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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21세기형 인간의 새로운 관계

by 격암(강국진) 2015.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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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9.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어버리지만 인간의 사회는 인간의 특징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건물의 한층의 높이는 왜 그정도일까? 그것은 당연히 인간의 통상적인 키 크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례는 인간의 평균키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사회는 지난 몇백년 몇천년간 엄청나게 변했는데 인간은 여전히 몇만년전과 유전적으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몇만년전은 커녕 몇천년 몇백년전의 사회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크게 다르다. 유전에 의해 결정된 인간과 사회적 현실의 간격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 간격은 어떻게 메워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언제나 메워질 수 있는 것일까? 혹시 이 간격을 메울 수 없기에 사회적 진보도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좀 더 주제를 한정해서 인간의 사회적 소통능력에 주목한다고 해보자. 전에는 세계의 인구는 이렇게 많지 않았고 이렇게 거대한 도시와 거대한 아파트 같은 곳에서 거대한 국가를 이루며 살지 않았다. 거대한 국가가 있다고 해도 당시의 통신수준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에게 세상사람이란 그저 자기 주변의 몇백명정도로 이뤄진 세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세상은 느릿느릿 아주 천천히 변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뭘 의미하는 것일까? 인간의 지적 언어적 능력을 고려했을 때 인간이 몇명의 인간과 진지한 사회적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가?내가 진지한 사회적 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서 공감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즉 상대방이 아픈지 즐거운지 걱정하는게 있는지 화가 났는지를 나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정성적인 설명에 불과하므로 진지한 사회적 관계의 규모에 대해 우리는 각자 나름의 구체적 답을 생각할 수는 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은 어떤 다른 인간과도 진정한 의미에서 연결될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즉 위 질문에 대한 답이 0이다. 어떤 사람은 그 수가 몇십이나 몇백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실제로 사회적 관찰을 통해 나온 것을 보면 인간집단이 서로 잘 소통하는 규모는 몇백명 정도라는 말이 있다. 그 규모정도까지는 긴밀한 사회적관계를 가지지만 규모가 그 이상이 되면 서로에게 무관심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답이 뭐건 간에 위의 질문에 대해 그 답이 백만이나 60억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매우 소수일 것이다. 제 아무리 사람사귀기를 좋아해서 엄청난 수의 사람을 주소록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 숫자가 그렇게까지 커질 수는 없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굶고 학대받는 인간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는 것이고 실제로 전 지구적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마치 그들이 내 부모나 자식인 것처럼 걱정하면서 살아간다면 그 인간은 아마 한 순간도 견디지 못하고 미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유전적 특징내지 한계다.

 

사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비참하게 죽고 있다. 부모나 자식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는 경험을 1초 1초마다 겪으면서 제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는가? 자식이 굶거나 총에 맞아서 죽는 경험을 매 초마다 다시 하는데 제 정신이라는게 가능할까?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온 세상사람들을 정말 내 부모나 자식처럼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거나 인간이 아니거나 우리가 통상 말하는 정도의 애착을 부모나 자식에게 가지지 않은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적어도 압도적 다수의 인간은 정서적 공감을 가지고 사회적 관계를 이뤄나갈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그리 크지 않다. 그것이 인간의 유전적 한계다.

 

