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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인식과 욕망

by 격암(강국진) 2013. 5. 26.

2013.5.26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라는 말은 유명하다. 그러나 이 말은 그 반대도 진실인 것같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싫어하는 것도 본다는 것이다. 싫어해도 신경쓰이는 것들이 있지 않던가. 이런 말들에서 진실을 찾고 생각을 해보면 결국 표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핵심에는 우리가 본다던가 인식한다던가 하는 일이 그저 외부의 것을 수동적으로 느끼는 행위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우리가 뭘 보고 듣게 될 것인가를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고 변화시킨다는 사실이 들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들을 우리가 선택한 방식으로 해석해서 세상을 본다.

 

그런데 그래서 결국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우리가 관심을 가진 대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좀 색달라 보일지도 모르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며 우리 자신의 일부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우리가 보는 물건들, 자동차나 음식같은 것을 지나 공원의 나무며 꽃이며 하늘의 구름도 모두 우리의 욕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모두 우리의 일부라는 것은 꿈에 대한 묘사에서 잘 표현된다. 우리가 꿈을 꿀때면 우리는 그 안에서 여러가지 물건들을 보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되기도 한다. 그것은 실제와 같아서 우리는 어떤 방문을 열기 전에 그 방안에 있는 것을 미리 보지 못하고 남과 대화할 때면 그 사람의 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실은 잠에서 깨어나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꿈에서 내가 누군가와 만나서 나눈 대화란 실은 나와 나 자신의 대화였을 뿐인 것이고 꿈에서 내가 본 것들은 모두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들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잠에서 깨어났다고 했을 때의 상황이다. 장자가 호접몽의 이야기에서 누가 누구의 꿈을 꾸고 있냐고 물은 적이 있기도 하지만 사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장자의 질문은 상상 이상으로 현실적인 것일 수 있다. 우리는 꿈에서 깨어났으므로 이제야 말로 외부의 것들이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며 꿈을 꿀 때와는 다른 상황에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과연 그런 것일까. 이 답은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나라는 개념과 이어져있다. 즉 나라는 것을 뭐라고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 답은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꿈속의 나는 꿈에서 깨어난 나보다 작은 나라고 말할수 있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그 꿈속에서 만난 타인들조차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알지만 꿈속의 나는 그걸 아는 깨어난 나라는 존재보다 작은 존재다. 마찬가지로 꿈에서 깨어난 나도 우리가 어느 범위까지를 나라고 느끼고 있는가에 따라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큰 나라는 차원에서 말하면 우리가 만나는 타인들은 모두 나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들을 보고 만나고 있다. 나와 세상을 포함하는 우리의 의식이라는 것도 결국 나와 세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함께 만들어 진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보는 것들은 항상 우리의 일부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 결국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만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욕망들을 만날 때 우리는 문제에 부딪힌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편안하게 공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파괴하거나 작은 나에서 떨어져 나간 그 욕망의 조각을 단단히 움켜쥐어서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공원에서 만난 작고 예쁜 꽃이나 나무를 보자.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럴때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고 그것을 뽑아다가 내 옆에두고 싶어하는 감정을 느끼곤 한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만날 때 그것을 소유하고 독점하고 싶어하게 되곤 한다.

 

그러한 소유욕, 독점욕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꽃과 나무는 죽어버리기 쉽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에 얽매여 결국은 불행해 진다.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죽어버리는가 하면 그렇지 않아도 누가 그것을 가져갈까 그것이 없어질까 불안에 떨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욕망을 멀리하고 파괴하는 쪽으로 간다. 아예 아무 것도 보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우리를 유혹할 어떤 것도 없는 곳에서 조용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파괴다. 적어도 자기의 성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욕망앞에서 괴로워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것을 피하고만 살거나 그런 감정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은 성욕의 문제는 거세를 해서 해결하고 맛있는 음식의 맛에 빠지는 것을 혀를 잘라서 해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부러 유혹이 많은 환경을 찾아서 그 유혹들과 싸워 이기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겠지만 깊은 산중에 홀로 앉아서 아무 것도 보고 듣지 않은채 평정한 마음을 유지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인 것이다. 완전한 평온의 상태란 결국 생명이 죽는 상황이다. 생명은 혼돈속에서만 살아있게 된다. 조용한 곳을 찾아 평정한 마음을 찾는 다는 것은 항상 나쁜 선택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렇게 위대한 길이라고 말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건 결국 도피일 뿐이기 때문이다. 도피도 훌룡한 선택이 될때가 있겠지만 도피가 늘상 좋은 해결책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침상위에서 쉬어야 하기도 하지만 결국 운동을 하고 바깥을 뛰어다녀야 한다.

 

우리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여기 한그루의 매화나무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이다. 눈을 떠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도 안좋고 눈을 감아 그것을 보지 않는 것도 안좋다면 결국 어느 쪽도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물론 매화나무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도 그렇게 한다. 세상을 보자니 세상이 나를 흔들고 그렇다고 세상을 등져버리자니 그것도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서 괴롭다.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결국 세상과 불화하고 만다.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눈을 떳다가 감았다가 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부정들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랑을 가지고 생명을 보는 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매화나무를 본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하나의 긴 사연과 역사를 가진 생명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것이 계속 그 생명을 유지해 가기를, 번성해 가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그 매화나무와 공존할 수 있다. 그럴때 우리는 섯불리 그 나무를 소유하려하거나 가위질을 해서 내 맘에 드는 방식으로 마구 바꾸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성숙한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보는 눈과도 같다.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시기심을 일으킬까 혹은 그런 사람들에게 휩쓸릴까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볼 때는 두려움이 없다. 자식을 시기하지 않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자식에게 직접적으로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잘 자라주니 고맙고 잘 살아가니 고맙다. 그 자식이 잘 자라나고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부모에게는 아름답고 고마운 보답이다. 결국 이 세계의 더 많은 부분을 그 부모의 정신적 육체적 자식들이 채워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과 자신을 둘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식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생각한다. 가족간의 사랑이라고 해도 집착이나 이기심으로 얼룩지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성숙한 부모는 자식을 통해서 진짜 사랑을 하게 된다.

 

세상과, 다른 사람과, 물질과 공존하고 불화하지 않는 길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세상과 우리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느껴야 한다. 세상은 우리 자신이고 우리의 욕망의 화신들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서 대화를 할 때 그 누군가란 결국 나의 욕망인 것이다. 그 욕망을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세상과 불화를 면할수 있는 길일 것이다. 그 매력에 흔들려서 자기를 잃을까봐 거부하지도 말고 반대로 그것을 소유하고 독점하여 내 것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빠지지도 말고 그것이 잘 자라나기를, 잘 생존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관심사는 변해가는 법이다. 그래서 때로 죽도록 좋아했었던 어떤 것도 시간이 지나서 보면 아 맞아 그래 그런 적도 있었는데 하고 생각하게 되는 일이 많다.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무수한 욕망들에게 한마디 축복의 기원들을 던져주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내 곁에 있지만 언젠가는 망각속으로 던져져서 살아가게될 나의 욕망들이여, 번성하기를, 아무쪼록 잘살기를,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축복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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