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Re: 가난한자들이 왜 부자에게 투표할까

by 격암(강국진) 2013. 12. 30.

2013.12.30

가난한 사람들이 왜 부자에게 투표할까. 이제 이 질문은 거의 식상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을 보면 여당인 새누리당을 만들어 낸 절대 다수의 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새누리당을 부자당이라 공격하는 야권에게 이것은 당혹스러운 일이며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사람이 여러가지 설명을 내놓는다. 이것이 피할수 없는 질문이기에 질문은 계속되는 것이다.

 

나도 이것에 대해 한 일년반쯤 전에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또 생각하고 또 다시 다르게 표현해 보게 된다. 그만큼 중요하며 단순히 그들이 어리석기 때문이라 답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질문에 답하는 한가지 방법은 바로 문화적 친화성이라고 생각한다. 좀 다르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진보주의자들은 종종 가난하고 학벌이 좋지않은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배제시키고 있다. 좀 다르게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진보적 공동체안에서 정상인이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문화적 소외를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진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고 믿는다. 이 문제는 깊고 심각한 문제이며 뭐가 진보인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입만열면 가난하고 소외된자들, 소수자들의 인권과 복지를 외쳐대는 진보주의자들이 가난하고 학벌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배제 시킨다는 사실이 뜻밖으로 생각되는가? 하지만 당신은 혹시 사람들에게 백권쯤 되는 어려운 책들의 목록을 나열하면서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이정도는 읽어야 한다던가 아예 만권쯤 되는 자신의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아닌가? 난 자랑을 한게 아니라 책읽기가 좋은 것이라, 단지 사람으로 태어나 응당 읽어야 할 책이기에 권했을뿐이라고? 나는 그렇게 한 당신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전부 잘난체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문화적 소외를 일으키는 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예는 아닐지 모른다. 나는 단지 한 예에서 시작하고 싶었을 뿐이다.

 

다른 예도 있다. 외국어를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말을하면서 전문용어나 외국어를 섞어쓰는 사람을 보면서 재수없다고 느낀적은 없는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래도 꽤 문화적으로 풍성하게 살고 있고 꽤 학벌도 높다면 생각해 보라. 그런 당신도 아마 그런 사람들에게 재수없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과연 초등학교 졸업한 분이나 먹고사는 일에 빠듯한 사람들, 끼리끼리 아주 원초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떠들어 대던 사람들이 학벌높고 공부 많이 한 분에게 문화적인 소외를 느끼지 않을까?

 

나는 잘난체 하는 쭉정이들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다. 겸손하면서 학식이 실제로 높은 분들도 많고 그들은 그렇지 못한사람들로 부터 존경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경이란 사실 깨지기 쉬운 것이다. 존경이란 사실 어떤 의미에서 나쁜 것이다. 우리는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공자님같은 성인들을 존경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 존경은 동시에 그들은 특별한 사람이니까 하는 식의 딱지붙이기와 함께 한다. 즉 그들은 특별하므로 나와 같을 수가 없다는 구분이 생기고 따라서 문화적인 분별이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을 소외시킨다. 돈에 미쳐서 돈이 최고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이 돈말고도 좀 다른 가치에 대한 것도 생각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나 그녀는 두 가지방식으로 그 사람을 소외 시킬 수 있다. 하나는 너는 위선자라고 말하는 것이고 또하나는 당신은 아주 비범하게 훌룡하신 분이라고, 당신은 아주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너는 나와는 다르다라고 말해서 너는 일반론적인 진리의 예외라고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이 문화적 소외의 문제가 깊고도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 문제를 단순히 현학적인 태도의 문제정도로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문제는 스스로를 좋은 세상을 꿈꾸는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어딘가에서 잘못되어져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다르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런 식으로 좋은 세상 못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 그런 직감을 가진 사람들이 진보를 외면한다. 저들은 절대 대안이나 주류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비록 적절한 설명을 붙여서 왜 그런가를 말하지 못해도 말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왜 그런가를 설명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 설명이 조금이라도 통하려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이건 당연히 좋은거지라는 생각에 대해 좀 부드러워질 필요가 있다.

 

어떤 지식의 체계는 제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극한에 이르면 사람을 억압하는 시스템이 되며 혁명을 통해서 극복해야할 타도의 대상이 되고 만다. 타도의 대상이 되는 구문화 혹은 구 패러다임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 당연해 보이지만 실은 그 세상이 모두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모여서 건강한 사람이 일을 잘하니까 공무원 뽑을때 기본조건에 20킬로미터 정도는 뛸 수 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조건을 붙이자고 한다면 어떨까. 누군가가 나는 그렇게 못뛴다고 말하면 그러면 열심히 연습하세요, 그것도 못뛰면서 세상을 어떻게 살겠다는 겁니까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마라톤 선수들은 20킬로를 완주하지 못하는 것은 정상인의 범주 아래이므로 그것이 안되는 사람은 응당 정상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일이지 정상인에 대한 정의를 바꿀 필요는 없다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상인이라는게 뭘까?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때 자연스레 학번을 묻곤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학이란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가는 것쯤으로 각인되어 있는 느낌이다.

