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함께 하기와 이론의 문제

by 격암(강국진) 2013. 7. 13.

2013.7.13

우리는 왜 이론을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 이론이 있다. 그런데 이론들이란것이 뭐고 서로간에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를 더 폭넓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며 무엇보다 혼란된 세상속에서 자기를 지키고 남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을 준다. 이론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필요없이 여러가지의 이론들이 서로 배타적으로 싸우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로 하여금 어떤 주장이 무조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그게 아니면 반대로 무한정 그것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론이라는게 뭔지, 왜 이 문제가 중요한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이론의 구조

 

이론은 통상 두가지 출발점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이론의 기본적 구성요소이며 또 하나는 그 구성요소들에 적용되는 원천적 법칙들이다. 예를 들어 기하학에서 선이나 점은 바로 그 이론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고 선과 점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만족하는가에 대한 기하학의 기본 정리는 그 구성요소들에 적용되는 원천적 법칙 즉 공리가 되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이론이나 경제학의 이론은 흔히 인간을 그 기본적 구성요소로 삼는다. 그리고 개개의 인간은 각자의 수익을 최대화하려고 노력한다라는 식의 기본적 인간의 성질을 이론의 출발점 혹은 원천적 법칙으로 삼는 것이다.

 

이 기본적 구성요소와 원천적 법칙들을 일단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것들에 논리적인 과정을 첨부해서 원천적 법칙들보다 더 복잡한 법칙들 혹은 원천적 법칙들의 논리적 결과들을 연역적으로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이론의 전개, 예측 혹은 결과이다.

 

이론의 전개는 레고블럭을 쌓아올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레고라는게 있는데 그것이 특정한 방식으로만 쌓아올려진다는 사실을 안다. 그럴때 비행기나 기차모양의 복잡한 구조물이 어떻게 그 레고들로 만들어 내어 질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바로 이론의 전개요 성취인 것이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의 정리같은 기하학의 정리들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진 결과물들이다.

 

이론의 출발점과 한계

 

여기서 기억해야할 중요한 것은 이론의 기본적 구성요소와 원천적 법칙은 기본적으로 정의가 없으며 증명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정의라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인데 이론의 기본적 구성요소를 더욱 간단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 더욱 간단한 것이 이번에는 이론의 기본적 구성요소가 되고 말것이다. 원천적 법칙도 마찬가지다. 그 원천적 법칙이 어떤 다른 법칙에 의해 증명 가능한 것이라면 그 다른 법칙이 더욱 원천적인 법칙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항상 시작점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항상 정의없고 증명없는 부분을 이론의 출발점으로 요구한다.

 

그렇다면 정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는 것 위에 어떻게 논리를 쌓아올린다는 말인가하고 놀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조잡한 이론에서 대단해 보이는 이론들이 많고도 많은데 그 모든 이론들이 다 이렇다는 말일까? 그렇다. 모든 이론은, 정말로 모든 이론은 정의도 없고 증명도 할 수 없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점을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 고전물리학인 뉴튼 물리학을 생각해 보자. 뉴튼 물리학은 소위 질점이라고 하는 것을 기본적 구성요소로 가진다. 그리고 거기에 운동의 법칙, 중력의 법칙등이 원천적 법칙으로 합해지는 것이다. 후세에는 이 원천적 법칙들이 다른 모양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그건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질점이라는 것은 일정한 질량밀도를 가지고 있는 무한히 작은 조각이다. 고전물리학은 온 세상은 이 작은 조각들의 합으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것이 직관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운동법칙과 중력의 법칙등도 많은 경험에 의해 도움을 받았기는 하지만 결국은 직관에 의해서 발견 혹은 주장되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론의 결과들을 통해 이 직관이 매우 정확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뉴튼의 이론이 훌룡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뉴튼물리학은 너무나 훌룡한 이론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질점이 정의가 없는 형이상학적인 실체라는 것을 종종 잊어버린다. 이론을 현실과 동일시 해버린다. 이것이 어떤 태도일까를 생각해보려면 프로이드의 이론같은 것을 떠올려보라. 프로이드는 우리의 내부에 이드가 있다던가 하는 식으로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를 가정하고 그것들의 상호관계를 통해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이론을 세운다. 그런데 현대의 우리는 대부분 프로이드 이론을 고전역학처럼 굳게 믿지 않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한다.

 

“그래서 그 이드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뇌의 어느부분에 있다는 것인가. 어떤 신경세포가 그 이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정확한 정의도 없는 그것은 그냥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우리는 대개 프로이드 이론이 어떤 설명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믿을지라도 적어도 그 이론과 현실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신경과학이 발달한 21세기에 프로이드식의 뇌에 대한 설명은 힘을 잃었다. 사람들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식의 설명은 좋아하지 않으며 프로작같이 우리의 뇌신경세포에 영향을 주는 화학물질이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에 더 신뢰를 보낸다. 이것은 프로이드 이론은 한마디로 말해 실패한 과거의 이론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공한 물리이론쯤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론과 현실간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드를 생생한 실체로 받아들인다.

