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우리가 서있는 곳은 어디인가.

by 격암(강국진) 2014. 10. 23.

2014.10.23

비행기 위에서 이 글을 읽는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대개 지금 땅이나 건물에 발바닥을 대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 위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적 발전과 멀티미디어의 발전 덕분에 우리는 좀 다른 관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에 나가 본 적이 없지만 지구를 상징하는 거대한 구체를 떠올리고, 진공속에 떠있는 그 구체위에 9시 방향이나 5시 방향으로 서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무한회귀의 문제라고 불리는 것과 합쳐서 생각하면 우리는 과연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무한 회귀의 문제는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100층 아파트의 80층에 사는 주민이 생각했습니다.

 

80층은 누가 떠 받치고 있지?

 

그 답은 물론 아래의 79층이지요.

 

그럼 79층은 누가 떠받치고 있지?

 

답은 물론 또 그 아래의 78층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래서 논리적 모순에 빠졌습니다. 결국 이런 식으로 나가면 항상 그 아래가 있는 것인데 땅이 우리 밑에 있다면 그 아래에는 뭐가 있다는 말인가하는 질문이 나오고 그 아래에 거북이나 코끼리가 있다고 한들 또 그 아래는 뭐냐는 무한히 계속되는 질문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런 생각 혹은 이런 무한회귀의 바깥 쪽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는 우주에 그저 떠있으며 지구바깥에서 보면 위도 아래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 냅니다. 위 아래는 남과 북처럼 지구안에서 통하는 개념입니다. 어떻게 보면 백층위에 99층, 98층이 존재하고 맨위에 지구가 존재하는 그림, 아파트가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것같은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 80층을 79층이 떠받치고 있다는 말, 아래나 위라는 말은 애매한 말이거나 어떤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이제 무한회귀의 문제가 자주 등장하는 본래의 문제영역으로 즉 우리의 생각의 영역으로 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아주 비슷한 것을 어떤 논리적인 건물에 적용해 봅시다. 한국의 부동산이 너무 비싸게 느껴집니다. 그건 무엇때문일까요? 누가 그 원인은 A다라고 말했다고 해봅시다. 그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만 조금 이따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 묻습니다. 네 말은 맞다. 하지만 너는 A가 B때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라고 지적합니다. 대화가 이 정도쯤에 멈추면 좋겠습니다만 좀 이따가 다른 전문가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떤 책을 쓴 저자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부동산이 비싸게 된 이유는 이제 어떤 논리적 건물위에 서게 됩니다. 맨위에는 부동산이 비싸게 된 이유라는 질문이 서있고 그 밑에는 A가 있고 그 밑에는 B가 있고 그 밑에는 C가 있고 하는 식으로 해서 부동산이 비싸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을 상징하는 건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의 건물은 다른 사람이 세우면 다르게도 서기 때문에 하나의 질문에 대해 하나만 서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건물이건 대개 그 건물의 아래 단계는 당연히 그 단계보다 좀 더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서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경제적 이득을 추구한다 같은 것이 경제적인 질문을 답하는 논리적 건물의 아래 단계 어딘가에서 금리가 오르면 부동산 경기가 나빠진다 같은 단계보다 밑에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맨 처음에 말했던 진짜 건물의 문제와 부동산이 비싼 것을 설명하는 논리적 건축물에는 적어도 한가지의 공통점과 두가지의 차이가 있습니다. 공통점은 이유에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 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래층 밑에는 또 아래층이 있듯이 이유밑에는 그 이유의 이유가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그런데 그건 왜 그런대? 하고 질문할수 있습니다. 하나의 이유를 알고 아 그것때문이구나 하고 만족해 버린 사람은 사실은 어느정도 스스로를 속인 것입니다. 누가 죽었대 라고 하는데 왜? 하니까 칼에 찔렸다는대 라고 말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끝낸 것이죠. 누가 그 칼을 찔렀는가는 안 물어보고도 자신이 상황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칼을 찌른 사람이 김영숙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 이 지점에서 아 그렇구나라고 끝낼 수 있지만 사실 여기서도 우리는 그런데 왜 그 사람은 왜 그랬대?라고 또 질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가지의 차이점 중 첫번째는 확실성입니다. 건물의 경우는 우리가 우리의 눈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80층밑에는 79층이 있다라는 사실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설명의 건축물에서는 각 층마다 과연 앞의 것의 원인이 이것인가라는 의문이 있거나 적어도 훨씬 더 큰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수학적으로 전개되는 설명은 훨씬 튼튼하지만 일상어로 만들어진 말로 전개되는 설명은 훨씬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여지가 남는 것이죠. 제 아무리 하버드 대학교수가 말하던 노벨상 수상자가 말하던 인간이 저지른 어리석음의 역사를 보았을때 그것은 절대적 진리 근처에도 갈 수 없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수학적 논리처럼 상대적으로 훨씬 확실해 보이는 것도 있지만 말입니다.

