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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진실과 진실을 보는 과정

by 격암(강국진) 2013. 11. 21.

2013.11.21

우리는 여러가지 사회적 사건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 사건들의 진실을 알고 싶다. 예를 들어 천안함사건에서도 그렇고 노무현의 북방한계선 사건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진실이 궁금하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알게 될 것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 진실을 찾는 방식에는 적어도 두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 두 태도를 과학적 태도와 베이지언의 태도라고 부르자. 이 두 태도들은 쉬운 경우들에 있어서는 같은 결과를 만들 것이지만 진실을 캐기 어려운 상황에 가면 그렇지 않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많은 사람이 아직도 전자의 것을 믿지만 나는 점점 더 후자의 태도가 필요해 진 시대가 되어간다고 믿는다.

 

과학적 태도의 경우

 

과학적 태도라는 것은 일단 정확한 사실의 관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정확한 사실들의 관찰 데이터가 증가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진실을 보게 된다. 과학이 이렇게 발전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되도록 정확히 많이 관찰하고 그 관찰에 기반하여 과학적 이론이라 부르는 가설을 검증하고 관찰된 사실들을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자연의 법칙을 찾아낸다. 말하자면 여기서 사실이란 단순한 관찰의 결과이고 진실이란 자연의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실이라는게 사실 그 자체가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진실과 사실은 구분된다. 단순한 하나의 관찰과 자연의 법칙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진실이란 가치판단과 의미가 들어가 있는 것이고 사실들의 관계가 들어가 있다. 그러나 단순한 사실이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말자가 춘희를 죽였다라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말자는 춘희를 죽인 나쁜 살인범이다라는 것은 단순한 사실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나쁘다라던가 좋다라던가를 말하자면, 살인범 같은 말을 말하자면 우리는 말자와 춘희간의 관계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말자와 춘희는 전투중에 만났을지 모른다. 말자와 춘희는 사형집행인과 사형수로 만났을지도 모른다. 말자와 춘희는 같은 병실에 있었는데 둘다 치명적인 상황에 빠졌고 하나밖에 구할수 없었던 의사가 하필이면 말자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이 경우 우리는 나쁜 살인범이라는 설명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사건의 전후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갈 때 우리는 사실과 진실간의 거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사실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라고는 했지만 그들은 다르지만 같기도 하다. 그들은 무지개위의 색들이 연속되는 변화속에서 있듯이 그저 어떤 차이의 극한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은 진실과 사실이 다르다라는것에서 시작해 보자. 왜 진실과 사실이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는가 하면 우리는 우리가 사실을 찾고 있다고 믿을 때에도 실은 진실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간적 공간적 사회적 관계를 상실하고 의미를 가지지 않은 중립적인 사실이란 존재할 수 있다고 해도 의미가 전혀 없으므로 우리가 그런 일에 관심을 가져야할 턱이 없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의식하는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많은 것을 가정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래서 종종 결정적 한가지 사실만 확인되면 우리의 어떤 의심이나 이론은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진실이 된다고 믿는다. 과연 말자는 춘희를 죽였는가 아닌가에 대해 그렇다 아니다라는 답만 하라는 것이다. 그 답이 그렇다라면 우리는 종종 더이상 말자나 춘희의 이야기는 들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같은 태도는 과학의 연구에서도 오류일뿐만 아니라 현실 사회 생활에서는 말할 수도 없을 만큼 틀린 것이다. 수없이 많은 관찰 사실을 모으면 그것이 저절로 자연의 법칙을 말해주는 어떤 이론적 가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과 뉴튼의 물리학의 예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말이다.

 

확실히 관찰사실은 어떤 가설을 부정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하지만 두가지를 기억하자. 첫째로 어떤 부정은 100% 확실성을 가지고 행해질 수 없고 둘째로 일단 어떤 것을 부정하려면 우리는 애초에 어떤 과학적 가설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왜 이런 저런 질서가 관찰된 데이터안에 존재한다고 보게 되었을까?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가설가운데 하필 그걸 가설로 선택하여 옳은지 그른지를 생각하게 된 것은 왜일까. 그것은 정말 어떤 편견이나 가정없이 행해 질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과학적 연구도 그래서 패러다임을 지키면서 비연속적으로 행해진다. 일단 한번 패러다임이 바뀌면 우리는 전에 측정하지 않았던 것을 측정하고 빠르게 전에 우리가 많은것에서 무지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하나의 패러다임안에 있을 때 그 패러다임에 맞지 않는 데이터는 흔히 무시된다.

