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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무지의 이론

by 격암(강국진) 2014. 10. 14.

2014.10.14

무지하다라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모른다고 했을 때 우리가 모르는 그 뭔가가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 그게 뭔지 모르므로 그것이 중요한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중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른다는 것에는 약간 혹은 완전히 다른 질문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무지하다는 상태를 자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즉 특정한 어떤 지식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지하다는 상태를 자각하는 것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의식의 존재는 예측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보자. 신경생리학자인 로돌프 리나스는 꿈꾸는 세계의 진화라는 책을 통해 뇌의 존재이유는 예측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책에서 멍게의 예를 든다. 멍게는 유생상태일 때는 송사리처럼 헤엄치면서 수영한다. 이 단계에서 멍게는 뇌처럼 보이는 기관을 가지고 있는데 일단 어딘가에 유착되어 움직이지 않게 되면 스스로 그 뇌를 먹어치워 소화시켜 버린다. 적극적인 운동이 없어지자 뇌가 없는 생명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것이 운동을 하지 않는 나무는 뇌가 없고 운동을 하는 동물은 뇌가 있는 이유다. 뇌는 많은 것을 상상하고 기억하고 예측하게 만들어 주는데 뒤집어 말하면 그런 것이 필요한 환경에 존재하는 생물, 다시말해 움직이는 생물은 뇌를 유지할 필요가 있고 그렇지 않다면 뇌는 필요하지 않은 기관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것도 연구하는 상태에 있으므로 의식이 뭔가에 대한 확고한 답을 가지고 의식을 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뇌와 의식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의식이라는 것도 불확실과 예측 다시 말해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 몸 안의 많은 것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계단을 걸어올라갈 때 다리를 움직이는 것처럼 자기 심장을 의식적으로 움직이기는 어렵다. 비록 어떤 것을 상상하는 것으로 심장의 활동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반면에 우리가 어딘가에서 산책을 하면서 사색에 잠길 때 어느새 우리의 다리는 거의가 아니면 완전히 무의식적인 상태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론 호흡을 하는 것도 다른 예다. 땀을 흘리거나 침을 분비하는 것도 우리는 이런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지와 불확실성이 없는 곳에서는 의식을 잃어버린다. 

 

생각해보면 나라는 개념자체가 무지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가 눈을 감으면 세상은 어두워진다. 눈을 뜨면 세상이 밝아진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갑자기 세상에 개기일식이나 정전이 일어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몸안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눈꺼풀의 움직임을 느끼기 때문 만은 아니다. 나라는 존재가 눈꺼풀을 움직인다는 것이 더 간단하고 그럴듯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랜 동안 경험을 통해 이 세상이 그런 곳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것은 전부 타고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3세 미만의 아이는 누군가가 상자뒤에 숨으면 그 사람이 상자뒤에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고 한다. 즉 시공간의 사건들이 어떻게 연속적으로 일어나는지를 아직 학습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른은 이미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서 공을 하늘에 던지면 그 공이 어떤 궤적을 따라 허공을 날아갈 것인지를 미리 안다. 자전거타기를 배우고 댄스를 배우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태양은 전등처럼 꺼졌다 커졌다 하기는 어렵지만 우리의 눈꺼풀은 자주 열고 닫힌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세상의 상황을 그럴듯한 예측을 가지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 해석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종종 버스안에서 착각상황에 빠진다. 두 대의 버스가 나란히 있다. 그리고 당신은 한쪽 버스에 앉아서 다른 버스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당신의 버스가 뒤로 물러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우리의 버스가 아니라 다른 버스였다. 이것은 세상이 통째로 움직일때 세상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가능성보다는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가능성이 더 그럴듯하기 때문에 생기는 환상이다. 그래서 몸으로 버스의 떨림을 느낄수 있는데도 그런 증거들이 무시되고 내 버스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예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그럴듯하게 여기게 된다.

 

나라는 것은 불확실과 예측 즉 무지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우리가 길을 걸으면 세상이 움직인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발견한다. 만약 우리에게 보이는 세상의 움직임을 세상이 그렇게 위로 아래로 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 필요도 없고 따라서 알지도 못할 것이다. 매일 밤 잠을 자면서 경험하듯이 우리는 의식없이도 살아있을 수 있다.

