제는 물론 단순히 오렌지쥬스정도의 일에서 멈추는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커다란 쇼핑센터따위는 없는 마을에서 지내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도시로 가서 쇼핑센터구경을 한다면 비록 그것이 매우 멋지고 근사하다고 생각되더라도 쇼핑센터 없이도 인간은 살 수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그런 소도시나 시골에서만 자라난 사람들은 날 때부터 대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이 지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날 때부터 대도시 환경에 익숙한 사람은 그런 것이 없는 곳에 가면 마치 사람이 살 수 없다는 듯이 생각하고 느낀다. 그래서 시골사람이 서울을 동경하는 마음이 크다고 하지만 서울 사람이 시골에 대해서 생각하는 격차는 종종 훨씬 더 극적이다.  이것이 지방사람이나 시골사람들로 하여금 서울 사람들은 지나치게 잘난 척한다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설사 서울이 어느정도 좋은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없는 것에 대해서 저렇게 까지 유난을 떨면서 대단하게 말하는 것을 지방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조금 시골음식 맛이 투박하더라도 이건 도저히 삼킬 수도 없어라고 하거나 식당이 좀 덜 세련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당에는 절대로 들어가기도 싫다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도시사람은 얄미운 것이다. 

우리는 종종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말단 직원들은 출세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며 그에 반하여 부자나 출세한 사람들은 왠지 여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소유의 비대칭성 문맥에서 말하면 그것은 정반대다. 물론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말단은 출세가 하고 싶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러나 그들의 욕망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부자가 가난해 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나 출세한 사람이 좌천되어 직위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보통 더 크다. 그것도 훨씬 더 그렇다. 그래서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대개 겁쟁이이고 걱정이 많다. 

부와 지위에 익숙한 사람은 이젠 그것들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가장 큰 공포에 빠진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많은 것을 가졌는데 그것을 지킬 힘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소유의 길은 마치 올라가는 길밖에 없는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 내려오자면 쉽중팔구 떨어져 죽을 것같다. 그러니 절벽중간에 붙어있거나 더 위험한 위로 가는 길밖에는 없다. 부와 권력의 꼭대기까지 올라간 사람들은 대부분 거기서 스스로 내려오질 못한다. 이제 권력없이는 사는게 사는 것같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남의 권력을 잠시 빌려왔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이것은 내 권력이고 내 권리라고 생각한다. 

이 소유의 문제를 심각하게 만드는 것에는 적어도 두가지가 있다. 그리고 뒤집어 말하면 그것들이 소유의 문제에 대한 치료제이기도 하다. 하나는 관점의 단순성이다. 사탕과 수박을 비교해서 달기로 말하자면야 사탕이 달고 값으로 말하자면야 대개 수박이 훨씬 비싸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어리석은 이유로 어떤 한쪽의 관점만 가진다고 하자. 세상의 모든 먹거리를 이것이 얼마나 단가로만 나열한다. 그래서 더 단것이 더 좋은거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관점은 이 세상 모든 것에 순위를 매기기 쉽게 한다. 제일 단거는 이거 두번째로 단거는 저거 하는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변화에 대해 이익이니 손해니 하는 판단을 극단적으로 명료하게 하게 된다. 인생의 모든 변화가 그저 이것에서 저것으로 다르게 변하는게 이익이나 손해로 판단된다. 가치 판단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착한 학생이란 무엇인가? 성적으로 판가름하자면 답은 간단히 나온다. 학생의 착함은 성적순이다. 좋은 집이란 무엇인가? 가격으로 판가름하자면 답은 간단히 나온다. 좋은 집이란 비싼 집이다.

관점이 단순하니까 우리는 매사에 이것은 손실이고 이것은 이득이다라고 분명하게 객관적으로 느낀다. 그렇게 될 때 소유의 비대칭성 문제는 바로 나타난다. 단순한 관점은 사람들을 남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공포에 떨고 집착하는 생활을 하게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비합리적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싸움도 난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뭔가를 좋아한다는 그 느낌은 실은 매우 왜곡되고 좁은 시야로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면 그런 걸 느낀다. 그들은 어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소한 이유로 뭔가가 좋다고 하는 일이 많고 그런 것을 얻지 못하거나 뭔가를 잃어버리고 너무나 실망하게 되는 일도 많다. 로보트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저 우산이 이 우산보다 좋다는 식이다. 어른의 시야가 반드시 더 폭넓은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무기력한 것은 그 관점이 단순해서 남에게 휘둘리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소유의 문제를 심각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원인은 바로 소유라는 발상의 버릇 그 자체다. 즉 우리가 어떤 것을 소유한다라고 생각하는 버릇, 뭔가를 소유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버릇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것을 개인적 독점의 대상으로 삼아서 이것은 내거라고 생각한다. 