 

엄밀한 과학도 이런데 사회속의 사건들속에서 진실을 찾을 때 우리가 과학적 태도만을 가질 경우 그 한계는 분명할 수 밖에없다. 우리는 보통 기자정신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사실만을 정확히 보도하는 정신으로 착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것을 9시뉴스 첫번째 뉴스로 다뤄야 할지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정확한 사실만을 보도하면서 세상이 불공정해 지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제주도에 대해 정확히 이야기하고 싶은데 방송은 서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면 서울에 대해 정확한가 아닌가 하는 것 이전에 그 방송은 문제가 있다. 한국사회가 단순한 사회였을때 기자는 사실을 보도하는 용기만 있으면 되었다. 우리는 그것으로 독재와 부패와 싸울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훌룡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과학은 가치를 그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 즉 과학적 방법론이 우리에게 이게 저것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적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흔히 오류에 빠진다. 열심히 과학적이고자 하면서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 빠져서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들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훌룡한 과학자는 가장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아니다. 과학은 결과물일뿐이다. 아인쉬타인도 그래서 자신은 답에 대한 냄새를 잘 맡는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답은 과학일지 몰라도 답을 찾는 과정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과학이라고 착각한 사람은 오히려 과학을 하지 못하게 된다. 과학자는 컴퓨터가 아니라 예술가에 가깝다.

 

베이지언의 태도

 

베이지언의 태도란 우리는 기본적으로 세상을 어떤 편견 혹은 프라이어를 가지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사물을 이렇다와 저렇다의 이분법이나 분류로 보는게 아니라 연속적인 확률로 보는 것이다. 논리학의 배중률은 정확한 구분을 말한다. 너는 개거나 개가 아니다. 둘중의 하나가 답이다. A가 B인 동시에 B가 아닐수는 없다. 그러나 확률론적 시간에서 모든 것은 확률의 문제다. 어떤 것은 모든 것이 될 확률을 크고 적게 가진다. 베이지언의 논리에서는 배중률은 처음부터 부정된다. 의미는 경우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 아니다라는 것이 모두 확률적이다. 예를 들어 한민족이란 것도 존재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우리의 편견 혹은 상식 혹은 이데올로기 혹은 프라이어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찾는 방법은 두가지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과학적 방법과 다르지 않다. 되도록 정확히 보는 것이다. 또하나는 우리의 프라이어를, 우리의 상식을 어떻게 올바르게 바꿔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상식을 가지건 아침에 해가 뜨는 것을 보면서 해가 안뜨는 것으로 보려면 참으로 기괴한 상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관찰이 분명한 답을 주는 경우 베이지언의 태도와 과학적 태도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아주 복잡하고 아주 불확실한 관찰밖에는 허락되지 않는 많은 경우 두 태도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과학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해서건 정확한 관찰을 많이 하려고 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훌룡한 것이지만 세상의 복잡성이란 본래 간단히 개인의 차원에서건 집단의 차원에서건 우리의 능력을 넘어선다.

 

근래에 세상은 예측 불가능하다는 말이 얼마나 자주 나오고 있으며 경제난 같은 것들이 그런 것을 얼마나 잘 보여주고 있는가. 우리나라는 지금 경제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있는가같은 질문의 답에 해당하는 진실은 과연 열심히 많이 자세히 관찰하면 답이 나올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런 태도는 대개 위험하다. 자신이 뭐에 무지한지, 자신이 어떤 선입견을 가졌는지에 대해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편견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상식에 근거해서 어떤 사실의 의미를 판단한다. 베이지언의 태도의 경우 우리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의식한다. 뭔가를 관찰했을 때 나라는 사람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를 생각하며 그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다른 나라에게 어떻게 다르게 보일까도 생각하기 마련이다. 즉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중심으로 우리의 상식을 고쳐나간다는 것이다.

 

단순히 고쳐나간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고쳐나가는 속력이나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지언은 언제나 전체를 잊지 않고, 전체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서 사고한다. 독립된 사실들을 잔뜩 모으면 진실은 저절로 들어나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종 전체를 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싸구려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장님이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장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베이지언은 기본적으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나의 밖에 있는 어떤 것에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실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그렇게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찾기란 바람직한 나를 찾는 과정이고 자기 교육의 과정이다. 내가 어떤 뒤틀어진 시각을 가지던 말던 진실은 객관적 실체로 저기 존재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맺는 말

 

우리는 물론 모두 진실을 알고 싶어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과학적 태도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잊는 것은 허무하게도 그 진실의 안에서 우리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통하고,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는가에 따라 진실은 바뀐다. 국민들을 검렬하고 구속하는 정권이 있다고 하자. 그 정권은 공식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을뿐 국민들은 수준이 부족하고 윤리적으로 타락하여 때로는 패고 고문하지 않으면 나라가 엉망이 된다고 믿는다. 소수의 기득권을 빼고는 다 못난이니까 모든 걸 기득권이 차지해야 나라가 그나마 잘 굴러간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거기에서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스스로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못할때 누가 이기게 되는 것일까. 거기에다 대고 미국인들은 이렇게 살아요, 일본인이나 독일인들은 이렇게 살아요라는 자료를 산처럼 쌓더라도 그것은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우리나라지 남의 나라가 아니다. 진실을 보는 우리의 방법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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