 

우리는 세계의 움직임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나라는 요소를 창조해 낼 필요가 있으니까 나라는 존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크게 줄여준다. 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나라는 것이 존재해도 그것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데로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은 여기서 아직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를 이러저러하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에 대해 훨씬 더 간단한 묘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라는 존재를 의식하게 되는 이유라는 것이다. 

 

육체라는 의미에서의 나라던가, 진정한 나라던가 하는 것이 존재하는가, 어떻게 존재하는가하는 질문은 흥미롭지만 그보다 먼저 던지게 되는 질문은 우리가 발견한 나, 우리가 의식하는 나를 우리는 왜 그렇게 의식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행동, 운동과 같은 일이 만들어 내는 불확실성과 무지의 자각이 더 많은 것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의식된 존재로서의 나는 그냥 존재하는게 아니라 어떤 무지를 의식해야만 그 부분이 생긴다. 공간속을 움직이고 있고 따라서 공간속의 불확실성과 무지가 존재하니까 그 안을 움직이는 나라는 부분이 생긴다는 말이다.

 

사과가 사과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관찰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사과의 욕망이나 자유의지를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사과를 먹는 자기 자신을 볼 때 우리는 욕망하는 나, 자유의지를 가진 나를 발견한다.  그것은 똥이 아니라 사과를 먹고 싶어하는 나다. 왜 똥이 아니라 사과를 입에 집어넣는 일이 벌어질까? 그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은 사과를 좋아하는 나라는 존재가 사과를 선택하고 이 몸을 움직여서 사과를 집어 입에 집어넣기 때문이다. 결국 사과를 먹는다는 행동과 관련된 불확실성과 무지가 나의 어떤 측면을 만들어 낸다. 가능한 많은 것들이 있는데 나는 이러저러한 제한된 행동을 한다. 그 이유는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생리학적 특징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로지 관념적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우리에게 어떤 음식은 맛이 없고 어떤 것은 아예 삼킬 수도 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비슷하다. 우리는 사과를 입에 넣고 그 달콤한 맛을 느끼기에 그것을 다시 먹는다. 위에서 한 말은 그래도 실재와 의식은 좀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 네모난 구멍이 있다. 이 구명에는 둥근 막대는 안들어가고 네모난 막대는 들어간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이 구멍의 형태때문이다. 이제 이 구멍에 네모난 막대를 넣기를 계속한다. 이렇다고 할때 관찰자인 우리에게 자아를 가진 구멍이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구멍은 자기에게 계속 네모난 막대가 들어오면 가장 쉬운 설명으로 네모난 막대를 좋아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의식한 세계와 나는그것이 아무리 진실과 가깝고 그럴듯해도 여전히 하나의 커다란 설명이고 가정일 뿐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다보면 우리는 통상의 경험적 과학이나 전통적인 과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전통의 과학은 변화하지 않는 관찰자를 상정한다. 그래서 세계를 관찰하고 그 관찰의 결과를 모으고 일반화해서 이세계에서의 자연의 법칙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 곧 경험이며 경험이 관찰자 자체를 변화시킨다면 똑같은 경험을 해도 이제 똑같이 보이지 않게 된다. 이런 상황은 일상경험에서는 많이 일어난다. 첫사랑을 할 때와 열번쯤 연애를 해보고 같은 데이트를 할 때 느낌이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그러므로 연애는 통상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해진다. 우리는 여기에 주관성이 있으므로 라고 말해서 연애가 과학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유를 '당연한 것'이라고 숨겨버린다. 하지만 실은 이것은 과학의 근간인 경험론의 기초자체가 그래서 그렇다. 

 

과학은 관찰이나 경험이 관찰자를 바꾸지 않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나의 발견이란 완전히 그 극대점에 있다. 우리는 세계를 관찰하고 특히 우리의 무지를 느끼는 만큼 자기를 발견한다. 어떤 사람이 뭔가를 깨닫고 느끼면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 아침에 거리로 나와보니 이 세상은 전혀 바뀐 것이 없는 것같은데 전혀 달라보이더라 같은 이야기는 흔하다. 그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어떤 부분의 무지에 대해 자각하거나 어떤 부분의 무지를 망각하게 됨으로써 어떤 부분의 자아를 창조하거나 어떤 부분의 자아를 상실한 것이다. 체험은 자아의 상실을 가져올수도 있다. 우리는 깊은 좌절이 깊은 확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안다. 즉 이제 이러저러한 것은 절대 바뀔 수 없다라고 깊이 확신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아의 어떤 부분에 관한 무지를 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관해 재미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문제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을 쪼개서 이것은 과학, 저것은 정신과 상담의 문제나 문화나 문학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뉴튼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은 자아발견과 상관이 없는 것일까?

