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의료시스템의 변화와 사회의 고령화로 인해서 스스로 택하는 죽음에 대해 사회적인 논의를 하는 것을 피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존엄사에 대한 글이 심심치 않게 보이고 우리는 요양병원이나 호스피스 병원에 대해 그리고 고통받는 환자와 그 가족에 대해 점점 더 많이 듣게 되고 있다.
세상이 변하면 상식도 변한다. 한국 사회의 자살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상식적인 반응은 자살률을 줄여야 한다는것이고 스스로 죽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반응만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들은 제한적이다. 대가족 제도속에서 환자를 돌보는 것과 핵가족 시대에 그렇게 하는 것의 어려움은 다르고 의료환경도 전과는 다르다. 우리 스스로가 환자가 된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그렇게 간단하게 나오지 않는다.
의료시스템은 날로 더욱 뛰어나지만 비싼 것이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적 속성에 따라서 돈이 많이 남는 곳에 더 많은 시스템이 투여되는 것인데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전에는 손을 쓸 수 없었던 환자도 시도 해볼만한 혹은 시도 해볼만하다고 주장되는 치료가 늘었다. 그러나 물론 그 치료들이 모두 완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매우 비싼 경우가 많다. 어떤 치료의 진짜 가치는 사실 시간이 좀 지나야 임상결과를 정리할 수 있고 평가가 가능한데 그러기에는 너무 자료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통계적 결과로는 그 효과가 아직 잘 안보이지만 그럴 것이다라고 주장되는 식의 것이 되기 쉽다. 그리고 그런 치료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환자의 고통만 증가시키거나 환자가 고통받는 기간만 늘리면서 남아 있는 가족과 나아가서는 사회적 재정도 파탄시키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최근에 나는 암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들이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을 발견하는 경우 종종 자신이 환자에게 하던 치료를 하지 않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등 마지막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것에 집중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대개 환자에게는 치료를 권하지만 그 치료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는 당사자의 경우에는 치료를 그만둔다는 것이다. 모든 의사가 이렇게 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같은 일은 일반인들보다 의료적 현실을 더 잘아는 의사의 입장에서 어느 쪽이 더 가치있는 선택인가를 고민한 결과일 것이다. 사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열배를 더 산다고 해도 그 기간만큼 더 고통받고 자신의 존엄이 무너지며 주변 사람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다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쓸쓸히 죽는 쪽이 된다면 반드시 그쪽이 더 가치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간호의 어떤 것은 사회가 해줄 수 없고 결국 가족을 극한의 피로로 모는 일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의료기술이 점점 더 비싼 것이 되어가면서 우리는 하고 싶지 않은 질문을 피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심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쓰는 의료비를 가난한 사람들의 질병을 예방하는데 쓸 때 훨씬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고 할 때 사회적 자원은 어떻게 배분되어야 할 것인가? 여기에도 정답은 없다. 아래에도 그 이유를 쓰겠지만 생명의 가치를 따질 때 두명의 가치는 한명보다 크다는 식으로 계산하는 것은 언제나 참일 수가 없다.
죽음을 선택하는 문제도 선택의 문제중 하나이며 어느 쪽이 가치있는가 하는 것에 관한 문제다.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비록 결론이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뭔가가 당연하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예를 들어 죽음에 대해 삶을 선택하는 것은 무조건 가치있는 쪽을 선택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다. 죽음과 삶의 문제는 아주 많은 조심을 해야 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선택은 가치나 의미의 문제이고 가치나 의미는 문맥과 관계에서 나온다. 우리는 이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 모든 것에서 분리되어서 존재하는 의자나 모자나 나라는 존재의 가치따위는 없다. 있어도 그것은 작디 작은 세계 안의 것이다. 관계와 문맥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고 그저 습관적으로, 관습적으로 이것의 가치는 이런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이미 뿌리가 잘려서 화병에 들어간 꽃이 나는 살아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문제가 생긴다.
