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세상에 빚을 지고 산다라고 하는 말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세상으로부터 받을 빚이 있다라는 말도 그에 못지 않을 것이다. 돌부처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라면 우리는 모두 세상으로 부터 뭔가를 받고 뭔가를 준다. 삶이 단순하고 삶에 대한 성찰이 깊어도 그렇게 주고 받는 것에 대해 세세히 살피기는 어려울 것인데 우리는 대개 감당할 수 없이 삶은 복잡하고 자기 삶에 대해 깊고 길게 앞뒤를 맞춰볼 시간은 없다.
노름판의 농담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고스톱을 쳐도 판돈이 안맞는다고 하는 말이 있다. 즉 딴 사람은 없는데 다 잃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주고 받는 가운데 문득 길게 생각해 보니 내가 참 세상에서 많이 받기는 했는데 준게 없구나 하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내가 세상에서 받을 것이 많은 데 이 세상이 변하려고 한다. 그래서는 안된다. 받을 건 다 받고 나야 그런 걸 허락해 줄 수 있다. 내가 손해 볼 수는 없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시대가 변한다던가 가족이 변한다던가 지역이 변하고 친구가 변하는 것에 대해 이런 것들때문에 섭섭한 느낌이 들기 쉬울 것이다. 특히 비교와 욕심 때문에 그렇다. 내가 사심없이 사회를 위해 봉사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진심으로 그렇게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자기보다 뭐 제대로 한 것도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을 보면 욕심이 나고 섭섭한 마음이 들기 쉬울 것이다. 즉 아무도 안 알아줘도 안 섭섭했는데 누가 다른 사람을 알아주고 나는 안알아주면 갑자기 섭섭해 지기 쉽다는 말이다.
부모에게 친구에게 아무 사심없이 사랑으로 효도하고 우정을 베풀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정말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심지어 칭찬을 듣거나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부모가 다른 자식을 더 높게 평가하고 고마워하며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만 고마움읖 표하는 것을 보면 또 생각이 달라지기 쉽다. 질투와 욕심과 비교는 사람을 한순간에 바꿀 수 있다.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진심으로 왕에 대한 충성심을 가질것이고 무엇보다 스스로 나는 바라는게 없다고 믿을 지 모른다. 그러나 왕과 백성이라는 연결 고리안에서 왕도 백성도 모두 내가 세상에서 시스템에서 받을 빚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비록 고통스럽지만 충성스런 백성으로 모범적인 백성으로 살아왔다. 바로 그런 평판자체가 내가 가진 재산의 일부다. 충성스런 삶에 대한 댓가다. 그런데 왕정이 사라지고 시스템이 바뀌면 그런 재산은 마치 부도난 수표처럼 변하고 내가 세상에서 받을 빚은 받을 길이 없어진다.
왕과 백성만 그런 것일까. 동네에서 텃세를 부리며 우리 동네가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의 마음에도 그런 것이 일부 있을 것이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심지어 스스로도 의식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없지만 실은 마음 저 깊은 속에 나는 세상에서 이 동네에서 이 공동체에서 받을 빚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네가 바뀌어 사람들이 새로운 어떤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되면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공을 들인 것이 사라진다고 느낀다. 아깝고 억울하다고 느낀다. 돈을 떼먹힌 것같다. 댓가를 바라고 줫다고는 스스로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없어질 판이 되니까 바라는게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노름판에 낀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돈을 따겠다는 욕심도 있겠지만 더 큰 것이 본전생각때문이다. 이미 잃고 없어진 돈을 잃고 없어진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느 정도 이 노름판이 나에게 빚을 진 것이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그러니 그 빚을 돌려받아야 노름판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걸 포기하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아깝다.
이런 것들은 인간 세상이 왜 그렇게 비합리적이고 말이 안되는가에 대한 한가지 이유다. 사람들은 실은 이유고뭐고 본전 생각이 나고 세상으로부터 받을 빚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런 것을 표면화하고 그런 부채를 실제로 보상받을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그런 작업은 매우 어렵다. 아버지와 아들이 고스톱을 쳐도 판돈이 안맞으니까.준사람은 기억하는데 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니까. 평생 굴욕을 참으며 자식을 키웠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그렇게 키워줬는데 자식은 부모에게 나한테 뭐하나 해준게 있냐고 큰 소리 치더라는 이야기는 세상에 흔하지 않은가?
오히려 이런 예는 흔하고 정산하기 쉬운 것이다. 세상에는 훨씬 훨씬 더 많은 보이지 않는 거래와 은혜가 넘쳐 흐른다. 우리는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보살핌을 받고 살고 있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이 세상이 부족한 우리를 돌봐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 손의 존재를 못느끼는 사람은 자기가 잘나서 모든 것이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바보같고 어딘가 얼빠진 우리가 그럭저럭 살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런 위기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누군가가 그 위기를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그 보이지 않는 손들은 적어도 대부분 보상받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기와 비교와 욕심의 바람이한번 불면 풍경이 달라진다. 억울한 마음들이 솟아난다. 자기 잘났다고 떠들어 대는 인간들, 누가 참 잘났다더라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이 특히 그런 마음들을 대량생산해 낸다. 비교하는 말들이 세상에 넘치면 세상은 흔들린다.
우리는 모두 합리적인 세상을 꿈꾼다. 그런 세상을 명확한 숫자와 냉철한 논리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면 아직 생각이 깊지 못한 것이다. 명확한 숫자와 냉철한 논리는 마치 전쟁을 하는 군사와 같다. 우리는 때로 전쟁을 해야할 필요가 있지만 전쟁을 이겨도 마치 패전한 것처럼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한다. 진정한 승리는 전쟁을 동원하지 않을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숫자와 논리를 적용하는 전제는 우리가 이미 관련되어진 모든 것을 다 봤다고 하는 것이다. 일단 숫자가 종이위에 다써져야 그걸 더하고 빼고 맞춰보고 할 것이 아닌가 . 우리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는결코 관련되어진 모든 것을 볼수 없다는 것이다. 논리적인 승리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무한정 명확한 것은아니다. 우리가 부모자식간의 애정을 다룬 드라마를 본다고 하자. 부모와 자식은 서로 싸우면서 산수를 열심히하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중에 정신차리고 다시 크게 보면 여태까지 맞춰온 산수가 도대체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게 그렇게 많은데 그안에서 숫자 맞추고 비교해서 무슨 합리적인 결론이 나온다는 말인가.
자랑하지 말고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항상 보이지 않는 손에 고마워하면서 살아야 한다. 스스로가 보이지 않는 손이 되도록 하면서 살아야 한다. 피할 수 있다면 시시비비를 따지고 산수를 맞춰보는 짓은 애초부터 피하는게 좋다.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를 통쾌하게 논리로 눌러버렸다고 의기양양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세상은 정확히 이와 반대로 흐르는 일이 많다. 무척이나 자랑하고 보이지 않는 손따위 웃음거리가 된다. 끝없이 모든 것에 시시비비를 따지며 이종격투기 하듯이 논리로 말로 싸우라고 남을 떠밀기도 한다. 오늘도 판돈은 그래서 잘 안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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