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문제는 소수자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라는 점에서 본인이 동성애자가 아니고 그들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솔직히 말하면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살건 그건 그저 그들의 선택의 문제일 뿐 나와는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문제다. 사실 우리는 모두 어떤 점에서는 소수자고 특이한사람이다. 그런 우리의 특이성은 소수자로서 인정받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약점이나 기괴한 특성으로 억압되어야 할 것인가.
예를 들어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은 물론 대개 소수자다. 하지만 남들은 다 대학가는데 대학에 안가기로 한 당신도 학벌에 대한 문화적 소수자일 수 있다. 직장에 가보니 남들은 다 부자집 아들딸인데 나만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곳에서는 당신은 문화적 소수자다. 심지어 모두가 여당을 찍는 곳에서 당신만 여당에 반대한다면 그곳에서는 당신은 문화적 소수자다. 그 반대의 경우는 당신은 다수파지만 소수파를 당신은 보게 된다.
여러가지 차이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에 따라 세상에는 여러가지 구분이 생긴다. 그 차이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 아닌가의 문제다. 소수파로서 혹은 다수파로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한 소수적 특성을 포용할 것인가 배격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틀려도 그 질문에 접근해들어가는 방식에는 기본적으로 비슷한 면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예를 통해 일반적인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 문제에 답은 분명 무조건적인 포용이거나 무조적인 배격일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집단이건 개인이건 윤리적 일관성이나 가치적 정체성따위가 있다. 무조건적인 포용은 자살이다. 예를 들어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고 해도 원하는 사람은 모두 대한민국의 국적을 주겠다고 하는 정책을 펼수 있을까? 무조건적인 배격도 마찬가지로위험하다. 마구 칼을 휘두르고 서로 억압하다보면 세상에는 단 한명의 독재자밖에는 남지 않을 것이며 기껏해야 우리는 말도 안되는 공포사회속에서 억압되어 살아야 할 것이다. 조금만 허용되지 않은 생각을 하면 잡혀가거나 내쳐지는 그런 사회다. 그러니 원래 이건 포용해야 한다던가 이건 당연하다던가 하는 것은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 문제에 있어서 평등의 개념이라던가 법이라던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만 그런 단어나 문구 자체가 어떤 답을 준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그건 답이 아니라 결과다. 누구도 테두리 없는 평등을 생각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한다. 제 아무리 강하게 사회적 평등을 외치면서 차별에 항의 하는 사람도 그렇다. 혈연으로 이어져 있건 그렇지 않건 인간관계는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다. 많은 사람은 앞에서 말한 국적으로 인한 차이가 존재한다는것을 인정한다. 설사 범세계적 인류공동체를 말하는 사람도 생명공동체의 평등을 인정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토끼 두마리의 생명은 당신 하나의 생명보다 소중하다는 논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소천마리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간하나 죽는 것은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인간은 지구 생명체에 암적인 존재이므로 인류말살이 생명평등의 관점에서 올바른 결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로 거의 없다. 그러므로 나는 평등을 믿는데 너는 평등을 믿지 않는 차별주의자라는 절대적인 구분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모두 차별주의자다.
평등을 외치는 사람은 사실 먼저 자기 자신도 차별주의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때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포용의 선에 대한 대화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화는 법이나 문화적 관습으로 정착되는 때까지 한정없이 오래걸릴 수 있지만 이러저러한 것은 절대적 진실이므로 당연히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절대적으로 절대적인 것은 사실 없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관점이 모든 가능한 윤리적 태도를 같은 상황에 놓게 하며 따라서 윤리적인 공백을 만든다고 비난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우리는 누구도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역사적 과정의 결과이며 어떤 공동체에서 태어나고 길러졌다. 윤리적 태도가 안바뀌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항상 살던대로 살수는 없다. 세상이 바뀌고 기술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 문화적 모순이 누적되고 윤리적 공감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즘은 해변에서 비키니를 입는 여성이 있고 그것이 용인된다고 해서 조선시대에 팬티바람으로 돌아다닌 여성을 풍기문란으로 처벌한 것을 조선시대 사람의 윤리적 태도가 미개한 증거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또한 과거에 대한 결과로서 오늘에 존재한다. 과거를 수용하거나 개선해서 오늘에 존재한다. 우리는 우주적인 무한 공간에서 아무 윤리적 코드 하나를 찍어서 그대로 살기로 한 그런 존재가 아니다. 가치적으로 윤리적으로 말했을 때 오늘은 한국인으로 내일은 미국인으로 살지도 않고 살 수도 없고 살아서도 안된다.
따라서 윤리적 공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끝없이 계속 되어져야 할 현재와 미래와의 대화 뿐이다. 이것은 자명한 결과같지만 사실은 종종 망각되고 대화라고 생각되는 것은 종종 싸움이 된다. 투쟁도 언제나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서로 상대를 위협으로 파악하고 대화를 중단하고 서로를 억압하기로 결정했다면 투쟁은 피할 수가 없다. 살아야 하니까.