 

다시 강조하지만 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상상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똥은 싫어하고 사과는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생리학적인 구조의 결과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주를 볼 때 우리가 그것을 보는 방식들이 모두 서로 동등하게 가능한 것이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jpeg 형식의 사진파일을 텍스트 편집기로 열었을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컴퓨터 스크린이나 프린트된 종이위에서 그림의 형태로 보는 것과 정보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인간의 눈과 뇌는 컴퓨터의 도움이 없으면 텍스트 편집기로 보는 jpeg파일을 보고 그 안의 이미지를 읽어내기 어렵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망원경이나 현미경없이 멀고 먼 별의 모습을 보거나 작은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jpeg 형식의 사진파일은 컴퓨터가 존재하기때문에 우리에게 그림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동역학은 인간이 수학을 발명하고 인간이 문자와 인쇄술을 발명하여 세계에 대한 관찰결과를 기록하는 기술이 좋아진 상황에서 즉 새로운 도구로 세계를 보는 상황에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 로마신화, 기독교의 신화를 버리고 데카르트의 마음과 이원론의 신화를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실제로 인간은 오랜동안 유클리드기하학의 증명은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이것은 보기만 하면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진리다. 기하학은 인간이 확고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20세기를 거친 지금 우리는 이것이 그저 강력한 믿음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 버스가 움직이고 있다고 믿었는데 다른쪽 버스가 움직이고 있었을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는 여전히 여기에 애매한 점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실험에 의해 과학은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과학의 압도적 유용성과 힘은 무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귀납적 진리란 없다 같은 말이 아니더라도 앞에서 말한 자아의 변화측면에서도 우리의 이론들이 뭘 의미하는 가하는 것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누군가가 딸기가 보라색이라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했다고 하자. 그 사람이 딸기를 보니까 보라색으로 보인다. 누군가가 나는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자. 그 사람은 너는 제대로 보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눈에 색안경을 씌운 후 봐라 딸기는 보라색이지, 실험적인 증거가 아닌가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색안경을 쓰는 행위는 곧 지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문명화되는 행위로써 당연한 것일지 몰라도 과연 이런 증명이 언제나 정당화 될 수 있는것일까? 과학을 과학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그건 자기순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 이런 말장난들이 도대체 뭐에 쓸모가 있다는 것인가.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그리스 로마 신화만큼이나 신화적인 것이라고 해서 뭐가 문제인가. 그렇게 믿는다고 이 세상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이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세상에는 문제가 너무너무 많아서 이 지구가 곧 멸망할 것처럼 떠드는 게 사실이다. 문제가 없기는 커녕 문제가 너무 많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렇게 말하면 그 사람들은 과학이나 진리의 문제와 경제 문화 도덕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들이 맞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정말 서로 다른 문제들일까?

 

나는 컴퓨터와 전자통신의 발전때문에 21세기 인간들이 다시 한번 세계를 전과는 다른 도구를 써서 보게 되었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것이 뇌과학이 발전하고 21세기 들어와서 인식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해 지는 이유일지모른다. 데카르트가 만든 신화는 물러가고 이제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학혁명의 시대이후 공장과 도시라는 공간에 익숙해졌다. 현대의 학교란 결국 공장에서 일할 직원을 만들어 내는 장소를 말하며 그 자체도 공장을 본따서 만들어 졌다. 그곳은 내가 분리가능하고 제한적인 경우라고 부르는 문제를 해결하는 훈련에 집중한다. 사람들은 되도록 믿을 수 있는 부품으로 작동하도록 교육되어진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는 점점 더 여러가지 다른 게임과 생태계가 존재하는 사이버 공간을 중요한 공간으로 여기게 된다. 이곳은 물리법칙이 통하지 않는 곳이고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 규칙의 일관성이 중요한 공간이다. 이러한 변화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 새로운 자아발견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지 모른다.

