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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깨어있는 시민이란 무엇인가?

by 격암(강국진) 2012. 11. 22.

2012.11.22.

노무현 대통령이 묻힌 봉하마을의 작은 비석에서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고 씌여있다. 그것은 물론 노무현대통령이 살아생전에 한국의 장래를 위해 뭐가 필요한가를 생각한 것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될법한 말을 골라놓은 것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

 

도대체 깨어있다는 것이 뭔가? 그것은 세금잘내고 교통신호 잘지키고 원전에 반대하거나 찬성하고 FTA에 반대하거나 찬성하고 종합부동산 세금이나 세종시 행정수도에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것인가? 한국사회가 시장의 힘에 의해 강하게 지배받고 있으며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 가서 보면 규칙이란게 이렇게든 저렇게든 일괄적으로 한다고 해서 답이 되는게 아니라는 것을 목격한 노무현은 결국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주제로 돌아왔다.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걸로 그를 비판한 사람도 많았는데 그에 대해 그는 규칙을 자율화한다거나 규칙을 더 만든다거나 하는 게 일괄적으로 좋다나쁘다를 말하는게 의미없더라고 답한다. 그리고 임기후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는 농촌을 만들고자 하는, 봉하마을 가꾸기를 하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는 서거 전에는 세상은 정치로 바뀌는게 아니더라같은 말까지 남겼는데 이는 더더욱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주제에 깊은 신뢰를 보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깨어있다는건 뭘까.

 

자본주의의 문제, 세계의 문제

 

깨어있다라는 단어의 뜻을 어떤 문맥으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집이나 우리 아이의 문제를 잊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세계사나 세계경제라는 큰 그림에서 보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요즘 사방에서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고 세계 불경기문제가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의 문제가 뭐고 그것은 우리 개인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자본주의는 적어도 두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는 점점 더 거대한 단일한 시장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본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많은 규칙에 따르게 만들어 결국 점점 더 많은 걱정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문제는 문명 특히 서구문명의 문제고, 모더니즘의 문제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미 백년전부터 사람들을 근심하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 앞에서 그 문제가 새삼스러운 것은 전세계 정부가 전부 파산 직전에 있을 정도로 터무니 없는 빚을 지고 있어서 이것이 지속가능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부동산거품이 붕괴하면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한다. 비록 지난번 세계 대공황은 다시 호황이라는 사이클로 자본주의의 생명을 연장했지만 이번에 부풀어 오른 이 거품이 세계적으로 파열했을때 다음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다음이 가능하다고 한들 다시한번 거품붕괴와 거품키우기라는 이 사이클을 반복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글몇줄로 정리해 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글의 문맥에서는 왜 우리가 깨어있는 사람이라는게 뭔가를 생각할때 자본주의의 위기를 생각해야 하는가하는, 그 양자간의 관계를 납득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먼저 거대한 시장이 뭘 만드는가를 보자. 거대한 시장과 획일화는 거대한 크기의 패배자 집단을 만든다. 세상은 1등만 기억해 주는데 그 1등이 반에서 1등이라면 그나마 반마다 1등이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 1등이 세계 1등이라면 결국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기억되지 않으며 패배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등이 모든 걸 독식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죽거나 활력을 잃는다.

 

작은 집단의 경우 1등은 그것을 '느낀다'. 그러니까 경주부자 무슨무슨 씨는 흉년에는 곡식을 푼다같은 전설이 내려오는 것이다. 그 고장이 회복불능의 피해를 입으면 그 고장의 1등부자도 계속 잘살 수 없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대한 시장이 이뤄지면 1등은 패배자들을 느끼지 못한다. 미국에 앉아서 동남아시아 소년들이나 중국노동자, 이라크 시민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혹은 연봉 10억짜리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 미국의 빈민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은 가질수 있지만 그것은 내 가족이나 나 자신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결국 좁은 통속에서 산다. 남의 일을 생생하게 느껴질 수가 없으며 1등은 결국 전체 사회와 분리된다.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본은 끝없이 잔인해지는 것이다. 시장논리는 원래 그런거라고 하면서. 물론 사람들의 증오는 날로 심해져만 간다.

