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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가장 확실하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

by 격암(강국진) 2014. 10. 1.

2014.10.1

우리는 많은 것들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원래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물론 우리가 모르는 것은 많다. 실은 우리가 뭔가를 모를 수록 대개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확실하게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모르는 것이 많은 것에 대해 오히려 가장 많은 확신을 한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에 종종 어떤 이름을 주고 우리는 모른다고 하는 대신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말한다. 무지는 만물의 어머니다. 무지는 존재의 생성의 근원이다. 예를 들어 개가 이유없이 죽는 경우를 개돌연사라고 부른다고 하자. 그 말은 우리는 개가 왜 죽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 개 한마리가 죽었다. 왜 일까? 모르죠라고 말하는 대신 개돌연사로 죽었습니다라고 말하면 마치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가 개돌연사라는 말을 계속 쓰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개돌연사라는 것이 어떤 단단한 실체로 느껴진다.

 

이런 식의 착각이 점점 강화되어질 때 우리는 급기야 우리가 모르는 것을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원래 그런 것으로 생각하는 경지에 까지 이르게 될 수 있다. 모르는 것을 잘 모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장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그걸 모르기 때문이다. 즉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별로 할말이 없다. 별로 할말이 없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설명이 없다는 것이고 그걸 뒤집어 말하면 반박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그것을 우리는 쓰고 경험한다. 때로는 아주 많이 그렇게 하고 결국 그것은 거의 성스런 존재가 된다. 반박불가능한 절대적 진리가 되어 버린다.

 

그런게 정말 있을까.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있다. 있다면 그런 것들은 우리가 잘 생각 안해 보는, 아주 드물게쓰는 어려운 개념들 중에 있는게 아닐까?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반대로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뭘까. 일단 이런 출발점에서 시작해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중에는 언뜻 생각하면 나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같은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나는 그게 뭔지 정의를 모르는 것들, 설명이 안되는 것들이 있다.

 

살아있다라는 말은 어떤 가. 많은 사람들은 21세기에도 과학자들이 합의한 생명의 정의가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21세기는 생물학의 시대라고 할만큼 생물학 이야기가 세상에 많지만 생명이 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생명이 뭔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뭔가가 살아있다라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바위는 발로 차면 아프지 않고 개는 발로 차면 아파한다. 왜 그럴까. 바위는 살아있지 않고 개는 살아있으니까 그렇다. 살아있는 것을 발로 차는 것은 나쁜 짓이다. 이런 설명이 뭔가 미심쩍은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생명이 뭔지,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이 뭔지는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진화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주 높은 확률로 바보다. 그것은 마치 수입을 은행에 넣어 저축하는 것보다 전부 복권을 사는 것이 부자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광신자와 비슷하다. 진화론은 어떤 다른 설명보다 세상을 더 유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진화론의 핵심에는 자연선택이 있고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에너지가 충만한 적자생존의 법칙이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적자생존이란 말은 같은 말의 반복일 뿐이다. 따라서 아무 의미가 없다. 순환적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우리는 누가 자연선택되어 살아남는지에 대해 아는게 없다. 잘난 인간이 못난 인간을 이겨서 시장에서 살아남을 때 우리는 그것을 적자생존이라고 부르기 좋아하지만 그것은 이긴 자가 자기에게는 미리 예정된 운명, 승자가 될 운명이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말할 때 승자에게는 왠지 말로는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것이 느껴진다. 때로 그것은 확실한 실체로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애초에 이긴자, 생존한 자를 적자라고 부르고는 적자가 생존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무지를 감추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도 그저 같은 말의 반복이다. 말로 말할 수없는 그 뭔가가 승자에게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이제 더 극적인 예로 나가 보자.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중에는 우리의 감각이 있다. 우리는 보는 것을 믿는다. 듣는 것을 믿는다. 어떤 어마어마한 양의 지식도 직접적 체험에는 미치지 못하다고 종종 말한다. 직접 먹어본 스테이크의 맛을 어떤 양의 지식도 대체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쓴 것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우리의 감각체험에 대해 대개 별로 말할게 없다. 이런 저런 묘사는 할 수 있지만 그것에 설명을 할 것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생각한다.

 

무의식이란 개념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이유는 그런 개념 이전에는 나의 행동은 나의 의식적 선택의 결과라는 것은 너무 당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거기에 무의식이 더해져서 행동의 선택에 대해 어떤 설명이 붙게 되자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것과 사실은 다르다는 것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그렇다면 감각은 어떤가. 우리가 뭔가를 보고 듣고 맛본다는 사실은 정말 자명하고 확실한 것인가. 우리가 스테이크를 먹을 때 실은 막대한 양의 지식의 영향을 받아서 그 맛을 느낀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충격받아야 할까? 맛이란 혀에서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후각을 마비시키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에 충격받아야 할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감각은 우리가 가장 모르는 것에 대해 가장 확신한다라는 말의 또 다른 예가 아닌가? 우리는 어느 새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당연한 것,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에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세상을 보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설명이 없기에 감각적으로 체험된 것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왜 세상은 이렇게 보일까를 고민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찾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지금 이러 저러하게 보인다는 사실은 가장 놀라운 일일 수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미지는 우리 뇌가 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기껏해야 어떤 시그날을 표현하는 한가지 방식이다.

 

이제 우리는 마음이란 말에 대해서도 잠시 말해보자. 이 세상에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마음이 뭔지 알고 있다고 대개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과 물질의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데카르트 시절부터 논쟁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정의도 근거도 없는 이원론의 형이상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마음이란 것이 아주 자명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확실하게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마음이 뭔지만큼 알지 못하는 것도 없다. 생각해 보면 마음이란게 있다는 근거가 없다. 리차드 로티는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아내서는 그 보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마음을 창조해 내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물질적 사고위에 쌓아올려진 과학이 그 대단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치적으로 윤리적으로는 완전히 무능한 이유다.