 

여기까지 읽고 혹시 내가 진보를 부정하고 현 여당인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적는데 나는 현 여당이 옳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보의 문화가 어떤 문제가 있기에 대안이 되지 못하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대해 고민해서 대안을 만들자는 것이다.

 

나는 정상인에 대해 말했었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당신은 누군가가 아 그 책들이 어려워서 읽어도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면 그래도 이 책들 정도는 읽어야지요라고 쉽게말하지는 않는가? 즉 책이나 지식에 대해서 당신은 어떤 정상인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정상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대로 좋은게 아니라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은 상식이 아니냐고? 지금 내가 책읽는 것이 나쁜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정상인의 개념이 뭔지, 책이란게 수단인지 아니면 그 자체가 목적인지, 그런 것이 문제다. 당신은 요리나 기타실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사람이 그정도는 해야지요라고는 쉽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키가 작은 사람에게 인간이 160도 안넘어서는 곤란하지요라고는 쉽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가 정상인가? 문맹은 비정상인가? 책을 백권정도 읽지 못한 사람은 비정상인가? 아니면 만권인가?

 

많은 진보주의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가난하고 학벌이 낮은 사람들을 정상인으로 보지 않고 계몽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물론 진보주의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엄격히 말하면 모든 문화권은 어떤 정상인의 개념을 만들어 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정상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존재 혹은 동정을 받아야 하는 존재 혹은 적으로서 악으로서 타도하거나 멀리해야 존재로 생각한다. 따라서 핵심적 질문은 진보주의자들의 문화가 얼마나 포용력이 있는가 하는 것일 것이고 지금 가난한 사람들이 진보주의자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 포용력이 실패하고 있다는 말이다.

 

내가 자주하는 이야기지만 다리없는 장애인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좋은 사람이 아니다. 다리가 없어서 일을 못하고 구걸로 연명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당장 푼돈이 아쉬울 것이므로 그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돈 몇푼을 던져주는 사람이 그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도 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인 것이 맞다. 그러나 실은 애초에 다리가 없으면 정상인이 아니다라는 문화적 벽이 그 사람을 구걸하는 신세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축구선수가 될 수는 없었겠지만 당신은 정상인이 아니군요라고 말하면서 다리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조차 시켜주지 않았을런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다리없는 장애인을 불쌍하게 즉 정상인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가 처한 곤궁에 대해 책임이 있는 가해자다.

 

다시말하지만 하나의 대안이 될수 있는 문화적 공동체는 하나의 정상인의 개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 문화적 공동체가 생존을 넘어 성장할 수 있는 최소조건은 그 정상인의 개념을 가지고 포섭한 사람들이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문화공동체가 완전히 외부와 소통하지는 않더라도 외부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서 생존이 불가능한 정도가 되면 곤란하다.

 

그 문화공동체가 자급자족이 안된다는 것은 그 문화적 시각에 따르면 비정상인으로서 불쌍하게 동정하거나 혹은 악의 근원으로서 비난해 마땅한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해 심각하게 의존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장하면 좋지만 그냥 이대로도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수준이 되질 않는다. 누구도 동정받거나 비난받으면서 비정상인취급을 받고 싶어하지 않으므로 이 문화공동체는 존립이 어렵고 성장은 더 어렵다. 이것이 개혁세력, 진보세력의 현재가 아닐까?

 

어떤 시골 동네에 돈없는 박사 소지자 몇명이 귀촌해서 산다고 하자. 그 사람들이 모여서 인간이 박사학위도 없으면 대화를 나눌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모임을 만든다. 그 인간들의 사고가 정상이냐 아니냐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과연 이 모임이 생존할 수 있는가. 돈이 없어서 걸핏하면 먹는거에서 자질구레한 수입에 이르기까지 빨래며 요리며 청소며 옷사입고 차타는 것에 이르기까지 박사학위없는 가족과 동네사람들에게 전부 의존하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박사도 없는 인간들이 불쌍하다, 저사람들을 도와야 할텐데 같은 소리를 하면서 잘난체 하고 있으면 그 모임이 발전하고 성장할 수가 있을까?