 

산업혁명이전에는 농사가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종이위에 글이나 쓰고 있는 사람들이 돈을 번다는것은 이상해 보였다. 사이버공간에서의 삶이 중요해 질수록 우리는 지금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낡은 것이 되고 지금은 헛 짓같아 보이는 것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을 보게 될지 모른다. 블로그로 먹고 사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모두 좀 더 작은 규모에서 작은 사회 공동체나개인의 주변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게 더 중요하다. 요즘 글에서 언제나 마지막에 강조하는 것이지만 우린 뉴튼도 다윈도 아니며 각각의 개인들이 좀 더 깨인 존재가 되어야 전체 사회도 좋은 곳이 될수 있다고 믿는다. 즉 더 많은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바뀌는 것,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 세상을 바꾸지 소수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으로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나라는 것은 우리의 무지의 자각에 의해 행동과 욕망의 주체로서 창조되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것이 무조건 집안이 상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게 되자 우리는 결혼 상대자의 선택이라는 상황을 만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선택하는 자아가 탄생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낭만적 사랑을 하는 자아가 말이다. 개인적인 소유를 하게 되자 니것과 내것의 구분이 생겼고 경제적인 욕망을 가지는 자아가 생겨났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정해진 일상에 빠져들고 모든 것을 체념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육체는 겉으로 보기에 차이가 크게 없지만 우리의 자아는 이미 많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는 행동과 구분이란 녀석을 모두 없애야 할까? 그것도 때로 답일수 있을 것이다. 의미없는 구분을 없애는 것이, 세상을 되도록 간단히 사는 것이 문제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자아파괴에 해당하는 것일 수 있고 자아를 끝없이 파괴하는 것이 답의 모든 부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의미없는 구분으로 생겨난 엘리트 의식을 파괴하는 것은 옳지만 엘리트 의식만 없어지면 세상이 좋아질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더 많은 무지의 자각을 통해서 더 자아를 풍성하게 할 때 세상에는 모두가 숨쉬고 살기 편할 만큼의 다양한 공간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아의 어떤 부분이 파괴되고 어떤 부분이 확장될때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는 종종 답이 없는 상황에 빠진다. 답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결정되어져 있다는 말과 거의 같은 말이다. 즉 가능한 선택이 이거 아니면 저거 둘중의 하나같은데 전부 답이 아니다. 따라서 답은 더 이상 추구되어질 필요도 없다. 답같은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니까 말이다.

 

이럴때 내일 일은 어찌 될지 모른다던가, 이걸 왜 반드시 이거라고 확신하는가 같은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종종 화를 낸다. 모르기는 뭘 모른다는 말인가. 이제 무슨 희망이 있다는 말인가라던가 너는 잘 모르니까 그렇지 그런 일은 절대로 할수가 없는 일이다. 니가 뭘 아는가 같은 뾰족한 말이 돌아나온다.

 

진짜 나쁜 것은 그래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선택하는 일이 가장 극단적이지만 그정도까지가 아니더라도 극단적이라고 생각될 선택을 하는 경우는 많다. 사채를 빌린다던가 이혼을 하거나 절교를 해버린다던가 나중에 후회할 폭언을 한다던가 장래의 진로를 갑자기 극단적으로바꾼다던가 다시는 연애따위는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던가 하는 일이다. 그리고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 진다. 무수히 많은 집착과 성급한 결정이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언제나 통하는 방법따위는 없지만 가끔 보면 문제가 아주 허무하게 지나갈 때가 분명히 있다. 그렇게도 큰 일 같았는데 소나무 숲에서 산책한번 하고 따뜻한 햇볕이 쬐이는 호수의 풍경을 한번 보고 나면 도대체 뭐가 문제였는지도 잘 생각이 안날 때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나만큼 팔자좋고 행복한 사람이 없는데 왜 내가 그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쥐같았는지 스스로가 이해가 안갈 때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만들고 우리의 집을 지어야 한다. 이것은 자아의 건설이나 마찬가지다. 오랜동안 공장의 논리속에서 살면서 인간은 돈을 넣으면 노동을 생산하는 자판기처럼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평생직장개념이 사라지고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는 새로운 시대에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이같은 것들을 다윈 이전의 정신적 진화론이라고 부른다. 아직 변화의 마지막 조각이 발견된 것인지 아닌지 알수 없다. 그러나 인지과학이나 뇌과학분야 그리고 전자통신분야의 발전이 계속 됨에 따라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될 수 있다. 이미 새로운 데카르트와 뉴튼과 다윈은 지구 위를 걷고 있다. 자연에는 법칙이 있다는 생각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만들었으니 그 법칙은 우리가 만든다는 세상에서는 우리는 자본주의와도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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