 

얼마전에 SBS다큐에서 바다 한 가운데 사는 원시 부족사회같은 사회를 보여준 적이 있다. 다른 곳의 아이들도 어느정도는 그렇지만 그곳의 아이들은 가진 것이 없어도 얼굴에 걱정이 하나도 없다. 왜냐면 그들은 커서 뭔가가 되려고 할 필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취직걱정을 하겠는가. 비싼 집이나 자동차를 살 돈을 모아야 남에게 자랑을 하고 떵떵거리며 살거라고 그걸 얻으려고 고민하겠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대부분의 불행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것이다.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욕망하게 하고 그걸 얻지 못해서 고민하게 한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만도 너무나 많은 것이 필요하게 만든다. 그들의 불행과 욕망이 바로 노동력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난한 나라에서 노동력착취를 위해 상륙하는 자칭 선진국의 자본주의자들은 우선 먼저 그 나라의 사람들을 욕망하게 만든다. 결국 그 욕망에 자신이 가진 것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노예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중에 특히 나쁜 것이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적어도 거의 불가능하다. 도시화가 싫다고 모든 문명을 포기하고 고립되어서 살면 그게 해결책이 될까? 이 문명의 문제는 우리나라나 일본이 겪었던 개국이나 쇄국이냐의 싸움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개국해도 망하고 쇄국해도 망한다. 해결책은 자기를 발견하는 것밖에 없다.

 

결국 자본주의의 몰락이라는 문명사적인 위기속에서 더더욱 중요해 지는 주제, 더더욱 분명해 지는 문제는 이 문제들이 어떤 시스템의 개량으로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석유의 고갈을 연비가 좋은 차로 해결하겠다는 것과 같다. 연비가 좋으면 기름을 좀 덜쓸지 모르나 더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게 되는 속력이 연비절약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에 연비가 아무리 좋아져도 전체적인 기름소비량은 폭증하며 석유고갈의 문제는 없어지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근본이 문제일 때 더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근본적 위기는 해결되지 않는다. 미래세대에게 빚을 전가하는 것이 끝없이 계속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문제의 핵심은 시스템의 개량이 아니라, 다른 시스템이 아니라, 시스템 그자체다. 해답은 다시 자기를 발견하는 것밖에 없다. 인간을 강화하는 것밖에 없다. 예를 들어 부동산 가격상승을 막기 위해 이런 저런 법을 쓸 수는 있고 사람들은 이런 저런특효약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강한 부동산 억제책은 독약이다. 회충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독약을 먹다가는 회충만 죽는게 아니라 사람도 죽는다. 이 세상의 어떤 법이나 시스템도 그 자체가 좋은 사회를 보장해 주지 않으며 결국 그 사회의 인간들이 가지는 윤리적 수준이 그 사회의 행복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이 요즘 점점 더 분명해 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메세지도 아니다. 경찰을 늘려서 도둑을 줄이려고 하면 경찰에 안걸리면 훔쳐도 된다고 하기 쉽다. 이것은 노장철학에도 나오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적어도 현존하는 사회 시스템, 현존하는 세상사는 법에 대해 그 문제가 뭔지를 느낄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쉽지 않다. 길게 설명해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말하자면 도박을 하는것이 인생을 망친다고 설명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도박에서 이기는 법이 뭔지만 기대하는 꼴이다. 좀 귀를 기울여 듣는가 하다가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도박에 이긴다는 걸까 하는 질문에만 빠져있기 때문에 도박장을 나간다라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깨어있다라는 것은 도박을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도박장을 나가는 것이다.

 

인간의 내적 강화

 

여러번 말했지만 깨어있다라는 것이 인간의 내적강화라는 것은 알고보면 새로운 이야기도 숨겨진 비밀도 아니다. 말했듯이 모더니즘의 위기라는 것은 이미 백년의 역사는 가지고 지적되어져 온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깨어있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아는 것과 깨어있는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말하는 것이 서로 다르듯이 인간의 내적강화라는게 뭘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려지고 있지 않을 뿐이다.

