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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공부의 어려움

by 격암(강국진) 2014. 2. 28.

2014.2.28

몇몇 재수 좋은 사람과 몇몇 어리석은 사람 그리고 공부에 관심없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누구나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다. 공부란 것도 여러가지가 있기는 하다. 그래서 주제에 따라 어려움도 다르기는 하다. 그러나 공부의 어려움에는 공통된 것도 있다. 그것은 시작에서 시작하면 시작을 빠져나올 수 없고 끝에서 시작하면 시작을 모르고 끝을 공부하는 어려움이다.

 

물리와 철학을 공부하는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뉴튼의 법칙 정도는 안다. 그러나 그중의 하나인 힘은 질량 곱하기 가속도라는 식도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우리는 과연 힘이란게 뭔지, 질량이란게 뭔지, 거리나 시간이라는 게 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사실 끝이 없다. 서양철학사의 시작은 그리스에서 시작한다. 그러면 그리스 철학책을 읽어야 할 것인가. 책을 읽다보면 이번에는 번역의 문제가 등장한다. 그리스인이 말하는 선함은 현대인이 말하는 선함이 아니다 뭐 이런 식의 지적이 등장한다. 이렇게 되면 고양이가 뭘 느끼는지 사람이 알 수 없듯이 역시 그리스공부도 끝이 없다. 그러니 몇천년전 책을 잡고 씨름하다가 생활의 무게에 눌리게 되면 공부는 흐지부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부의 끝으로 가서 최신의 이론들을 모르면 외우는 식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면 늘상 그러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좀 속는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시작을 모르니까 우리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각각의 개념을 자기 마음대로 이해한다. 그렇게 엉성하게 만들어진 개념을 가지고 그걸 이해하려고 하는데 잘 안되는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되는가. 소수의 과대망상증 환자는 자신이 새로운 발견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을 쉽게도 뒤집는다. 철학사의 이정표가 될 새로운 이론이 잘도 나온다.

 

하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도 문제다. 그들은 모순을 발견해도 그들이 만든 이해, 개념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저 권위에 굴복한다. 즉 유명한 책에 나온 이야기니까, 유명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니까 내게는 이상해 보여도 그건 내가 잘못된 것이겠지라고 생각하고는 나를 고쳐야 한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뭘 공부하던 이런 식으로 하면 얻을 것이 별로 없다. 머릿속 공부가 모래성이니 누가 강하게 한번 치면 10년공부가 우수수 무너질 판이다. 무엇보다 어려운 공부는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누구나 겪는 이런 공부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보면 몇가지는 방법이 있다. 우선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이해하지 못한 것은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내버려 두는 것이 필요하다. 이해하지 못한 것을 억지로 이해하고 이해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우리의 진정한 이해를 오히려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공부에 방해가 된다. 그보다는 아 저건 내가 아직 모르는 것이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히 어린 학생들은 불평할 것이다. 나는 다 모르는데 전부 모르는 것으로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시험도 봐야하고 그전에 인생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실용주의적인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즉 이해는 못하지만 써본 결과 우리가 원하는 효과를 주기는 주더라는 것이다. 전자렌지의 원리를 몰라도 우리는 전자렌지를 가지고 음식을 데울 수는 있다. 니체의 문구가 이해는 안되도 왠지 나에게 힘을 줄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활의 필요에 의해서 어떤 것들을 외우고 사용하되 첫째로 꼭 필요한 최소의 것만 사용하고 둘째로 지금 쓰고는 있지만 이것의 원리를 내가 이해는 못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물리학의 이론이든 철학적 개념이든 말이다.

 

모르는 것을 내 생활의 필요가 없는데도 쓸 필요가 없고 어쩌다 써보니 내가 원하는 효과를 낸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좀 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섯부른 일반화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일단은 오늘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철학을 공부하고 일단은 지금 눈앞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론을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사실은 체계적으로 공부한다고 하면서 어떤 공부에 있어서 역사를 만들고 그 처음부터 죽 공부하겠다는 식의 발상은 매우 어리석다. 그렇게 공부를 이해하면 우리는 앞에서 말한 공부의 어려움에 당장 걸려들고 만다. 결국 뭔가 유용한 것은 하나도 건지지 못하는 것이다. 대학원생은 교과서를 공부하는게 아니라 빨리 자기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알고나서 연구를 하는게 아니다.