 

나는 뉴튼 물리학이나 현대의 뇌과학이 프로이드 이론같은 것보다 만족스러운 이론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이론이라는 점에서 모두 같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질점과 이드는 모두 형이상학적 존재라는 점에서 같다. 이것을 이해하기를 실패할 때 우리는 오직 한가지의 이론을 통해서 보이는 것만이 현실이라는 결론에 빠져들고 모든 다른 이론들은 부정되거나 무의미한 이야기로 이해하게 되고 만다. 이론을 현실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물리이론은 너무나 설득력있는 기초위에 서있는 것이지만 여전히 이론이다. 질점이나 이드나 모두 정의가 없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라는 점은 같은 것이다. 질점의 예가 잘 이해가 안간다면 양자역학을 생각해 보라. 양자역학에서는 우리는 파동함수라는것을 등장시킨다. 즉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요소는 파동함수다. 파동함수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지고 던지는 실체와는 다른 형이상학적인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쉬울 것이다.

 

다시 왜 이론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이쯤에서 나는 내가 이글을 쓰기 시작한 동기를 좀더 명확히 밝히는 것이 좋을 것같다. 나는 결코 훌룡한 이론들을 부정확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반대로 훨씬 더 불확실한 개념위에서 세워진 이론들도 나름의 가치가 있으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과학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만들어 주는 경우도 있다는 점, 나아가 미래에는 과학적 인문학이라고 말할만한 통섭적 인문학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원자나 신경세포나 파동함수나 질점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더 추상적인 개념을 이론의 근거와 원천적 원리로 삼고 이론을 전개할 수 있으며 그런 이론도 의미가 있고 과학이론과 공존하는 것이 가능하다. 뇌를 연구하는데 반드시 분자라던가 신경세포라던가 하는 개념에서 출발한 이론만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경제학자나 인지과학자, 역사학자, 지질학자들이 그렇게 해듯이 보다 상위개념을 사용하는 이론을 만드는 것도 도움이 되고 필요한 일일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은 어디까지 적용되는가.

 

이미 몇개의 예를 들기는 했지만 우리는 이제 보다 자세히 어떤 것들이 이론들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며 하나의 이론이 다른 이론과 공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이 이론에 대한 이야기들이 어디까지 적용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내가 말하는 이론이라는 것은 매우 광범위한 것이다. 사실은 실질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이론의 결과이거나 이론의 일부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가 이론의 출발점이라는 허공에 서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언어도 하나의 이론이다. 우리의 언어들 속의 단어들은 각자 다 정의가 있고 설명이 있는 것같지만 결국은 우리는 순환하는 정의를 언어 속에 가진다. 결국 우리는 정의가 없는 개념들을 문법적 질서를 지키면서 만들어 나가서 여러가지 표현을 쌓아 올리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묘사하고 우리의 마음을 그려내는 것이다.

 

일상 언어는 분명 과학보다 뛰어난 점도 있는 이론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고백이라는 것을 할 수가 있다.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 객관성위에 세워진 과학의 언어로는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그 가치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당신의 존재는 제 성적중추기관을 자극합니다라는 말로 사랑을 고백하는 인간은 거의 없다.

 

언어 역시 이론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말로 표현하기 이전의 기초적 감각인상을 제외하고 나면 모두 이론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같지만 사실 우리의 앎이란 이렇게 이론의 기본적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것을 이론으로 생각하는게 아니라 그냥 유일무이한 현실 그 자체로만 생각한다. 유물론같은 이론을 이론이 아니라 진리로 취급하며 그 결과 여러가지 존재가능한 이론들을 공존하게 만드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은 매우 지적으로 오만한 태도다.

 

예를 들어 노장에 나오는 도란 무엇인가. 이것을 과학의 눈으로 말하자라고 한 다음에 도는 물질인가, 에너지인가 하는 식으로 과학의 기본구성요소에서 그것을 보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고 따라서 그 모든 것은 무의미한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이런 식으로 예술과 문학과 음악등 여러장르의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론이 우리의 머리속에서 제거되고 그만큼 우리는 장님이 되고 만다.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안에서 평안하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 하나의 이론이 다른 이론들을 배제해 버리고 만다. 이것은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흔히 많은 예술가들은 과학이나 수학에 대해 단순히 끔찍하다고만 생각하고 그 의미를 과소평가하며 배타적인 입장만을 취한다. 그들도 그것들을 공존하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론이 서로 다르는 것의 의미

 

이론의 발전이나 비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좋은 예가 되는 것이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문제다. 두개의 이론이 서로 다를 때 우리는 흔히 그것을 앞의 이론에 대한 좀 더 정교한 수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양자역학이 나왔다고 야구공이 고전역학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게 날아가지는 않는다.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 차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양자효과는 작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에 대한 좀 더 정교한 수정이라고 말해지기 보다는 고전역학이라는 이론을 통해 우리가 보지 못하던 엄청난 세계를 새로 보여주는 이론이라고 할수 있다. 양자역학을 알게 되자 우리는 비로소 태양에서 오는 에너지도 양자론을 알아야 이해가 되고 고체가 존재하고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도 양자론을 알아야 이해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새로운 이론이란 백배 망원경으로 세상을 보다가 천배 망원경으로 세상을 보는 것같이 좀 더 정확한 근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이론이란 바로 그 망원경의 방향을 돌려서 전에는 산을 보다가 이번에는 바다를 보는 것이다.