 

나는 정의가 없는 말의 예로 생명과 적자생존, 감각체험, 마음을 들었다. 나는 이런 예들을 계속 늘어 놓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라. 당신은 얼마나 많은 말들에 대해 그게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게 뭔지에 대해 거의 말할수 없는지.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아무도 그 정의를 모르는 말들은 세상에 많다. 모든 학문은 본래 정의가 없는 말들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시간이 뭔지, 원자가 뭔지, 우주가 뭔지 따지기 시작하면 수렁에 빠진다. 어떻게 말하면 우리가 아는 것은 이 세상에 거의 없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게나 많은 책들이 있는데 우리가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하면 어찌된 일인가라고 말할지 모른다. 물론 양적으로 볼 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의 양도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너무 많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실체의 축소라는 점에서 거의 없다라고 말해지기도 해야 할 것이다.

 

실체의 축소란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에 대해 말을 한다고 하자. 그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한국인이며, 어디사는지, 직업은 뭐고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나의 성장기를 모두 말할 수 있다. 그는 엄청난 양의 지식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길게 말해도 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렇다. 강국진은 인간이다라는 말은 옳지만 강국진은 인간일 뿐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실체의 축소라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한 무한한 지식중의 하나일 뿐이다. 아무리 많은 양의 지식도 어떤 존재의 모든 것을 파헤치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시작도 못한 것, 거의 알고 있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어져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어떤 존재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신기한 방법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잘못되어졌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미 축적되어진 엄청난 문명적 성과들을 폄하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이름. 단어 그것들로 만들어진 지식을 아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뭔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강국진이 인간이다라는 말을 안 것으로 강국진에 대해 더이상 알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자신의 무지를 확고한 확실성으로 착각하게 된다. 인간이 마음이라는 말을 만들어 놓고 마음은 단단하게 존재하는 실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개인적인 의미에서 무지의 폭은 내가 위에서 말한 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리고 그것이 개개인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한 설명과 정의를 설사 어떤 전문가들은 제대로 혹은 어느정도 알고 있다고 해도 일반인으로서는 알지 못하는 것은 많다. 우리는 어른과 아이를 비교할수도 있겠다. 어른이 그 답을 알아도 아이는 아직 답을 모르는 것이 많다. 우리는 아무도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다. 거의 무한한 체험과 지식의 바다에서 우리는 모두 작은 개미같은 존재일 뿐이다. 설사 우리가 우리의 무지를 부끄러워해서 열심히 공부하며 산다고 해도 인류가 아직 모르는 새로운 세계로 나가기는 커녕 이미 인류가 발견해내고 체험한 것들도 소진 시킬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개인의 무지의 벽은 훨씬 더 많이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가까운 곳에 서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나 직장동료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동네와 우리가 사는 사회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우리나라의 역사는 어떻고 우리의 자연은 어떤가. 우리가 사는 집은 어떻고 우리가 입는 옷과 우리가 먹는 음식은 어떤가. 우리가 보는 드라마와 영화는 어떤가.

 

내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는 모두 한명의 과학자이며 한명의 구도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탐험하고 진리와 설명을 찾아헤맨다. 그러는 가운데에서 인류적으로 저질러진 무지의 망각을 우리는 개인의 차원에서 행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것에 대해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스스로 어떤 곳에 벽을 세우고 이름을 붙이고 환상을 만들어 내서는 그 환상에 기대어 살고, 그 벽뒤의 것은 전혀 보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게 된다.

 

나는 언젠가 팔레스타인 사람과 유태인 사람의 유전자를 비교한 기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예수시대만 따져도 그것이 2천년전이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섬도 아니고 유태인들은 넓은 영역에 퍼져서 살았다. 그러니 팔레스타인 사람과 유태인이 유전자적으로 틀리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유전적으로는 구분할 방법이 없다. 나는 이스라엘에 한때 살았던 적도 있는데 팔레스타인 사람과 유태인을 구분하는 방법이란 고작해야 가난해 보이는 사람이면 아무래도 주로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것정도다. 나같은 동양인에게는 그들은 다 똑같아 보인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 사람과 유태인의 차이는 현실적으로 무시무시한 실체다. 많은 사람들은 유태인이 뭔지, 팔레스타인사람이 뭔지 확고하게 알고 있다.

 

우리도 그런 사람들을 뭐라할 처지는 아니다. 한국인들도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중국과 일본과도 역사적 사회적 문제로 삐꺽댄다. 어떤 사람은 아예 국적이나 민족 따위를 내심 무시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이 확고한 실체, 성스런 실체로 여긴다. 그러므로 싸움이 있고 원망이 있다.

 

많은 문제들은 깊고도 오래된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공허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고 그런 말이 어떤 건설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흐름속에서 층층이 자신들의 내부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우리의 무지를 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서로와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 간다고는 생각한다. 가장 확실하게 아는 것에 대해 오히려 이게 가장 모르는 것이 아닐까를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이런 글을 읽고 쓰기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금새 다시 습관에 빠져든다. 생명이라던가, 적자생존이라던가, 감각체험이라던가, 마음에 대해 들었던 말도, 심지어 스스로 썼던 말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질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금새 아주 많은 것이 단단한 실체가 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따금 다시 원천적인 것, 근원적인 것으로 돌아와서 자신을 정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환상에 속고 존재하지 않는 것 때문에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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