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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세뇌하지 않는 철학을 찾아서

by 격암(강국진) 2014. 10. 13.

2014.10.13

길고 복잡한 철학책을 읽어본 사람은 자연히 느끼는 일이겠지만 논리적 철학 나아가 모든 논리적 설명을 제공하는 이론은 모두 세뇌하는 이론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런 이론들때문에 우리는 때로 더 현명해 지는 것이 아니라 더 바보같아 지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그것은 사실일까? 배움의 본질은 원래 그런 것이니 우리는 그것을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모든 이론과 설명을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진짜 문제가 있으며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지의 이론이라고 불릴 만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더 생각하기 전에 논리적 설명을 제공하는 이론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문제에 대해 정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논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이론에 관한 글을 읽으면 예를 들어 대부분의 서구 철학자들의 글을 읽으면 어느 것이나 항상 어떤 개념들을 도입하고 정의하고 그것들을 통해 세상일이 왜 이렇게 되는가, 왜 이렇게 보이는가를 설명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더 훌룡한 이론이란 대개 가장 최소한의, 가장 분명한 개념을 사용하여 가장 많은 것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그 이론은 이 세상 모든 것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면 적어도 그 이론이 적용되는 범주가 잘 정의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이론은 일종의 닫혀있는 계에 대한 것이다. 닫혀있는 계에 대한 이론은 우리가 모르는 것은 세상에 없다고 전제하거나 어떤 관심의 경계에 대한 선을 긋고 그 바깥에 대해서 우리는 무관심하다고 선언하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이 세상에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있다는 이원론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는 물질적인 것이 있고 정신적인 것이 있을 뿐 물질적이지도 정신적이지도 않은 것이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다. 즉 일원이 있고 이원론이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물질적이라는게 있고 정신적이라는게 있다는 것을 알며 그 밖에 내가 모르는 것도 있다는 식으로 출발하지는 않는다.

 

형이상학의 예를 들기는 했지만 우리는 모든 과학적 이론도 이렇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다. 사실 어떤 설명을 제공하는 이론이란 이렇게 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닫힌 계에 대한 이론을 구축할수 있다면 우리는 인과적인 관계를 쉽게 도출할 수있기 때문이다. 이론은 설명을 제공한다. 즉 주어진 주제에 대한 인과적인 관계를 밝혀서 이러저러한 현상은 인과적으로 이러저러하게 이미 알려진 좀 더 단순하고 기본적인 법칙이나 존재와의 관계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설명의 힘은 전부 다가 아니면 대부분 물샐틈 없는 논증 혹은 인과적 관계를 묘사하는 일에서 나온다. 우리 집 고양이가 죽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상한 음식을 먹은 것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사실은 얼마든지 있다. 이런 식의 말은 대개 가치있는 설명으로, 따라서 가치있는 이론으로, 특히 과학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고양이가 죽은 이유가 상한 음식이 아니라도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닫힌 계에 대한 이론은 어떤 면에서 더 만족스럽다. 그것은 분명한 설명을 제공한다.

 

문제는 이것이 언제나 가능하지 않고 억지로 닫힌 계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 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무지를 잊게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고, 고려하지 못한 무지의 부분이 있다는 것이 망각된다. 설득력있고 강력한 이론 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것이 논리적 설명을 제공하는 이론이 세뇌적인 이론이 되는 주요한 이유다.

 

생각해 보면 모든 가능한 경우가 분명하게 분리되고 다 알려진 경우, 즉 우리의 무지를 포함하지 않은 경우는 매우 쉬운 경우다. 이 경우를 분리가능하고 제한적인 경우라고 말해보자. 다시 말해 분리가능하고 제한적인 경우는 우리가 쉽게 인과적인 답을 찾고 쉽게 이성의 힘을 자랑할 수 있는 경우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방에서 치즈케익이 사라졌다. 그런데 그 방안에 들어온 사람은 강씨와 조씨 두 사람뿐이다. 그런데 강씨는 알리바이가 있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인가는 분명하다. 범인은 조씨다.

