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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말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는가

by 격암(강국진) 2012. 12. 28.

2012.12.28

말할수 없는 것은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거야 당연히 존재하지 라고 하던가 뭐 그런 애매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논하나 그런 것은 실상과 무관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20세기 철학의 흐름으로 보면 다른 대답을 이끌어 내기 쉽다. 20세기 철학의 양대 조류는 현상학과 분석철학으로 이중 미국의 주류철학이 되고 있는 것이 분석철학이고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 무언가를 알 수는 없으며 우리의 사고는 항상 언어를 통해서 이뤄진다는 것, 그래서 언어가 철학의 대상이라는 것이 바로 분석철학의 입장이다. 통상 우리가 가진 철학의 문제라는 것은 이 언어의 혼란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분명한 의미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쓰거나 기성언어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혼란을 제거하는 것이 철학의 문제라는 것이다.

 

반면에 현상학에서는 언어이전의 경험이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그런 경험이 우리가 확고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분석철학은 훗설이나 하이데거 같은 현상학자의 주장은 의미도 없는 미신이나 신비주의라고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는 사회로 우리는 무의식중에 이런 분석철학적인 입장의 영향력아래서 배우고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분석철학적 입장에 대한 불만

 

사실 내가 이미 쓴 이 앞의 두 문단자체가 분석철학적인 사고라고 할수 있다. 이런 것을 철학의 개괄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나는 세상에는 이러저러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같은 말을 나열하면서 이말은 개념적으로 이런 것이고 저 말은 개념적으로 저런것이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에 익숙한 사람은 세상일을 설명하고 보는 입장, 접근하는 입장은 늘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할법하며 이러한 설명에서 큰 논리적 문제가 발견되지 않을 때 그 결론을 믿을 만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20세기 철학을 문장몇개로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어서 많은 정보를 주는 듯한 이런 논의는 뒤집어 보면 전혀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으며 그저 단어와 단어의 나열에 불과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런 류의 사고와 철학적 소개에 대해 가지는 반감의 주된 부분이다. 그런 식의 설명은 나도 종종 하는 것으로 필요악이라고 할수는 있지만 사실 그게 전부 인 것같아도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도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까지 말할수 있다.

 

우리가 통상 철학 공부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나도 어렸을때 그랬지만 우리는 종종 철학을 공부한다면서 철학사를 읽거나 위의 한두 문단에서 설명한 것같은 철학의 분류를 공부한다. 분석철학자로 이야기되는 러셀이 쓴 철학사를 읽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런 책에는 니체는 이러하고 플라톤은 저러하다는 식으로 철학자와 철학학파들이 분류되어 나열된다. 마치 종교에는 불교, 힌두교, 기독교가 있으며 불교는 이게 특징이고 힌두교는 저게 특징이고 하는 식으로 설명을 나열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나자신을 포함해서 그렇게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손톱만큼도 지혜라고 불리울 만한 것에 접근하지 못하며 오히려 더 어리석어 진다. 뭔가를 배우는 듯하지만 가면갈수록 누군가 유명한 철학자가 한 말을 녹음기처럼 외울 뿐이다. 물론 그 뜻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생각해 보면 볼수록 아는 것이 없다. 마치 미술사를 공부한 것과 멋진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인 것처럼 이런 종류의 철학공부는 강단에 가서 지식을 팔거나 남에게 잘난척할 때는 할말이 많도록 도와주지만 내 인생의 선택문제에 대해서, 혹은 진학이나 연애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에게 한마디 쓸만한 조언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이런 종류의 분류나 언어의 명확화는 종종 마치 솜씨좋게 멋진 그림을 화폭에 그리는 것을 연상시킨다. 하나 두개의 단어가 새로 정의되고 사용되어질 때마다 이리저리 정교하게 선을 그어서 전체 그림을 완성시키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정교한 언어로 만든 탑은 그 언어에 어울릴 만한 체험이 동반되지 않을 때 전혀 엉뚱한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적인 석학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이것이다라고 정리한 20페이지짜리 소개를 읽을수 있고 그런 정리가 매우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소개가 그 것을 읽는 사람에게 정말 도움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과는 별개의 것이다. 서울관광에 대한 가장 좋은 소개서가 서울관광을 대체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비트겐슈타인 본인만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인데 자신의 뜻을 몇줄로 전달할 수 있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거기에 없는 것.

 

그럼 그런 분석철학자적인 설명에서 생략되어진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현상학적 조류의 일부로 이야기되는 실존주의 철학을 보면 알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주체적인 입장, 인생의 질문이다. 즉 우리 스스로가 가진 질문에서 시작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진전을 이뤄나간다는 태도를 취하기 보다는 남들의 체험과 주장들을 잔뜩 모아다가 그것에서 일반화를 하고 추상화를 시킨다. 내 인생의 문제를 논한다기보다는 제3자적인 입장에 처하게 만든다.