 

또한 어떤 공부에 대한 개념에 사로잡혀서 그 효과를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도 안된다. 즉 성황당 나무에 절을 하면 왜 우리 부모님의 건강이 좋아지는지 몰라도 당신의 경우 효과가 있음을 발견한다면 그런 것을 미신이라고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어리석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너무 많이 안다고 생각해서 많은 것을 배제해 버린다. 그렇게 해서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는 것을 던져버리고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을 이용한다. 어떤 유명한 철학자의 글이 당신에게 두통만 주고 어떤 시골할머니의 소박한 수필이 당신에게 살아갈 힘을 준다면 지금 당신에게 유용한 것은 시골할머니의 수필인 것이다. 유명한 철학자의 글이니까 여기에 진리가 있을꺼야라고만 생각하고 당신에게 유용한 시골할머니의 수필을 던져버리는 것은 그저 권위에 굴복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며 뭔가 우월한 것처럼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발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을 가지고 살다보면 우리는 세상에 대한 경험을 얻고 우리가 쓰는 도구들에 대한 경험을 얻는다. 그러다가 보면 우리는 어떤 영감들을 통해서 우리의 이해의 폭이 확장되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가 막연히 배운 것들, 외운 것들이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서로 상호관계를 가진 것들이라는 것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무의 가지가 자라고 뿌리도 깊어지듯 우리의 공부도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실용주의적인 지적은 한가지 요소를 기억해야 도움이 된다. 그것은 나 자신이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주로 나라는 개인이 처한 여러가지 특이한 현실을 말한다. 대한민국에서 20세기에 태어났다던가, 부모가 누구고 태어나기를 성격이 이러하고 육체적 특징이 이러하며 우연히 이러저러한 사람과 만나고 이러저러한 일을 겪었다는 그것이다. 굳이 주로 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이런 목록을 나는 무한히 나열할 수 없기 때문일뿐 나라는 존재가 가지는 세상에서의 문맥 그게 나다.

 

그 나는 이러저러한 질문과 욕망을 가진다. 수영장에 가려는데 돈이 없다. 우리는 돈을 구해서 수영장에 갈 수도 있지만 수영장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돈을 안 쓸 수도 있다.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런 선택들이 앞에서 말한 우리 생활에서의 필요라는 것을 만든다. 돈을 벌고 싶으니까 돈을 벌 필요가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멋진 외모를 가지고 싶으니까 그런 것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필요는 도구의 선택을 낳는다. 도구의 선택이 우리의 경험을 만들고 경험이 우리의 성장을 결정한다. 그러니까 결국 성장의 씨앗은 우리의 욕망이고 내적 질문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형식주의에 빠져 실제로는 관심없고 내게는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을 한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을 배운다. 이것은 집을 소유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는데 어른들이 사람이 집한채 구하지 못해서는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한다는 이유로 그 집을 사기 위해 정신없이 밤낮으로 일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는 집을 구해도 기쁘지 않을 것이며 집을 구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어딘가 저기 바닥에서 내가 이런 짓을 왜하고 있지 하는 목소리를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과 질문을 던져버리고 남의 욕망과 질문에 따라서 공부를 하면 우리는 마찬가지 문제를 겪을 것이다. 모처럼 자기를 키운다고 해도 그것은 알맹이가 빠진 성장이고 따라서 오히려 던져버리기 어려운 멍에만 될 것이다. 그래서는 오래 오래 공부하기 어렵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 것이다.

 

공부의 어려움이 이런 것만으로 사라지지는 않지만 나는 내가 좀 더 어렸을때 이런 것을 알고 공부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를 키우고 자신의 질문을 추구한다는 생각도 없이 모르는 것에 대해 실용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어떤 절대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생각을 한다면 공부는 한없이 어려워지게 된다. 내가 종종 경험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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