 

이런 경우가 아주 쉬운 경우라는 것은 인공지능분야를 포함한 공학분야에서 이런 식으로 알고리즘을 짜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확률론적인 알고리즘을 사용한다는 것으로도 알수 있다. 즉 현실에서는 답이 1에서 4번중의 하나인 경우로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스무고개 놀이로 답을 찾아낼 수 있는 문제는 매우 쉬운 문제다. 답은 대개 정해져 있지 않다. 손으로 쓴 글자를 볼 때 이것은 1B1일 수도 있지만 실은 1131일수도 있고 심지어 그 어느 것도 아닐 가능성도 있다. 똑같은 글자인데도 그 글자들이 놓여진 문맥을 고려하여 다르게 읽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현실적인 문제를 대처하기 위해서는 분리가능하고 제한적인 경우보다 적어도 두가지를 필요로 한다. 하나는 분리불가능한 사고 즉 확률적인 사고다. 이 경우 우리는 배중률을 적용할수 없다. 이것이거나 이것이 아니다라고는 할 수 없고 이것이 답일 확률은 몇%다 라는 식의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하나는 제한적이지 않은 사고 즉 가능한 경우의 확장이 가능한 사고다. 즉 위에서든 치즈케익 사건의 경우 용의자가 강씨와 조씨일뿐 아니라 제3, 제4의 경우도 가능하다고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베이지언 확률계산에서는 프라이어의 수정법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지라는 단어를 통해서 말해보자면 이것은 이 이론이 닫힌 계에 대한 이론이 아니고 우리의 무지가 존재하여 가능한 경우를 계속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이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공학의 응용분야같은 곳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돌아와 인문학적인 철학적인 설명들을 다시 읽어보면 그 내용이 어떠한 가를 떠나 그들은 우리가 공학분야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나는 수학만 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 아무리 정교한 단어정의를 통해서 어떤 문제를 논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일상어를 써서 말을 하는 한 그것은 분리가능하고 제한된 경우를 논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수학적 문자를 써서 확률에 대한 계산을 연쇄적으로 할 경우는 계산이 되지만 일반언어로 뭐뭐 인것같다라는 말을 써가면서 논리를 전개하면 한두단계만 논의를 전개해도 결국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고양이가 죽은 것이 상한 음식때문이었다면 그리고 만약 음식이 상한 이유가 어제밤의 정전때문이었다면하는 식으로 확률적인 불확실성을 가진 경우를 고려하면서 사고를 전개해 나가면 우리는 금방 사고의 균형을 잃는다. 카네만을 노벨상을 받게 한 깨달음이 바로 그것이었다. 카네만의 책, 생각에 관한 생각을 보면 알수있듯이 인간의 머리는 확률계산을 하는데 적합하지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의 가정을 가지고 전개하는 말속에서 속아서 사기꾼에게 쉽게 당한다. 들을 때는 그럴듯한데 냉정하게 수학적으로 가능성을 비교하면 직관적인 느낌과는 너무 다를 수 있다. 일상어를 쓰면서 몇단계를 거치는 확률론적 논증을 하면 그것은 애초에 논증이라고 부를만한 뭔가가 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현실문제는 전부다가 아니면 거의 다 확률론적 사고가 필요한 것이다. 항상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프라이어의 수정에 해당하는 단계, 가능성의 확장이 가능해지는 단계를 일상어를 통한 논증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논리적인 일관성을 포기하는 것에 해당하지 않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시작할 때는 세상에는 1번경우와 2번 경우밖에 없다고 해서 시작해놓고 나중에 그 가정을 뒤바꾼다는 것은 그와 관련된 단어들의 의미가 모두 뒤바뀐다는 것이므로 일반적인 말로 그것을 오류없이 묘사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굳이 이와 가까운 것을 들자면 그것은 선가의 선문답같은 것이나 신비주의자들의 종교적 문답같은 것에 가까워져야 한다. 