 

성공한 사례도 한번보자.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돈이 없거나 많거나에따라 혹은 학벌이 높거나 낮거나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될자격이 있다거나 불제자가 될 자격이 있다거나하고 말했던가? 그걸 문화공동체로 볼때 그 문화공동체의 정상인의 개념은 크고 넓다. 게다가 본래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라는 것이 그들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그들은 일단 생존할 수 있고 그 문화공동체는 성장하기 쉬운 것이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지금의 대안세력들은 충분한 넓이를 가진 정상인의 개념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자급자족의 상태에 도달했는가?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문화공동체에 합류하면 더더욱 좋겠지만 지금 이대로도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 행복하다라는 상황에 도달했는가? 그게 아니면 계속 문화공동체 외부에 엄청나게 의존하면서 작은 정상인의 개념밖에는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몇몇 사람들이 노빠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단지 여당지지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비하적 표현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정상인의 범위안에 노무현 지지자가 없다는 뜻이다. 적어도 노무현 지지 집단의 내부적 문화가 그들의 문화와 맞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꼼수가 방송하고 있던 시절 비키니 사진에 얽힌 논쟁이 있었다. 그래서 진보란 무엇인가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왔다. 이 글의 말로 그 사건을 말하자면 그들은 나꼼수의 사람들이 잡놈을 자처하면서 낄낄거리던 행동을 보고 그들이 정상인으로 즉 그들의 문화공동체안의 일원으로 느낄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입버릇처럼 사람들에게 끝없이 달라질것을 변화할 것을 주문한다.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되도록 생긴대로, 그 자신 그대로 편안히 거주할수 있는 세상을 꿈꾸지 못하고 복잡한 규칙들로 좁다란 집을 만들고는 사람들을 그 집에 구겨넣으려고 한다. 정치적인 올바름으로 자꾸 정상인의 폭을 제한한다. 이 글에서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그런 비판을 하는 그 사람들이 실은 자생이 가능한 문화공동체를 이루고 있지 못하며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종종 노무현도 김대중도 나꼼수도 그 정상인안에 포함시키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종종 이 나라를 단숨에 좋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교육은 이렇게 하면 되고 부동산 문제는 저렇게 하면되며 빈부격차의 문제도 이렇게 하면 된다. 나아가 한국이 세계제패를 할 정도의 부를 축적하는 것도 간단하다.

 

그런 주장에는 숨겨진 한 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온국민이 그들이 말하는 정상인이 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 세상에서 누가 행복할까? 정말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한 세상이 되는 것이 맞을까? 노무현도 김대중도 나꼼수도 넘지 못하는 선인데 과연 얼마나 다 그 선을 넘어들어갈 수 있을까. 스스로 그 선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착각 아닐까? 그러면서 남들이 세상을 좋은 세상 못만드는 걸 비판하는게 말이 될까?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나는 어떤 인간을 정상인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 왔는지. 너무 쉽게 나는 누굴 차별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벽도 없는 인간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쉽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평소에 고민이 없어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통해 벽을 만들었는가를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를 비정상인으로 몰아부쳤으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말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세상 모든 사람을 전부 정상인으로 포함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벽과 테두리가 없는 인간은 없다. 모든 인간은 유한하다.

 

당신은 거리 미화원이 한달에 월급 일억을 받는 세상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여자들은 학교에도 못가고 거리에도 못나다니게 만드는 세상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개를 살리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세상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칼을 들고 나가서 가족의 원수에게 사적인 복수를 하는 세상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미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나 우간다의 사람이나 조선족이 한국에서 한국인들과 꼭같은 대접을 받거나 혹은 더 높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여자 한명이 남자 여러명과 동시에 결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만약 이런 질문들에 대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런 것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어떤 정상적인 세계에 대한 당신 자신의 기준을 가진 것이며 당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상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공동체로 살기 어렵다. 당신이 아무 생각도 없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당신이 너무나도 문화적으로 세뇌되어진 나머지 자기가 누구인지 느껴보질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가 뭘 정상으로 생각하는지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건 그저 당연한 것이니까. 내 주변에는 대부분이 '정상인'이니까.

 

문화공동체의 정상개념은 그 문화공동체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을 결정한다. 우리는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가치기준에 따라 살기위해 뭘 하는게 아니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뭘한다. 행복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게 중요한 일이라고 해도 어떤 공동체가 일정수준 이상의 학식이 없는것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면 그 공동체 안에서 그 학식을 갖추기 어려운 사람은 행복하기 어렵다. 수단이 행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어버린다. 그가 왜 그 공동체를 선택해야 할까.