누군가가 나는 동성애자는 사회적인 암적인 존재로 모두 감옥에 쳐넣거나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데 그에 대해 동성애자가 생존투쟁을 벌이지 않을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명문대를 졸업하지 않으면 아예 원천적으로 취업의 기회를 박탈하며 취업이 안되면 생존의 기로에 선다고 하면 한가롭게 학벌차별의 벽을 낮춰보려는 대화를 계속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투쟁은 피할 수 없지만 투쟁이 답이 될 수는 없다. 투쟁은 그저 투쟁을 낳는다. 상대방을 더 큰 위협으로 느끼게 만드는 악순환만 계속된다. 투쟁은 그저 생존을 위한 임시방편 일 뿐이고 언제나 답은 다시 대화로 갈 수 밖에 없다.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공감대가 만들어 질 때만 답은 나온다. 즉 투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대부분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사실 투쟁으로 승리하자는 구호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투쟁은 승리의 수단이 아니라 생존의 수단이고 매우 소모적이라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모두가 패배자가 된다. 승리의 수단은 대화와 공감이다. 세상에는 동성애자를 극단적으로 차별하는 사람들이있고 그런 차별에 고통받는 동성애자는 때로 투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말라는 팻말을 들고 화난 얼굴로 거리를 행진하는 것이나 법을 제정해서 우리를 보호하라는 주장 자체가 승리의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자는 세상이 우리를 몰라준다고 하겠지만 동성애자는 스스로 나는 이성애자를 이해하는가도 물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서양에서는 더 상황이 좋은데 우리는 상황이 더 나쁘니까 한국사람들이 우리를 몰라준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왜냐면 다른 문화적 규칙들도 다르니까. 서양에서는 오히려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신체적 접촉을 많이 피하지 않는가? 한국에서 처럼 동성끼리 친근함을 표시하기 위해 신체접촉을 하고 공중목욕탕에도 같이 가고 하는 일은 드물지 않은가? 서양사람들은 한국에서 친구끼리라고 여자들이 서로 손잡고 돌아다니는 것을보면 이상하게 생각하곤 한다. 사막과 숲에서 산불이 날 가능성은 서로 다르니 휘발류같은 물건에 대해 태도가 다른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가?
언젠가 어떤 테러리스트가 액체를 가지고 폭탄을 만들어 비행기를 타려고 시도했다는 것때문에 지금 전세계의많은 여행객들이 고통받고 있다. 보안검색에 액체류는 가지고 탈수 없다고 해서 불편을 겪는다. 하나의 공동체는 여러가지 사람들을 포함하는데 그런 여러가지 사람들 중 아주 소수의 사람들때문에 공동체는 큰 댓가를 지불해야 할 때가 많다. 사회적 상황이 그런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소수파인 내가 무조건 내가 옳으니 사회는 나를 위해 모든 규칙을 바꾸고 댓가를 지불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무조건 옳을 수는없다. 혁명가와 소수파는 우선 겸손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 때문에 세상이 댓가를 치루는것은 당연하다는 태도를 취하면 세상은 우리가 너희를 차별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태도로 답할지 모른다. 승리는 투쟁에서 오지 않는다. 승리는 공동선의 달성이다.
우리가 다수파일때라도 대화에 대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세상이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편의상 세상을 세가지로 나누어 보자. 하나는 우리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그 울타리 바깥에 있기는 하지만 대화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대화가 불가능하여 투쟁해야 하거나 가능한한 소극적이고 간접적인 대화만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섯부르게 대화를 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싸움을 격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구분은 편의상하는 것이고 임시적이다. 사안마다 다르고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구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분을 이야기하는 것은 포용이냐 배제냐의 이분법은 대화의 상대를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르게 만드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나는 삼분법을 제안하는 것이다. 포용-대화-배제의 삼분법이다. 이 세상에는 포용되어 완전히 하나의 공동체로 살기에는 아직 이르고 그렇다코 투쟁하거나 배제시킬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먼 사람도 아닌 대화의 상대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있다. 그들은 포용과 배제의 이분법속에서 어정쩡하게 판정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도 언젠가는 우리의 공동체의 일원이 될수도 있고 완전히 멀어질지도 모르지만 그저 대화의 상대로 존재하는 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나는 실은 생각이 깊은 사람들일 수록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저 대화의 상대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믿는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일 수록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존재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포용이냐 배제냐의 질문만 던진다. 답이 어느쪽으로 나오건 그 답은 어떤면에서 무리가 있고 대화는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판단이 끝났으므로 중단된다.
승리의 수단은 대화와 공감뿐이다. 그러므로 우선 소수자 집단은 자기들끼리는 대화하고 공감하는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대안적 삶을 꿈꾸는 문화적 소수집단은 자신들끼리는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실천하는가. 글이라도 쓰고 대화라도 하는가. 무엇보다 만약 내버려둔다면 자기들끼리는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수 있는가. 자기들끼리도 공감이 안되고 불행하다면 그런 문화적 태도를 세상에 퍼뜨리려고 하는 노력이 억압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가.
세상에는 입장바꿔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도 어떤 측면에서는 소수파이며 따라서 언제나 극단적 차별의 대상이 될수 있다는 생각은 없이 적을 쉽게 만든다. 내게는 그런 사람들 이야말로 소극적 대화의 대상이다. 세상이 가져야 할 문화적 규칙중의 하나는 바로 다른 사람들이 대화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관점일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대화를 하고 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어느 새 우리가 나란히 가까이 앉아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으며 그저 좋은 친구로 좋은 시간을 가질수 있게 되었다면 그게 승리다. 법이나 제도가 있고 없고가 핵심은 아니다. 시스템은 사실 단순한게 좋다. 뭐뭐를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하는 복잡한 규칙은 또다른 구멍을 만든다. 법이 뭔가를 이룩해 줄거라고 생각하지 않는게 좋다. 뭔가를 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고 우리는 그 책임을 시스템에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
'주제별 글모음 > 세상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 (0) | 2015.01.03 |
---|---|
땅콩리턴과 시대의 소리 (0) | 2014.12.15 |
우리의 정치경제에 답이 없는 이유 (0) | 2014.11.19 |
스스로 택하는 죽음을 생각하며 (0) | 2014.11.18 |
한국이 좋은 이유 (0) | 2014.11.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