이런 것은 통상 논리적 설명을 제공하는 이론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런 관찰을 통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굉장히 고상하고 정밀해 보이는 설명을 제공하는 이론도 실은 현실문제의 복잡성을 과소평가한 아주 쉬운 경우를 다루고 있을 뿐이며 그렇게 하는 것에는 물론 그렇게 하는 장점이 있지만 거기에 따르는 단점도 무시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통상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분야는 대개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우리가 모르는 것이 없다는 착각에 빠지게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통상의 철학의 역할은 현실과는 반대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즉 철학, 특히 서구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더 넓은 세상을 더 올바르게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이나 기술적인 발달이 우리의 시야를 바꾸면 철학은 서둘러 바뀌어진 시야만큼을 수용할 뿐 그 이상은 더 많은 것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데 기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즉 철학은 일종의 세뇌와 최면의 안전장치 역할만을 하는 보수적 도구일뿐 생산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현대과학의 철학적 기초라고 말하는 데카르트의 철학은 정확히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그 스스로가 생리학을 연구하고 수학자이기도 했던 데카르트가 걱정했던 것은 과학적 기술적 방향으로의 새로운 진보가 너무 느리다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너무 빨라서 인간의 정신이 균형을 잃고 붕괴할 것을 걱정한다. 갈릴레오가 종교적 권위와 충돌하는 것이 좋은 예다. 이럴 때 세상을 마음과 물질로 나누고 우리가 말하는 과학은 물질에 대한 것이라고 정해주면 교통정리가 된다. 세상으로부터의 비판도 완화시킬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윤리적 교리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물리적 세계에 대한 과학을 마음껏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현대의 신화는 실은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제한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도 하다. 데카르트가 그랬고 플라톤이 그랬듯이 철학자는 종종 동시에 수학자이며 과학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혼란이 있지만 또한 누가 그 철학을 읽는가에 따라 그 효과는 달라지겠지만 철학이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는 분야이며 혁명의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것이며 철학은 항상 혁명의 뒤에서 보수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데에만, 주로 우리의 발전을 제한하고 우리의 눈을 가리는데에만 복무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거듭 강조하지만 어떤 이론을 누가 읽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다. 닫힌 계에 대한 이론은 분명 우리로 하여금 1에서 10까지가 전부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그 이상을 배우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1과2 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은 10까지를 알게 돕는 좋은 도우미가 될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닫힌계에 대한 이론들이 쓸모없고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제한된 의미에서라도 장점이 크다. 단지 단점이 있고 그것은 어떤 경우 치명적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과학도 닫힌계에 대한 이론이며 세뇌적이라고 부를수 있지만 과학의 경우는 우리가 이 세뇌적인 부분에 대해 거의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과학은 수학을 도구로 해서 엄밀하면서도 다양한 경우를 다루기 때문에 그 유용성이 크다. 게다가 언제나 수정되어질 상태에 있을 수 있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이 세뇌적이라는 것을 이미 지적한바 있지만 그것은 철학이나 인문학적인 이론들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이 사소한 문제다. 반면에 일상어를 가지고 이론을 전개해 가는 순수수학이나 이론물리학 이외의 대부분의 분야는 장점은 점점 작아지고 단점은 점점 더 커지게 되는 문제를 가진다.

