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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내 마음 나도 몰라

by 격암(강국진) 2014. 10. 15.

2014.10.15

한국에서 별로 강조 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일관성이다. 물론 사람들이 일관성을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을 리는 없지만 그 중요성에 대해 정말 깊이 느끼는 것인지에 대해 나는 종종 의문이 든다. 그 결과로 생겨나는 여러가지 비극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일관성에 대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일관성이 없다는 것은 물론 고의로 그렇게 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그런 걸 무시하는데 익숙해져서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다는 것이고 그렇게 한 결과 내마음 나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 마음 나도 모르면서 사는데 비극이 안생길 리가 있는가?

 

무슨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인간이 짐승보다 더 잘사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기억을 하고 나아가 글로 적어서 자신의 삶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내일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을지라도 오늘 장사밑천을 다 먹어치우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겠다라는 식으로 살면 비극이 안생길 리가 있는가? 보는대로, 몸의 반응하는 대로 사니까 짐승의 삶이다. 생각없이도 저절로 행복한 삶의 일관성이 유지되는 경지의 사람들도 있겠지만 공부도 안한 보통 사람들이 그런 걸 따라하다가는 짐승으로서의 삶의 일관성이 유지될 것이다.

 

그렇지만 일관성이 없다라는 것을 한국에서는 오히려 사람이 그렇게 빡빡해서는 안된다, 세상사는 법을 모른다 라는 식으로 표현해서 권장하는 분위기가 있다. 흔히 한국 사람들도 자신들을 스스로 가리켜 한국에는 대충대충 하는 면이 있다고 한다. 그 대충대충이라는 표현은 일면으로는 비판적인 말같기도 하지만 실은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왜곡하고 미화하는 말로도 쓰인다. 즉 나는 너그러운 사람, 나는 쩨쩨하지 않은 사람 뭐 이런 이미지를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내가 좀 대충대충이고 덜렁대기는 하지라고 말할 때 그들은 그 안에 내가 일관성이 없지라는 것을 포함시켜서 문제를 미화하고 변질시킨다. 언제나 일관성을 파괴할 여지를 남기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쩨쩨하다던가 사람이 차갑다던가 매정하다던가 하는 식으로 표현해서 오히려 핍박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생겨난 차별이며 부패며 싸움이 세상에 가득해도 사람들은 남이 하면 부정부패고 내가 하면 인간미 있는 삶의 자세로 말한다. 그러나 과연 정말 일관성있게 산다는 것이 반드시 사람이 쩨쩨한 것일까? 일관성이 없다는 것은 대단한 폭력을 휘두르며 사는 것이 아닌가?

 

일관성이라고 하니까 먼저 생각나는 것이 집단에서의 리더의 역할이다. 예를 들어 가족에서의 가장의 역할이다. 가장의 역할이 무엇인가. 나는 첫번째 역할은 듣고 살피는 거라고 생각한다. 가장은 가족들이 어떻게 사는지, 요즘 상태가 어떤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듣고 살펴야 한다. 왜 그런가. 바로 집안 전체에 일관성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같은 사람이 듣고 기억하고 판단하니까 집안에 일관성이 생기고 규칙의 일관성이 생긴다.

 

집안에 일관성을 제공한다는 것은 오늘은 이 사람이 이렇게 희생하고 양보했으니 내일은 저 사람이 양보하고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공평하다는 기준을 제공한다. 물론 이 기준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찾기는 불가능하거나 어렵겠지만 아예 기준이 없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

 

시장에 나가서 물건을 사려고 하는데 아주 비싸게 물건을 판다면 유감이지만 더 나쁜 것은 기준없이 파는 것이다. 즉 누구에게는 비싸게 팔고 누구에게는 싸게 판다. 오늘은 비싸게 팔고 내일은 싸게 판다. 가격이 이렇게 제멋대로면 사람들은 당연히 제일 좋은 거래조건으로 사려고 머리를 쓰기 마련이다. 가격이 고정되어 있다면 단순히 필요할 때 그냥 살 것을 이런 저런 정보를 모으고 단계를 거쳐서 인맥을 써서 거래를 하려고 한다. 그렇게해서 생기는 일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가격은 가격대로 비싸지는 것이다. 중간단계에 끼어드는 사람이 많아지니까 그럴 수 밖에 없다.