 

앞에서 말한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말하는 과학과 인문학을 결합하고자 하는 통섭을 위한 노력과도 연결되어져 있고 종교와 과학의 화해라는 주제와도 관련되어져 있다. 인간의 내적강화라고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과학이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말하는 종교도 아니다. 적어도 도킨스가 비판하는 종교같은 것들은 아니다. 그것은 듀이나 쉬뢰딩거가 말하는 과학의 진화다. 그것을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을 넘어서 있는 과학으로 말할 수도 있고 신흥종교나 신비주의로 말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어느 쪽에도 규격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모든 것을 철학이라고 불렀던 옛날시대로 돌아가는 철학이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철학이라는 단어도 매우 오염되어 있는데다가 이름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적 교훈이다. 그래서 이름이 없으니 도를 추구한다는 구도로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글의 주제를 환기시켜보자. 깨어있다는 게 뭘까. 혹시 그래 우리가 깨어야지 라고 쉽게 말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아직도 그 깨어있다라는 것이 만만하게 보이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렵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은 현대의 과학기술은 자본주의와 문명의 전파력을 매우 크게 만들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우리는 암의 치료제가 제아무리 비싸고 구하기 어렵다고 한들 반드시 사야 하는 입장에 있다.

 

인간의 내적강화를 통해 우리가 성취하게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법이다. 우리가 모든 세계시장을 파괴하고 다시 촌락안의 몇십명끼리 살아가는 삶을 선택할 가능성은 없다. 지구반대편의 사람들과도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 앞에 놓인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문제는 그런 커다란 시장, 커다란 테두리는 쉽게 비인간적인 힘을 발휘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마취시키고 죽인다는 것이다.

 

결국 소수는 세상을 등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인간은 그런 거대한 테두리가 주는 압력을 견뎌내는 내적인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그런 힘을 주던 것이 바로 종교나 인문학이다. 신앞에 홀로서고, 내적인 질문에 파고드는 인문학적 수련을 하는 동안에 사람들은 문명의 독을 견뎌낼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의 세계문명의 독은 어디 제단앞에 가서 돈내고 기도하는 그런 것으로 해결될 차원이 아니라는데 있다. 자본가들의 배가 해안에 당도했는데 곰신이나 호랑이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그런 종교가 그들을 지켜줄 수는 없다. 자본가들은 자본주의의 유혹적 독약을 가지고 있을 뿐아니라 과학기술문명이라는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강력한 종교도 가지고 있다. 뉴튼이나 아인쉬타인의 주술적 힘앞에서 곰신이나 호랑이신 같은 낡은 신들은 아무 힘이 없다.

 

맺는 말

 

우리는 자본주의를 찬성하거나 반대함으로서 어떤 해결책을 발견하거나 깨어있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과학에 대해서도 그렇다. 우리는 어떤 메뉴얼을 따라하거나 어떤 책을 암기함으로써 깨어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문제는 바로 그 메뉴얼을 따라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지독한 약들을 계속 먹어서 미각이 마비되었고 그때문에 죽을 약을 먹게 될 가능성이 증대한다고 할 때 해결책은 해결책이 된다고 생각하는 다른 약을 먹는게 아니라 약을 먹기를 쉬는 것일 것이다.

 

현대문명에서 사는 사람들은 개념과 논리에 중독이 되어있다. 그래서 필요없는 지식이나 논리도 잔뜩 머리에 집어넣어서 퀴즈대회같은 것도 열고 거기서 이기면 칭찬도 많이 한다. 너무나 그렇게 많이 한 나머지 인간이 복제된 인형같고 윤리의식이 실종되었으며 논리의 중독, 논리의 노예화가 되었는데도 그런 해결책이 될 수 있는 논리를 찾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들어야 할 말이 있다면 더 명쾌한 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성에 대한 것, 무지에 대한 것일 것이다. 아는 것을 지우고 아는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자기가 뭘 원하는지가 작게나마 들릴것이고 뭐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더라 하는것이 기억날 것이다. 그래야 덜 걱정하고 거대한 테두리가 주는 압력에 눌려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이 생각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애들이 배고프다는데 어른들이 밥을 주는게 당연하다. 이런게 깨어있는 것이다. 단순한 걸 단순하게 못보고 수없이 많은 차별과 칸막이와 권위주의로 변명하고 왜곡해서는 결국 1+1이 2가 된다는 것은 폐하가 결정할 문제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게 문제다. 누가 이렇게 생각할까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생각 안하는 사람이 대단한 시대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깨어있는 사람이 더더욱 필요한 시대다. 우리는 근심은 많고 답은 보지 못한다. 답을 계속 외워만 왔기 때문이다. 좋은 시스템이나 법률이 행복한 마을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좋은 사람들이 있는 마을이 행복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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