 

당신이 만약 못생긴 여자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문화공동체의 일원이라면 그 공동체는 언뜻 듣기에 못생긴 여자들을 돕는것같지만 못생긴 여자들은 대개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그 문화공동체에서 비정상인으로서 별로 대접받지 못하는 위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못생긴 여자들을 놀리지 말자, 보호하자 차별하지 말자 말을 많이 해도 어떤 기준으로든 정말 손톱끝만한 미모차이에도 펄쩍펄쩍 뛰며서 호들갑을떠는 문화가 있다면 그 안에서 못생긴 여자는 행복하기 어렵다. 여자들은 그 문화공동체 바깥으로 나와 그렇지 않은 곳에 갔을때 매우 큰 해방감을 느낀다. 비로소 자기가 어떤 큰 힘의 노예로 살았다는것을 자각한다. 우리가 여자의 외모 자리에 돈이나 사회적 지위나 학벌따위를 집어넣어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기초다. 마르크스는 노동가치설을 통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이며 따라서 노동자가 정상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상인이란 그 문화공동체안에서 인간으로서 가치있는 존재이며 대접받고 투자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항상 같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종종 어떤 철학적인 기초가 그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과 행동이 반대로 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장애인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장애인의 가장 큰 적이라고 나는 말했다. 여자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정상인의 개념이며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한 개념이다. 말속의 정상인과 행동속의 정상인은 항상 같지 않다.

 

이 세상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가가 객관적으로 어떤 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런 집단은 결국은 독재에 빠지게 된다. 왜냐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결국 이 집단에서 정상인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다. 그가 모든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대체가 가능한 수족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가장 소중하고 대접받아야하며 그 사회나 공동체가 이뤄내는 모든 성과의 모든 영광을 독차지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것을 믿을 때 이 집단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는 실제로는 곧 무가치한 존재가 되고 만다. 노동의 신성함을 아무리 말해봐야 그들은 그저 시스템에 의해 길러지는 가축같은 존재다. 동정받고 돌봐져야만 하는 존재다. 결국 핵심적 진리를 알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중앙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에서 책한줄 안 읽고 들에서 노동만 하는 사람이 과연 무슨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말인가.

 

입으로 아무리 한국의 청년들이 중요다고 떠들어도 정신의 저 아래쪽에서 결국 인력이란 외국에서 수입해오면 되는 것이고 한국문화를 숙달한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한국의 청년들에게 장학금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세금이며 주거비조로 더 많은 것을 뜯어내려고 할뿐 그들에게 기회와 투자와 권리를 주지 않는다. 청년들은 동정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들은 그런 사회에서 정상인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혁명을 한다고 해도 그리고 그것이 성공한다고 해도 매우 추상적으로 들릴수 있는 기본적 철학적 기초에서 정상인의 개념이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 나중에 오는 결과는 달라지게 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종종 혁명의 동지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배신자들은 자신들이 배신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세상에서 뒤로 쳐지는 사람들은 그런 대접을 받아도 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리를 하고 끝을 내도록 하자. 결국 크고 넓은 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 틀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틀이다. 되도록 최소한의 변화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모습대로 살 수 있는 틀이며 되도록 많은 것들, 많은 사람들을 평등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틀이다. 그것은 단순히 이제 우리 잘지내봅시다라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세상이란 어떤 곳인가에 대한 기본적 사고의 영향이 있다.

 

예를 들어 그 틀은 결코 지금 한국을 꽉채우고 있는 배금주의가 될수 없다. 결국 성장이 느려지는 사회에서 돈이란 제로섬게임에 가까워질 수 밖에 없다. 어떻게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겠는가. 또 인생의 답이 쾌락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정말 행복이 지속될 수 있겠는가.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 우리는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답이 있어야 하고 그 답은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 종교적인 추구처럼 보이게 된다. 그렇다고 섯불리 어떤 기성종교가 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성종교는 기성종교의 관습을 통해 따라붙은 나름의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미 어느정도 이런 것을 느낀다. 그래서 느리게 살기니 힐링붐같은 것이 부는 것이다. 적어도 인생이니 예술이니 학문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나름의 고민이 없는 사람들이 쉽사리 세상을 좋게 만들겠다고 나서서 왜 사람들이 다 나를 지지해 주지 않을까하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세계는 실상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자신들이 무의식중에 만든 정상인의 개념이, 사람은 본래 이런 걸 위해 사는 것이라는 개념이 누군가를 피눈물 흘리게 한다.

 

시대가 흐르면 모든 것이 발전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도 않다. 한국은 특히 돈말고 다른 가치들이 거의 다 매몰되어진 느낌이다.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중에도 결국 핵심은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다. 이래놓고 어떤 시스템이 우리를 부자만들어 줄까를 고민하면서 너는 답을 아는가를 묻는 걸로 진짜 좋은 세상이 올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답이 아니라 질문이 잘못되었고 우리가 제대로 꿈을 꿔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질 않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런 꿈은 감동을 준다. 종교적 개종이나 문화공동체의 변화는 감동을 통해서 오는 것이니까.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잘난체 하면서 부흥회니 뭐니 하고 그런 것을 폄하한다. 남의 세계의 초라함을 비웃기 전에 자기 세계의 초라함은 돌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을 모으자면 큰 지붕이 필요하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