 

공동체의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일이 생긴다. 사람이 남을 도와주는 것이 반드시 보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나중에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이렇게 내가 양보한 것이 도움이 되겠거니 하는 생각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아무래도 행동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제 줄 안서서 이득을 올린 사람이나 얌전히 줄서서 손해본 사람이나 오늘도 똑같은 처지에 있다면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줄서는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커다란 집단에서 일관성을 제공하는 것은 법과 제도이지만 그래도 거기에서도 사람이 사람을 살펴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이 안중요할 리가 없다. 하물며 무슨 법이나 재판소도 없는 가족과 같은 작은 집단에서 집안일의 내부적 일관성을 담보해줄 가장이 없으면 집안일은 그야말로 배가 산으로 가기 마련이다. 자칫하면 가족이 세상에서 제일 원수같은 사람이 된다.

 

일관성이 쩨쩨한 일처럼 보일 때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걸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은 법없이 무법천지로 사는 세상이 좋다는 것이고 상도덕도 없이 아수라장처럼 다른 사람과 거래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깡패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게 호쾌한 것인가?

 

물론 여기에도 정도문제가 있기는 하다. 우리는 무한한 일관성과 정의를 주장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일관성이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일관성이라는 것에는 삶의 복잡성이라던가 삶의 경계 같은 개념이 필요하다. 그걸 아는 사람의 일관성이란 결코 쩨쩨하지 않다. 나는 정의란 항상 어떤 공동체를 전제하고 그 공동체 안에서의 정의를 말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말해왔다. 이것은 거의 같은 말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한계를 논하기에는 너무 일관성이 부족하다.

 

일관성을 논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고 항상 일관성이 있는지 없는지 따지고 사는게 힘에 부친다고 하자. 사실 나를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유혹에 약하고 힘들면 쉬고 싶어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은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삶을 되도록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경계를 넓힌다는 것이다.

 

좋은 아버지나 좋은 남편이 될 섬세함도 없는 사람이 이장이 되고 시의원이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면 어쩔 것인가? 이제 그 사람은 더 넓은 세상을 두루살피고 그 안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바로 부패하고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본인이 선의를 가지고 있어도 그렇다. 왜냐면 자기 눈에 안보이는 것이 많고 자기 눈에 보이는 사람만 도와주니까 그렇다. 지인만 도와주고 이익을 취하는 것이 부패한 권력자가 아니면 뭐겠는가.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누굴 도와주면 그럼 한국 사람중에 남남인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다른 한국사람들은 적인가?

 

호랑이도 물에가면 힘을 못쓰고 젊고 힘이 넘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어리고 병들어 힘이 없는 때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 따라, 또 자신이 지금 어쩌다 가지게 된 능력에 따라 제한된 범위안에서만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살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범위는 어떨 때는 클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작을 수도 있다. 백년뒤의 사람들이 보면 천하의 뛰어난 인재라고 해도 시대가 받아주지 않아 그 사람의 말이 통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저 자기 몸이나 돌보고 자기 가정이나 돌보는 것에서 끝날 것이다. 한때는 힘과 정열이 넘쳐서 세계나 국가를 논할만한 사람이었더라도 또 어떤 시기를 지나면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자기 삶의 범위가 자기의 역량을 넘쳐나게 되는 지를 우리는 살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일관성을 지킬 수가 없다. 일관성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나 스스로에게나 비극을 만든다는 것이다. 내가 아내에게 자주하는 말이 있다. 열번의 성공이 한번의 실패를 이기지 못한다. 한번 비극을 만들면 그것은 영원히 회복할 수 없거나 매우 힘들어서, 두고두고 그때 그렇게 한번 한 걸로 내 인생은 파탄이 났다고 후회하는일도 생기기 마련이다.