그런데 사회적 현실은 어떤가? 전자통신과 자본주의의 발달로 세계는 점점 더 빠르고 긴밀하게 움직이도록 변화해 왔다. 이집트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홍콩에서 시민들이 시위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남의 일만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러시아에 연결되고 러시아가 서방과 대립해서 경제난을 가지면 그것은 도미노처럼 문제를 일으켜 금새 우리나라 경제와 우리들의 직장을 어렵게 할 수 있다. 또 우리는 매일 같이 전 세계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쓰면서 산다. 중국의 경제난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죽건 말건 무관심한 것은 윤리적으로 따지기 이전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현명하지 않다. 우리는 오늘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착한 소비 운동같은 걸하고 환경문제도 고민한다. 우리가 값싸게 뭔가를 소비한다는 것이 누군가를 착취하는 일이 되고 우리가 쓰레기를 만들고 연료를 소비하는 것이 인류전체의 미래를 위협한다는 것이 분명해 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사회적 관계의 규모와 현대 사회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회적 관계의 규모는 오늘날 아주 크게 다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큰 문제중의 하나다. 정서적 공감이 없으면 인간은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누군가가 죽어도 그것은 그저 그가 재수없거나 그 사람 자신의 잘못이거나 한 것이지 나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사회적 관계는 끊임없이 수정되고 확장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날 문득 자신이 한 일을 되돌아 보았을 때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당신은 아무 생각없이 길을 걸었고 아무 생각없이 수천마리의 개미를 밟아 죽였을지 모른다.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 개미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다행인것은 그들은 그래도 여전히 개미라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개미를 죽였다는 사실때문에 자살충동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잔혹극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당신이 아무 생각없이 하루 하루를 보내고 스위치를 누르고 물건을 샀는데 다음 주에 당신은 그것들 때문에 당신의 부모나 자식이 죽은 것을 발견했다고 하자. 실질적으로 당신이 가족을 죽인 것이다. 물론 당신은 미칠 것같은 기분이 될 것이다. 이것은 그저 공상일까? 당신은 당신이 철없던 시절에 한 어떤 행동때문에 이 세상의 누군가가 죽었거나 죽을만큼 고생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21세기에 사람들은 다큐를 보거나 책을 보는게 또는 진보적 지식인의 말을 듣는게 괴롭다. 왜냐면 그들은 기본적으로 당신은 살인자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세계에 책임이 있다. 그런 책임 안지고 싶어도 이 세상이 그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다. 당신이 자동차를 팔건, 그저 전업주부건 학생이건 은퇴한 노인이건 상관없다. 그 새로운 정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당신은 이 세계가 돌아가는 것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분명 아주 많은 구석이 지옥같다! 누군가가 굶어죽고 분신자살하고 길에서 먹고자고 사채이자나 입시경쟁 같은 삶의 고통들에 지쳐서 가족끼리 칼부림을 한 끝에 자살하는 것같은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이 세상에서 벌어진다. 너무나 많이 벌어진다. 그런데 요즘 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은 그런 일들에대한 책임에서 우리 모두가 벗어날 수 없게 한다. 당신은 별일도 안했는데 말이다. 당신은 그저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었거나 삼성주식으로 용돈 좀 벌었거나 가족이 들어가서 살 아파트 한 채를 샀을 뿐인데 말이다.

 

이러한 현실이 괴롭고 골치아프다는 이유로 우리는 종종 그것에서 등을 돌린다. 무감각한 것은 무감각하게 내버려 둔다. 세상의 비참함이 나의 책임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것은 잊자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채를 쓰고 이자가 불어서 빚이 늘고 있는데 그걸 보고 있기가 괴로우니 그냥 잊고 살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느날 당신의 집에 빚쟁이들이 처들어 오고 하루아침에 당신의 생활은 바뀔지도 모른다. 당신이 새로운 관계에 눈을 뜬 그 순간 당신은 과거의 당신이 도대체 무슨 일을 했던거냐며 눈물을 흘리게 될지 모른다. 등돌리는 것이 더 큰 위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세상의 비참함에 등을 돌리면 무슨일이 일어나는가. 예를 들어 테러가 나는 것이다. 쌍둥이빌딩 같은 것이 무너지는 것이다. 나는 테러가 반드시 세상의 비참함때문만으로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테러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지의 벽을 세우면 그 벽 뒤의 폭탄이 터지기 쉽다는 것은 사실이다. 테러는 주로 눈감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생긴다. 어떤 착취와 비극이 정부나 시장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일어날 때 비록 우리가 미국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득을 보고 있을 뿐 스스로 뭔가 행동을 한게 아니라고 해도 그 착취와 비극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그렇게 보이게 될 리가 없다. 무관심과 방조는 그 자체가 범죄행위나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당신이 세상에 등을 돌릴 때 세상이 언제까지 당신의 아픔을 알아주고 합리적으로 움직일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어느날 당신은 똑같은 무관심때문에 너무도 억울하게 당신이 당연히 당신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물론 그것은 나쁜 일이고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당신도 계속 세상에 대한 무관심의 벽뒤에서 살았다면 당신의 항의의 목소리는 설득력이 어느정도 줄어들 것이다. 이번에는 당신이 밟혔지만 사실은 당신도 누군가를 밟았으니까. 그리고 밟힌 사람들에게 무관심했으니까.

