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6.28
한두달 전에 나는 인생의 의미를 논한다는 책들을 기증받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들에 대한 소감을 쓰면서 그 핵심적 문제가 무한의 저주라고 불리는 문제라는 것을 설명한 바 있는데 그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잘 다루지 못하고 남은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개운치가 않았다. 따라서 그와 관련된 생각이 난 김에 그것을 다시 정리해 보는게 좋을 것같다.
이야기의 벽
영화를 하나 본다고 하자. 주인공은 아파트에 사는 한 청년인데 그 이웃에는 괴상한 노인이 하나 살고 있다. 그 괴상한 노인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청년은 이사를 가고 싶지만 그것도 형편이 안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 청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그 영화의 주된 이야기 흐름이다.
이 이야기에는 안쪽이 있고 바깥쪽이 있다. 안쪽이란 그 청년이 이 노인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는가 하는 부분이다. 바깥쪽이란 도대체 이노인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이야기의 안쪽과 바깥쪽이란 구분은 다르게 말하면 질문과 질문이 행해진 이유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이야기의 기본적 갈등이란 하나의 질문이라는 것이다. 이 무대포인 노인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라는 것이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며 이 이야기의 안쪽이다. 이 질문이 행해진 이유나 이 이야기의 바깥쪽은 이렇게 된다. 그런데 왜 다른 질문대신에 하필 그런 질문을 하는가. 그 노인은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의 안쪽만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바깥쪽의 의미나 바깥쪽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게 쉽지 않고 그 중요성을 종종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이야기의 바깥쪽이 대개는 이야기의 안쪽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모든 이야기는 인생과 세상의 광대함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바깥쪽이란게 뭔지 설명하는 것이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므로 그걸 다시 한번 해보자. 최근에 다시본 그랜 토리노라는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데 그 악과 우리는 어떻게 싸울것인가, 그 악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이 이야기의 중심적 질문으로 등장한다. 우리 앞에 악당이 있다, 악이 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 도망칠까 아니면 싸울까. 너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이야기의 안쪽이다.
그런데 그 악이란게 뭘까. 그 악이란 시커먼 암흑이며 무지다. 이 악은 왜 탄생하는 가는 이 이야기에 없다. 이야기는 암묵적으로 물론 그들도 나름의 사연이 있겠지만 우리는 결국 우리를 지켜야 하고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 아닌가. 여기서 시작된다. 세상에 악은 있다와 같은 이런 첫번째 출발점에서 출발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이런 더이상 왜라는 것을 묻지 않는 이런 출발점을 가지는 것을 우리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인상을 받는다.
나는 바로 더이상 왜를 묻지 않는 이 부분을 이야기의 벽이나 테두리라고 부른다. 이야기의 벽이나 테두리는 우리의 무지가 서 있는 곳이며 우리가 더이상 묻기를 포기하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이야기의 출발점이며 끝이고 세상과의 경계선이다.
왜 이야기의 벽은 중요한가.
뉴욕의 낙서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지금도 그렇지만 뉴욕의 낙서가 큰 골치거리였던 적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할 수도 있다. 뉴욕에는 낙서꾼들이 있다. 이들이 뉴욕을 더럽게 한다. 즉 이들은 악이다. 이 악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라고 묻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악과 싸워 이기면 뉴욕은 깨끗해 질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우리는 이야기의 벽너머에 대해 잊어버리기 쉽다. 즉 낙서꾼들이란 누구인가, 그들은 왜 낙서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잊혀지고 낙서꾼이란 악이 존재한다, 이 악에 우리는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하는 질문에 집중하게 된다. 낙서로 고통받는 것이 현실이므로, 우리는 낙서꾼의 존재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낙서꾼이란 악이 존재한다라는 말을 하는 순간 우리는 종종 거기에 이야기의 벽, 무지의 벽을 세운다. 