 

논리적 건물은 그러므로 길어질수록 신뢰성이 아무래도 약해집니다. 마치 벽돌이 튼튼해도 철근이 아니라 벽돌로 백층짜리 건물을 지으면 벽돌의 내구성이 부족해서 무너지듯이 단계단계가 그럴듯해도 그걸로 긴긴 설명을 만들면 사실 그 신뢰성을 알 수 없는 소리가 되는 것이죠.

 

더 중요한 차이점은 두번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글의 핵심입니다. 건물의 경우에는 우리는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볼수 있는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동산이 비싼 것을 설명하는 논리적 건축물을 떠나서 완전히 바깥에서 그 설명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누구나 한국이라는 관점 바깥에서 외국의 관점으로 한국의 시장을 보거나 아예 자본주의라는 관점을 떠나서 여러 가능한 경제 시스템중의 하나로서 한국의 시장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사진으로 보여주기 쉽지만 단계 단계의 논리적 설명들로 이어져 있는 시스템의 완전히 바깥에서 저러한 설명의 기본적 패러다임은 이러저러하므로 그 안에서 보면 그게 다 설명인 것같지만 바깥에서 보면 하나마나한 헛소리입니다라고 보여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패러다임을 벗어난다는 것은 말들의 의미를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는 '위'라던가 '아래'같은 말이 아주 생생한 실체로 느껴지지만 그 패러다임을 벗어나면 그 말들이 제한적인 의미만 가진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죠. 우리는 온도라는 것을 생생한 실체로 생각하지만 원자를 고려한 물리학 수준이 되면 온도란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온도란 추상적인 말이 됩니다. 통계가 적용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학 이전의 시대에는 주술도 생생한 현실이었을 것이며 주술의 언어로 구성된 설명도 의미가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하나의 설명에 나오는 '위'라던가 '아래'같은 말이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런 방식의 생각의 패러다임을 벗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지구를 지구 바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뭔지 안다는 것이죠.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설명해 줘도 그 사람에게는 생생한 실체인 것이 왜 허구라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구 바깥에서 보는 관점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설명자체가 필요없거나 너무 뻔해서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이야기처럼 들리게 됩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아는 지금도 우리는 땅이 아래에서 단단히 우리를 받쳐주고 있다는 느낌을 이렇게 생생하게 느니까요.

 

이 글은 아파트 구조에 대한 것도 아니고 부동산 시장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다른 몇몇 글이 그렇듯이 정말 이게 전부인가하는 느낌, 그 위화감에 대한 것입니다. 지구가 둥근지 모르는 사람은 지구바깥의 관점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가 우리의 위치에 대한 최종적 진리에 도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지구가 둥글던 평평하던 우리가 느끼는 공간이라는 것은 뇌가 만들어 낸 공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지구바깥에서의 관점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관점을 넘어서는 관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는 우리의 의식속에 있다는 거지요.

 

그렇다고 여기서 무슨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는 항상 유한하고 모르는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땅위의 관점을 넘어서는 지구바깥의 관점을 알아도 아직도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관점이 있고 결국 유한한 우리는 우리가 그 바깥쪽을 모르는 어떤 관점 안에 갇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관점의 바깥쪽, 그 패러다임의 바깥 쪽이 뭔지 모르기에 그런게 어떤 건지 상상도 못합니다. 그것은 내 아파트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 내 발이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내 아파트의 가격과 가치란 건 어디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줄 수 있는 것인데 말이죠.

 

어린 아이에게 '너 게임기 줄게 나 따라가자'라고 말하며 유혹하는 유괴범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관점에서 게임기의 가치와 자기 일상의 가치는 제대로 비교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구바깥에서 지구를 보는 사람처럼 어른들은 유괴범에게 유혹당하고 있는 어린 아이를 보면 답답합니다. 그 아이는 자기가 어떤 입장에 있는지를 모르니까 말이죠. 그러나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진짜 질문은 이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아는 걸까요?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서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요? 알고 있다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요?

 

 

'주제별 글모음 > 무분류 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세기형 인간의 새로운 관계  (0) 2015.01.19
잡담에 대한 잡담  (0) 2014.12.12
철학공부의 어려움  (0) 2014.10.17
내 마음 나도 몰라  (0) 2014.10.15
무지의 이론  (0) 2014.10.1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