 

우리는 세상에 책임을 느끼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이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그보다는 나는 두 개의 결론을 말하고 싶다. 하나는 자본주의의 종말내지 변형이다. 자본주의는 자유시장이라는 그 순수한 원형에서 이미 많이 변형되었다. 시장은 실은 한번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저절로 움직이는 자유시장이었던 적이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더더욱 많이 변형되어야 하고 어쩌면 그것이 자본주의의 종말이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근원적 이유는 바로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두개의 질문에 대한 답이 점점 더 크게 차이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점점 더 자신이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 것에 대해 영향을 강하게 주는 삶을 만들어 왔다. 그것이 비극과 비용을 만들고 자본주의를 변형시키거나 아예 그것을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도 없게 만들 것이다. 자유시장같은 것은 없어지고 지극히 정교하게 설계된 시스템이 등장한달까. 기술이 한계를 극복하고 자유를 넓힌다면 인간은 그것을 제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인간은 그 가능성속에서 지옥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도 기술이 극복하는 한계때문에 전체적으로 세상은 더 많은 자유를 가지게 된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가 만드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좀 더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살하고 멸종하는 생물이 될 것이다.

 

또하나는 질문만 있고 그 답은 좀 더 애매한 것인데 우리는 반대의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술의 도움을 통해서 인간의 유전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인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세계를 좀 더 잘 안정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게 가능할까? 앞의 결론이 사회적 구조를 인간에게 맞추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시켜서 사회적 구조가 더욱 빨리 진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기술을 통해서 서로 서로 새로운 형태로 연결되어질 수 있을까? 뇌를 생각해 보자. 인간은 동물들보다 지성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뇌세포하나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인간의 뇌세포가 뛰어나서 돌고래나 지렁이보다 지성이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뇌가 동물의 뇌와 다른 것은 엄청나게 많은 뇌세포가 다르게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단시간에 유전적으로 크게 진화할 수는 없다.그러니까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되는 사회적 망에 대해 그렇게 해서 더욱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보면 한국사회를 포함한 여러사회가 순전히 멍청이 처럼 비합리적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이걸 극복할 수는 없을까?

 

인간이 연결되는 방식이 바뀌어서 사회가 더 합리화된 예가 있을까? 물론 있다. 사실 자본주의 자체가 그 예중의 하나다. 우리는 화폐라는 것을 발명해서 거대한 규모의 인간들이 소통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명했다. 화폐는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이 거대한 시장속에서 소통하고 협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 우리가 쓰는 문자도 인간관계를 바꾼 예의 하나다. 글로 기록된 정보가 있고, 합의 된 법을 글로 적음으로써 인간은 전과는 다른 사회를 만들었고 그 한계를 뛰어넘었다. 우리는 다시한번 화폐나 문자의 사용같은 것 이상으로 인간 사회를 바꿀 것을 찾을 수 있을까? 있다면 그게 뭘까?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게 될까?

 

짧게 말하면 그 답은 나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큰 기대를 걸지만 적어도 그게 답의 전부는 아닐 것같다. 하지만 문제를 보다 명료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재미삼아 몇 자 더 써보자.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공평하다던가 상식적이라던가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규칙과 우리 행동의 의미를 제공할 문맥에 달린 것이다. 즉 목적에 따라 그 목적을 위해 인간관계는 재조정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소비가 그 답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생산하고 소비하기 위해 사회를 개조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우리가 해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사회적 개인, 개인의 권리, 개인적 소유라는 개념을 명확히 하고 강화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족이든 이웃이든 친구든 우리의 행복은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에 크게 달려 있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좋은 가족, 좋은 이웃과 함께 살 수 있는 곳이다. 이것은 물론 작은 공동체의 중요성을 암시하는 것이지만 나는 개인의 각성이랄까, 개인의 감수성의 증대랄까 혹은 개인의 정신적 강화랄까 하는 부분을 더 강조하고 싶다. 개인이 자신을 지킬 수 없으면 사회도 성장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새로운 세계에는 자신을 잘 찾고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자기를 찾고 지킨다는 것이란 내게 중요한 것이 뭔가를 고민하고 선택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억하는 것도 자기를 찾고 지키는 일이다. 우리가 이런 자기를 기억하고 지킬 때 세상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도 완전히 무관심해 지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나란 곧 내 통장의 잔액이며 따라서 그것을 키우고 지키는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우리가 뭘 찾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해야 할 고민이 많다. 나는 그 최종적 답이 이것이니 이런 사람이 되자고 여기에 적고 싶지는 않다. 그 이전에 우리 모두 그것이 뭔가 고민하는 것이 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민하고 성장하고 기억하는 일 자체가 우리의 핵심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를 자꾸 돈의 노예로 만들고 정해진 게임의 노예로 만들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사고하는 인간이 필요하다.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고 소유하는 것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너무 오래 노출 된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순수히 좋은 게 뭔가라는 것에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21세기 기술의 힘은 날로 강해지고 있다. 인간 자체의 힘이 강화되지 않으면 큰 비극이 생기기 쉽다. 아니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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