 

따라서 우리는 무지의 이론이 필요하다. 무지의 이론은 통상의 이론이 우리는 이러저러한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데 집중하는 것에 반해서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주된 역할이 된다.

 

무지의 지적은 쉬운 것같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무지의 자각은 성장과 변화를 위한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무지의 자각은 동시에 의미와 희망을 위한 필요조건이기도 하다.우리는 희망을 위해서, 삶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 의미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삶의 의미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을 그 너머에 존재하는 우리의 무지와 연결시킨 상태에서 바라보는데서 생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이를 키우고 사랑을 줄 때 우리의 삶에 의미가 생겨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이를 통해서 제한 된 삶의 길이를 가진 우리의 삶이 무한의 미래로 뻣어나갈 통로를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에 까지, 우리가 직접해보지 못하는 일에까지 확장되는 것을 우리는 느낀다. 그것이 바로 삶의 의미의 발견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왜 기존의 많은 닫힌 계에 대한 이론이 우리를 답답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한가지 설명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의미와 희망을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다. 가장 혁명적으로 보이는 이론도 그것이 닫힌 계에 대한 이론이라면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을 가두는 가장 튼튼한 감옥이 된다. 그리고 그 감옥을 탈출하는 것이 어려워 보일수록 우리는 더 이상의 변화와 발전은 없으며 모든 것은 뻔한 것이 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즉 혁명도 의미도 희망도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저 지적인, 철학적인 독재자 아래서 영원히 기계처럼 움직일 뿐이다.

 

과거에 사회적 혁신을 꿈꾸던 젊은 혁명가의 그룹들의 모습을 보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금새 독재그룹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적으로 고상해 보이는 윤리를 강요해서 왠지 그렇게 살면 무척 불편해 보일것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기가 없고 바깥쪽에서 냉정하게 바라보면 마치 무슨 사이비 교주에게 세뇌당한 사람들의 모임처럼 보인다. 즉 아름답지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정한 대안이 되지도 못하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어떤 이론을 추구하건 닫힌 계에 대한 이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기성의 논리적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 공부는 우리의 시야를 종종 넓혀준다. 그러나 어느 단계만 넘어서면 그것들은 그저 감옥일 뿐이며 그런 의미에서 쓰레기라고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는 이론이 된다.

 

나는 이 세상을 공학이 바꿔간다고 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공학에서의 교훈을 생각해 보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사회를 바꿔가는 것은 아이폰이나 인터넷이 아닌가? 알쏭달쏭한 철학이던가? 무슨 얄팍한 경제이론으로 오늘날의 사회변화를 평가한다는 것은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렇다고 할 때 세상을 바꾸려면 모두 스마트폰을 사라던가 혹은 스마트폰을 사는 것을 저지하라던가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일상어로 표현된 길고 복잡한 개념적 논의 안에서, 특히나 외국의 말들을 조잡하게 번역한 것을 엉망으로 이해해서 서로 주고 받는 논의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공학이나 과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인문학적 이론도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서 의미와 희망을 찾을 수 있을것인가. 무지의 이론이란 무엇인가. 나도 모른다. 나는 그저 내가 느끼는 몇마디를 나 자신도 궁금해서 정리해 볼 뿐이다. 나는 무지의 이론을 깔끔하고 완결된 형태에 가깝게 설명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그것이 정신적 분야에서의 진화론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느낀다. 그것은 인간의 관점이나 신화가 옳냐 그르냐를 논하는게 아니라 왜 그렇게 진화해 왔는가, 그 진화는 무엇에 달려 있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 될것이다. 물론 진화심리학이라고 부르는 분야는 이미 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내가 이 글에서 말하는 역할을 해낼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는 이런 방향에서 그다지 많은 진전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 것같다. 그것은 아직 DNA발견 이전의 진화론이고 심지어 다윈 이전의 진화론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무지의 이론이 사회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생각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류의 지식의 최전선을 확장하고 어떤 소수의 전문가만이 이해하고 혜택을 받는 그런 것이 되기보다는 대부분의 보통 소시민이 자신의 삶의 지평을 확장하고 삶의 의미를 찾고 더 훌룡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참여할수 있게 만드는 이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중에는 그런 건 이미 있다. 이거 저거가 바로 그것이지 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맞기 바란다. 나도 무지의 이론에 대해 더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또 찾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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