 

양자론이 나오고 우리가 다음번으로 새로운 물리 이론을 찾는다고 하자. 이렇다고 할때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보다 정교한 양자론의 수정을 찾는다기 보다는 –그것도 중요한 문제지만- 양자론의 수준에서 우리가 완전히 놓치고 있는 어떤 것을 포함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바로 자아일 것이다. 가치와 주관을 포함하는 과학을 만들 수 있는가?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화이트헤드는 몇개의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하나의 언어만을 알 때 우리는 어떤 쪽으로 장님이기 때문이다. 다른 언어는 다른 이론으로 세상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맺는 말

 

내가 이론에 대해 말한 여러가지 것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알고 있는 문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메세지일 것이겠지만 상당히 많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들이 웃기게 들릴 만큼, 그런 걸 누가 몰라라고 쉽게 말할 만큼, 간단하게 들릴 것이다.

 

주의해야 할점은 어설프게 나는 양쪽의 중간을 택해서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 지적인 성실성, 진리에 대한 고민에 성실성이 부족한 사람이 말하는 통합이나 공존이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우리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단순히 중도를 선언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에 대한 진전이라기 보다는 문제에 대한 회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회피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자기가 뭘 믿는다는 생각조차 없이 모든 것이 그냥 당연한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는 이론들의 공존, 생각들의 공존, 사람들의 공존은 가능하지 않다. 예를 들어 실은 여자를 깔보면서 여자들에게 중요한 걸 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기본 위에서 남자들은 여자들을 잘 돌봐줘야 한다, 남자들은 좀 더 관대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그런 자신을 공평한 사람처럼 생각하는 남자, 그런 사람이 될 뿐이다. 세상에는 사실 중도라는게 없다. 서로 모순되고 배제하는 주장의 중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세상에는 더 포용력있는 이론과 관점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공존은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숙한 시각을 가질 수 있는가. 모든 것을 이론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다. 세상에는 좋은 이론이 있고 나쁜 이론이 있다. 그러나 좋은 이론도 이론이라는 점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실질 자체가 아니며 아무리 그것이 실체처럼 느껴져도 그것은 추상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삼각형이 실제로는 매우 추상적인 존재이듯이 말이다.

 

이론의 공존이란 문화적 공존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많은 언어, 많은 이론을 개발하고 쌓아올려서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려왔다. 우리가 그 이론들이 이론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그것들이 공존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않을테지만 많은 사람들은 실체와 이론을 구분하지 못하고 따라서 자신의 이론, 자신의 언어, 자신의 문화를 가지고 배타적으로 세상을 본다. 그것은 타인의 부정이되고 다른 문화의 부정이 되고 말며 다른 종교의 부정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이번에는 자신의 부정이 되고 만다. 우리는 소통과 이론만들기와 인식의 차원에서 남과 자신을 봐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역사상 가장 빨리 문화적 파급이 이뤄지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이 공존의 능력이 아주 중요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를 지키면서도 남과 소통하고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철저히 고립되어서는 살 수가 없고 무엇보다 이 세상의 다양성에 대처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대책없이 개방하면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거나 원하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그것은 마치 절에 가서 바베큐파티를 하면서 내가 무슨 잘못을 한다는 말인가 하는 식의 태도가 되기 쉬운 것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면에 대해서 장님이 된다. 이것은 자기가 아플 때에는 비명을 지르면서 태연히 다른 사람을 칼로 찌르는 격이다. 누군가를 구한다고 하면서 태연히 그 사람을 약탈하는 식이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그저 어설프게 중도를 택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다. 그런 식으로는 세상이나 나라는 커녕 자신의 가정 아니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이론을 통해 세상을 본다. 이론의 확장이란 시야의 확장이다.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의 한계를 모를 때 우리는 그것을 확장할 가능성을 잃게 된다. 우리는 그 이론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화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럴때 왜 우리는 이런 이론을 가졌고 다른 사람은 저런 이론을 가졌는가, 왜 나에게 세상은 이렇게 보이는데 남에게 세상은 저렇게 보일까에 대해 보다 더 광범위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서로 다른 이론을 모두 포괄하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을 포괄할 수 있는 능력, 더 많은 관점들을 포괄할수 있는 능력은 자기를 지키는 능력이다. 그는 이론에 대한 이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넓은 범위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주제별 글모음 > 무분류 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실과 진실을 보는 과정  (0) 2013.11.21
논쟁에 있어서의 사실의 역할  (0) 2013.09.13
세계는 변한다.  (0) 2013.06.20
인식과 욕망  (0) 2013.05.26
레밀리터리블과 웃음의 가치  (0) 2013.02.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