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은 강시산. 산이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는 2015년 1월2일 저녁 7시반에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가 태어난 것이 1936년이고 가난한 농부의 첫번째 자식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삶이 힘든 것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미 보여준다. 그는 일제시대에 조선인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한국전쟁을 경험해야 했다.
그의 어머니의 살아생전 기억에 의하면 초등학교시절 반의 그 누구보다도 똑똑했었다는 그이지만 아무것도 없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를 교육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초등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먹고 살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고 청년으로 성장할 무렵에는 실질적으로 그의 부모와 4명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을 부양하는 가장이 되어야 했다. 그는 타향을 떠돌면서 고향으로 돈을 보내 부모와 동생들을 위해서 집을 짓고 땅을 샀으며 자신은 배우지 못했으면서 동생들을 자신보다 더 교육시켰다. 그가 자신의 재정적 상황에 대해 허풍을 떨면서 결혼했다는 그의 아내는 결혼하고 그 실정을 알고보니 기가막혔다고 한다.
배운 것없고 이렇다할 뒷배도 없었던 그에게 세상은 무섭고 잔인한 곳이었을 것이다. 누가 그를 지켜주고 이끌어 주었겠는가. 누가 그를 위험한 유혹에서 보호해 주고 사기꾼들로 부터 지켜주었겠는가. 누가 그를 부당한 폭력과 인간적 모욕으로 부터 막아주었겠는가. 그는 오직 그자신보다도 더 연약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매달리는 식구들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 시절 시대는 잔인했고 그것은 특히 그와 같은 사람에게 더 그랬다.
그는 군대시절에 배운 운전으로 트럭운전이며 택시운전을 생업으로 삼았다. 보다 젊었던 시절의 그를 기억하는 그의 아내는 젊었을 적에는 그도 꽤나 말썽을 부렸다고 말한다. 노름도 하고 교통사고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래도 사업도 날려버리고 차도 없어져서 먹을 것도 없던 시절도 있었다. 그것은 안그래도 힘들었던 대가족부양의 짐과 함께 그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때의 모습만을 기억하는 그의 막내아들은 다른 모습만을 기억한다.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우직할 수 있을까 싶도록 단조롭게 일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에게는 도무지 사는데 있어서 오락이란 것은 없는 것같았다. 그의 막내아들은 그가 자신에게 공부좀 열심히 하라고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 막내아들은 힘들다는 대입수험생생활때 감히 불평을 할수가 없었다. 그 아들은 안간힘을 다했지만 그 아버지는 그보다 언제나 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그 아들이 공부하는 것보다 더 길게 일했다.
그는 그다지 말이 많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의 막내 아들은 그가 어린 시절 자신을 기사식당에 데려가서 커다란 돈까스를 사줬던 것을 드문 외식의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그때도 그는 호들갑스럽게 말을 하거나 드물었던 외식을 자식에게 자랑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의 아들은 그 식사를 그가 평생에서 했던 식사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식사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과 눈빛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아버지였던 것이다.
나중에 그의 아들이 커서 아버지가 되도 그는 언제나 같은 것들을 물었다. 밥은 먹었는가, 애들은 잘 크는가. 그와 대화하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때로는 말도 안되는 정치적 주장으로 아들을 기가 막히게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박사를 받은 아들은 그 아버지 앞에서 정말로 잘난 척을 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도무지 그 아버지만큼 열심히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는 아마도 그의 자식에게 그의 아버지만큼 좋은 아버지는 되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가난한 아버지 어머니를 모셨으며 동생들을 키웠고 자신의 세 아들도 다 대학까지 교육을 시켰다. 그의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은 모두 대기업의 사원이 되었고 막내 아들은 물리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인생에 자랑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식들 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식들에게서 그다지 대단한 효도를 받지는 못했다. 그 아버지보다는 성공하고 배운 아들들이었지만 다들 아무래도 바빴고 더 많은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전혀 섭섭해 하지 않았고 자식들에게 뭘 요구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자식들이 효자들이라고 굳게 믿었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남에게 자신의 자식들을 자랑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노년에는 직장암에 걸려 건강을 잃었다. 암수술 끝에 그 암을 이겨내기는 했으나 그는 아무래도 전과 같아지지는 않았다. 수영이며 자전거타기쯤은 문제없었던 그였지만 이젠 평생의 업이었던 운전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특유의 끈질김으로 암을 이겨냈다. 그가 10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 폐암진단을 받았을 때 그가 했던 걱정은 자식걱정을 제외하면 주로 아내 걱정이었다. 그걸 보면 그가 끈질기게 직장암을 이겨냈던 것은 자신이 없어지면 뒤에 남을 아내를 걱정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런 그도 약해진 체력으로 또다시 그를 덮친 폐암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는 주로 병원비를 걱정하면서 암투병을 했다. 폐암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 고통에 대해 걱정을 하는데 그는 정신이 뒤흔들릴 정도로 강한 진통제를 먹어가며 암투병을 하면서도 병원비가 자식들을 힘들게 하지 않을까 아내가 너무 힘들지 않은가 하는 걱정에 가득했다.
2014년이 한달여 남았을 무렵만 해도 그는 반드시 체력을 되찾겠다고 아내를 위해서 꼭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2015년의 아침이 밝아올 무렵에는 이미 그는 아무 힘이없었다. 그는 2015년을 겨우 2일 보내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세 아들과 그의 아내와 7명의 손녀손자들을 뒤에 넘겼다. 그의 심장은 비록 더 이상 뛰지 않지만 그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 적어도 그는 세아들과 7명의 손녀 손자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는 적어도 그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생을 마쳤다.
장례식장에서 그의 막내아들이 그를 위해 그의 이야기를 짧게 쓴다. 이 것이 그의 영정에 절하는 그의 방식이다.
아버지 평안히 잠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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