 

능력이 넘치는데 삶이 단순하고 그 경계가 작으면 그 사람은 일관성을 아주 여유있게 지킬수가 있다. 그 반대로 능력이 안되는데 세상을 한없이 복잡하게 살면 그 사람은 일관성 따위는 포기하거나 아니면 아주 쩨쩨하게 살아야 한다. 여유있는 일관된 삶이 안된다는 것은 마치 사업을 하는데 빚을 너무 많이 빌려서 시작한 관계로 항상 돈에 쫒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업이 곧 돈에 쫒기는 것이 아니듯 일관성 자체가 곧 여유가 없고 쩨쩨한 것이 아니다. 공부도 안하고 능력도 안되면서 사방에 관여하여 시시비비를 따지면 일관성없는 인간이 되거나 쩨쩨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둘러보면 자기를 살피고 자기 삶의 일관성을 소중히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그런게 뭔지 들어도 본 적이 없어 보이는 사람으로 세상은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뛰어난 능력이라도 한없이 경계를 넓히면 결국 파탄이 나고 말 것인데 무조건 경계를 넓힌다. 자기 삶을 돌아보지는 않고 이 사람 저 사람의 일에 관여하는데 바쁘고 더 많이 가지려고만 한다. 삶의 일관성 따위는 애초부터 관심도 없으면서 출세하려고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 세상에 악이란 것이 있다면 이게 악의 탄생이다. 태어날때 악인이라고 태어나서 악인이 아니라 눈이 안보이면서 시장통에서 전력질주 하는 사람이 바로 악인이다. 다른 사람들과 부딪혀서 상처를 안 줄 방법이 없다. 스스로도 상처를 안 받을 방법이 없다.

 

비극은 또 있다. 일관성을 무시하며 산다는 것은 스스로를 괴롭힐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도박에 인생을 망친 사람이 너무나 도박을 저주하면서도 틈만 나면 다시 도박하러 가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이 실수를 하면서 살기는 하지만 먹고 살기 힘들다면서, 외롭고 인간미가 없는 세상이 싫다면서 자기들의 돈과 기회를 빼앗고 그들을 더욱 외롭게 만들 정치인에게 굳은 신뢰를 보내는 사람들은 대개 일관성의 문제가 있다. 그들은 대개 글을 쓰지 않고, 사색하지 않는다. 그래서 배가 고프다고 말하면서 자기 음식을 빼앗아 가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때로는 눈뜨고 보기 어려운 처량한 광경을 연출한다. 이게 비극이 아니면 뭐가 비극일까?

 

서로 돕고 사는 일에도 일관성이란 중요한 문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인생의 일이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뭔가를 했을 때 그게 남을 돕는 일이 되는 것인지 남을 망치는 일이 되는 것인지 우리는 종종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많은 일이 무의미하게 되는 것은 일관성덕분이다. 우리가 서로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서로 자기의 힘이 닿는 곳까지만 인생의 범위를 유지하면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그러면서 서로 이야기하면서 돕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서로 돕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운 한가족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편해지고 풍요로워 질 것이다. 마치 같은 교통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교통법이 서로 다르면 양보운전도 못한다. 삶에 일관성이 없다면 돕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다. 도박에 미치거나 알콜에 중독되어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을 이왕에 가족이라면 버릴 수는 없겠지만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운명공동체로 산다고 생각해 보라. 과연 그렇게 할 수 있겠는지. 그게 쉽겠는지. 돕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삶의 일관성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정상이라고, 자기는 집의 전세값 빼내서 도박하는 그런 미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관성에 대한 고민 한번 안해본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정상적이라는 것의 정의가 뭐가 되건 일관성이 없는 것은 정상이 될 수가 없다.

 

요즘 시대는 절대적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시대다. 그래서 더더욱 일관성은 소중한 합리성의 기준으로 남아있다. 그 가치가 더더욱 빛이 나는 시대다. 일관성이 뭔지를 고민하는데 실패하면 이상한 사이비종교나 이상한 투기, 노름, 싸구려 이데올로기에 빠지거나 어떤 기준으로도 부도덕한 인간이 된다. 한국 사회에서 일관성을 가볍게 생각하는 풍조가 있는 것이 안타깝고 두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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