 

어떤 남자가 아내와 말다툼을 했다고 해보자. 그 남자의 상황에 대해 우리는 그 남자는 이런 저런 말을 듣고 이런 저런 상황에서 화를 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 남자의 상황을 이차적으로 간략하고 단순화하고 분류한 어떤 단어들을 통해서 그 상황을 이해하고 그에 대해 그 남자는 이렇게 해야 했다던가, 저건 나빴다던가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차적 추상화를 통한 이해는 그 상황에 처한 그 남자의 직접적 체험과는 거리가 있고 때로 그 거리는 아주 멀 수도 있다. 따라서 좋은 남편되기에 대한 일반론이 들어둬서 나쁠 것은 없지만 그런 지식은 직접적 체험과 결단, 행동과 연결되지 않을 경우 도움이 되질 않는다.

 

부부생활이라는 주제도 이런데 이 세상에 대한 가장 광대한 범위를 다루는 철학의 문제에 대해 무한한 압축과 추상화로 단어를 나열한 것을 듣고 보는 일은 실로 엄청난 양의 체험과 고민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소용이 없는게 아니라 해롭다.

 

그렇다면 그 체험과 고민은 철학사를 열심히 읽고 철학자들에 대한 개괄서를 열심히 읽고 심지어 그들의 원전을 열심히 읽으면 생길것인가. 내가 말하는 체험과 고민이란 나의 체험이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솔직한 고민이다. 진짜로 살아본 경험이다. 그런데 그런 추상화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런 경험은 적어진다. 왜 이 세상에 철학자라고는 단 한명도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자기 머리로 먼저 생각하고 자기 눈앞의 상황을 느끼고 보려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할 때만이 우리는 조금이라도 지혜라는 것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런 고민이 쌓일 때만이 우리는 앞선 사람들의 고민의 흔적을 읽으면서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철학운운 하면서 논리적 명증성 따위나 강조하는 것은 매우 빈약한 것이다. 특히 세상경험없는 어린 학생들이나 젊은이가 머리를 박터지게 노력해서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사고해 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건 마치 데이트 경험한번 없는 사람이 행복한 결혼을 꿈꾸며 연애에 대한 이론서만 죽자고 파느라고 데이트 한번 안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조류는 멀리서 보면 터무니 없지만 전문화가 이뤄진 현대에서는 일상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자전거를 전혀 못타도 자전거 타기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자전거 타기의 석학으로 불릴 수 있으며 실제로는 자전거타기의 달인이라도 사람들에게 네가 자전거에 대해 뭘 아는가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전문화라는 것이 일상화된 현대에 흔하게 있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그저 이런 저런 이름들을 외워서 떠드는 능력을 전문가의 능력이라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진화, 발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언어적 명증성이란 말의 문제를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발전의 문제다. 과학의 발전은 종종 터무니 없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시간이라던가 질량이라던가 하는 것이 원래 무슨 뜻이었나에 상관없는 정신적 비약을 할 때 우리는 과학의 비약적 발전을 만들게 된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본래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보이는 논리적 일관성을 깨고, 뻔히 눈에 보이는 증거를 무시하고 새로운 것을 생각해보는 시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다른 식으로 표현해 보면 말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믿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우리의 패러다임안에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편견없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잘 정리하고 분류해서 세계를 보고 관념을 만들고 이름을 만들고 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편견없는 관찰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뭘 볼 수 있는가는 바로 우리의 이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지식에 달려 있다. 이론이 인식을 만들고 인식이 이론을 만든다. 그 관계는 상호순환적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아는 것, 보이는 것만을 기준으로 논리적 일관성과 명확성을 따지는 것은 반대로 우리가 지금 보지 못하는 것을 더더욱 보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있다.

 

그러므로 발전을 위한 전제 조건은 우리가 말할 수 없고, 정의할 수도 없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여전히 거기에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이름을 붙이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그전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가 그게 뭔데라고 물으면 우리는 우리가 새로운 패러다임에 눈뜨기 전까지는 즉 그게 뭔지 명확히 언어로 표현하기 전까지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은 없다. 그런 것은 신비주의고 미신이다라는 태도만을 가질 때 이번에는 거꾸로 그런 태도가 우리의 발전을 막는다. 발전하기위해서는 무지와 불확실성에 대한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지금도 미래에도 언제나 유리실험대위의 한마리 아메바처럼 제한된 존재이며 무한한 불확실성에 둘러쌓여 있는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면 내가 분석철학적인 입장을 비판했으니까 그렇다면 그에 반하는 현상학적 입장을 찬성하고 지지하는 것일까? 그렇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로 분석철학적 입장의 문제를 보여준다. 세상의 철학을 분석철학파와 현상학파로 둘로 나누고 나는 분석철학파가 아니라고 말하면 논리적으로 현상학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에서는 우리가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있다는 가정이 들어있고 우리가 만든 분류가 결국 인위적으로 만든 단어에 불과하다는 것이 망각되어져 있다. 그런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 스피노자는 스피노자 철학을 했을 것이고 나는 나의 철학을 하다가 죽게 될것이다. 그 점은 어린 아이부터 남녀노소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본인이 본인을 철학자로 생각하건 말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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