이 글의 앞에서 나는 주로 죽음에 대한 최근의 사회적 환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만한 평이한 내용인 것같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죽음을 사회적 문맥에서만 생각하게 되고 그런 문맥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사실이니까 그렇다. 단지 그것들이 사실의 전부가 아닐 뿐이다.
관계와 문맥은 무한하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에게 우리가 보는 관계나 문맥을 가지고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누가 봐도 죽어 마땅하고 아깝지 않은 사람이 나는 살고 싶다라고 한다고 해서 그가 바라보는 삶의 문맥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반대로 모두가 아까워 하는 인물이 죽고 싶다고 한다고 해서 그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것은 대화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한 대화는 아니다. 내가 뭘 선택하건 또는 어떤 사람이 뭘 선택하건 그 선택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잘못된 것이며 내가 주장하는 선택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노력은 틀린 것이다. 관계와 문맥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문맥과 관계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고 다른 사람이 그 선택을 보는 관점은 틀린 것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우리는 다만 대화를 할 수 있다. 대화는 무엇보다 관계의 유지고 전개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 대화의 내용이상으로 우리는 관계를 유지하고 만들 수 있다. 어떤 가치가 절대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망상때문에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가치를 유지하고 창출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죽기를 선택한 사람에게 가장 설득력있게 죽음을 포기하게 하는 것은 아마 대화의 내용 자체보다도 그 사람과 대화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그렇게 외로운 곳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해줄 것이다. 우리를 죽게 하는 것은 대개 외로움이다.
대화는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다. 특히 일에 바쁜 현대사회는 사람들을 쉽사리 고독히 진공을 나르는 이상기체원자가 되게 만든다. 종종 가장 먼저 대화를 하려는 노력이 포기된다. 그러기에는 시간도 에너지도 없다. 게다가 대화를 위한 노력앞에는 넘어야 할 벽도 있다. 관점의 차이, 이러저러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무지의 벽을 만나면 우리는 대화가 소용이 없으며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생각에 설득되면 우리는 사람을 버리고 세상을 버린다. 그래서 누군가를 외롭게 만들고 스스로를 외롭게 만든다. 죽음으로 한발더 다가가는 것이다.
대화는 우리가 가진 관계와 문맥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그런 문맥으로 세상을 보게 되지는 않더라도 아 저런 입장도 있고 저런 관계도 있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저런 망상때문에 제 아무리 많은 신호를 보내도 저쪽은 그 신호를 받고 있지 않은 것같은 경우가 계속 벌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느끼게 하려는 노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항상 대화와 소통과 접촉이 필요하다. 그것은 누군가의 선택이 아주 외로운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동시에 우리가 세상과 또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안타깝지만 현대의 관점은 고립된 존재를 가정하는 과학적 시각이 지나치게 깊게 들어가 있어서 우리는 관계와 대화에 눈이 먼다. 그것의 존재와 중요성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마치 1+1=2인것처럼 어떤 것의 의미와 가치가 대화가 없어도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나는 부모님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생각해 보면 언제 부모님과 대화했는지, 부모님에게 식사대접이라도 해본게 언제인지 부모님이 뭘 좋아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게 언제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탄생한다. 대화와 소통과 접촉이 없어도 부모는 부모고 자식은 자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습관과 단정에 빠져서 대화를 포기한다. 이러저러한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너무 자주해서 당신의 말은 들어보나마나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 버린다. 대화자체가 답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고서 답이 정해졌으면 대화가 필요없고 답이 나오지 않으면 대화가 필요없다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식물인간이거나 의식이 없어도 만남과 접촉은 큰 의미가 있다.
삶과 죽음의 선택은 가장 중대한 선택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 선택이 어떻게 내려지건 그것은 대화와 접촉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 선택은 만족스러운 것, 후회없는 것이 될 것이다. 대화가 반드시 삶을 선택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그렇게 할 때 실제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을 선택하고 삶을 살아갈 힘을 얻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외로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후회하게 하고 죽음을 선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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