 

자식의 성적이 10등이 오르면 기쁘지만 실은 소유의 비대칭성이 작동하면 10등이 오를 때는 그런가 싶다가 10등이 떨어지면 세상살 맛이 전혀 안난다. 이런 우울함의 근원에는 어느정도 이것은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있다. 물론 나의 자식은 내 자식이다. 그러나 자식이라고 해도 도와줄수 있을 뿐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독립적인 존재이다. 어떻게 보면 그저 강한 인연을 가진 이웃같은 존재다. 그렇게 생각해서 나와 자식을 독점적 관계로 생각하지 않으면 자식이 보이는 여러가지 성취에 대해 지나치게 일희일비하지 않게 될 것이다. 

돈도 지위도 명예도 마찬가지다. 소유의 비대칭성이 작동하는 전제조건은 그것을 나의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내 삶을 살고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어쩌다 보니 나에게 왔고 또 어쩌다보면 떠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나의 본질을 훼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 내가 올라가거나 내려간다고 생각하는 것도 덜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세상을 여행하는 여행자의 삶을 살려고 하기 보다는 많은 것을 한없이 소유하고 쌓아서 주위로 부터 자기를 지키려는 성을 만들려고 한다. 우리의 소유물을 우리 자신이라고 여긴다. 자신의 성을 쌓고 자기의 나라를 만드는 일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예를 들어 건강한 정신과 몸을 가꾸는 수행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행복한 가정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가 하면 회사나 사회적 관계나 업적이나 돈이나 명예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문제는 모든 것은 결국 나를 떠난다는 것이다. 내가 독점적으로 가질 수가 없다. 더구나 어떤 것은 더더욱 쉽게 그렇게 된다. 인생은 결국 여행과 같은 것이라 여러가지 변화가 계속된다. 예를 들어 노화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세상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 지금에 너무 중독되면 우리는 지킬 수 없는 것을 너무 열심히 지키려고 하게 된다. 

 

여행길에 끌고 다니기에는 상대적으로 더욱 불편한 것들이 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성을 유지하자면 변화에 저항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우리의 성은 감옥이 되고 만다. 우리는 어느새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가진 것을 유지하느라 지옥같은 시간들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가진 것에 집착하여 그것들을 잃었을 때 우리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옥이 점점 더 나쁜 지옥으로 변해도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질 못한다. 마치 지는 도박에 마지막에 가진 모든 돈을 전부 밀어넣어 최악의 지옥으로 가는 도박꾼처럼 우리는 본전에 집착한다. 더구나 한 때 땃던 돈은 이미 내 돈이며 그게 본전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한국에서 대표적인 사례중의 하나가 부동산에 갇힌 것이다.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투기를 한다고 할수도 없고 심지어 투기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을 한다고 해도 거기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정말 원한다면 그걸 박차고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주식이건 부동산이건 그것이 정말 투자라면 손털어 이익실현을 하거나 손절매를 할 수 있어야 투자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갇힌 것이다. 

부동산이든, 학위든 명예든, 직업이든 연인이든 모든 건 수단인데 우리는 어느새 그것들에 집착하고 손을 놓지 못한다. 그래서 인생 여행은 거기서 끝나버리고 만다. 뭔가가 우리 손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거기에 인생전부를 밀어넣어버린다. 실패하면 크나큰 손실을 겪는다. 사귀던 연인, 가질뻔한 직장, 팔았던 집, 거의 손에 들어올 뻔한 명예에 대한 미련이 우리를 함정에 집어넣는다. 이것은 마치 야구선수가 이미 지나가버린 실패한 타석에 연연하여 게임을 포기하는 꼴이다. 우리는 실패도 잊지 못하고 성공은 더더욱 잊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조금씩 자신을 함정으로 몰아넣는다. 

 

현대인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독점적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함께 공유한다는 개념은 점점 더 실종되고 어떤 것은 분명히 누군가가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진다. 그래서 일까 현대인은 잘난척하지만 엄청난 자살률에 시달린다. 멀리갈 것없이 한국인의 자살률이 해방이래 지금보다 높은 적이 없다. 그리고 해방이래 지금보다 더 부자였던 적도 없다. 스스로 죽을 각오도 하는데 남생각을 얼마나 하겠는가. 결국 우리는 아귀다툼을 벌이는 지옥을 만들어 온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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