즉 그것은 더 이상 의심할필요없는, 우리의 질문이 멈춰도 괜찮은 장소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갈 때 우리는 낙서꾼들을 어떻게 검거할 것인가, 그들에게 어떤 처벌을 내려야 그들은 낙서를 멈출 것인가, 누가 낙서를 못하게 낙서꾼들을 감시할 것인가와 같은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인간 심리에 대한 것인데 인간은 더러운 환경에서는 환경을 더 더럽게 하지만 깨끗한 환경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즉 낙서가 하나도 없고 길에 쓰레기 하나 없는 곳에서는 거기에다가 낙서를 하고 쓰레기를 버릴 때 좀더 조심하게 되지만 좀 지저분한 곳에 가면 거기서는 아무생각없이 낙서를 하고 쓰레기를 버려서 더 더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심리에서 출발하면 낙서없는 뉴욕을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애초에 깨끗한 거리를 유지하면 된다. 즉 아주 깨끗한 거리를 만들고 그걸 유지 관리를 하면 사람들도 낙서를 안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좀 더러워지면 악순환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 뉴욕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악이란 어떤 임계점 이하로 뉴욕이 더럽다는 사실 자체다. 어떤 임계점 보다 깨끗하면 낙서를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낙서를 한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벽이 다르다. 그리고 낙서에 대처하는 법이나 누구를 원망하는가와 같은 것이 전혀 다르다. 후자의 이야기에서는 누군가를 처벌한다던가 더 열심히 감시한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다. 중요한것은 처벌이나 검거가 아니라 깨끗함의 유지관리수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물론 낙서를 없애는 법이 아니라 이야기가 가지는 벽의 역할과 중요성이다. 누군가가 하나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의 벽, 테두리를 인식하고 그 무지의 벽너머를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이야기에 갇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을 때 그 사람은 그 이야기에 갇히게 된다. 그 이야기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결론 이외에 다른 어떤 논리적 결론도 가능하다고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그 이야기에서 흘러나오는 결론들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것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는 물론 항상 아무거나 막 믿지는않아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항상 그렇게 한다. 누군가가 여기 하나의 악이 있다라는 말을 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지당한 현실로 보일 때, 우리가 그 말의 너머를 꽤뚫어보려고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야기에 갇히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거기에 갇혔다는 느낌조차없다는 것이다. 그건 당연한 것이니까. 생생한 현실이니까. 나는 한국인이고 나는 인간이고 여기는 지구다. 나는 여기에 있다. 이런 것처럼 모두 생생한 현실이고 당연한 것이니까.
거기에 무지의 벽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질문들을 포기한 적이 없다. 다만 질문할 것이 없을 뿐이다. 혹은 당연한 것을 질문하는 것은 미친짓이다. 그러므로 나는 갇힌 적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모든 결과들은 이야기의 안쪽에서 얼마나 치열하고 엄밀하게 사고했는가 이전에 사실은 이야기의 벽에서 이야기의 바깥쪽에서 만들어 진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그 세계의 법칙에 따르게 되고 결과는 거의 정해져 있다. 그 세계에서 다른 이야기들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전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위에 예에서 보면 한 쪽의 경우는 우리가 악으로 파악한 낙서꾼들을 처벌하고 그들을 없애고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후자의 경우는 낙서꾼들은 전혀 다른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이제 거의 피해자에 가깝다. 그들은 그저 우리의 순진한 이웃일 뿐이다. 더러운 환경이 그들의 인간본성을 작동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든 것이다. 이제 낙서꾼들을 미워하기 보다는 그런 더러운 환경 환경을 용인한 우리 모두에 대해 반성해야 할 판이다.
당신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제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스크린이나 소설책에서 눈을 들어 우리 주변을 둘러볼 차례다. 영화나 소설은 이야기가 가지는 한계를 상징이라도 하듯 테두리가 있는 스크린이나 테두리가 보이는 책속에 담겨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는 거기서 어떤 테두리를 보지 못한다. 나는 여기에 있다. 나는 이야기속에 출연하는 등장인물이 아니다. 여기는 현실이다. 그런가?
현실이 뭘까? 현실이란 그냥 현실이 아니고 인식의 결과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이란 주어진 감각신호를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해낸 것이다. 아래의 그림을 보자.
위의 그림에 나오는 두 개의 평행사변형들을 보면 한쪽은 양변의 길이가 상당히 다르고 한쪽은 거의 같아 보여서 양변의 길이의 비율을 말해보라고 하면 왼쪽은 1:2쯤으로 보이고 오른쪽은 1:1쯤으로 보인다. 그런데 실은 두개의 평행사변형은 같은 것이다. 긴변과 짧은변의 길이는 같고 따라서 길이의 비율도 같다. 90도 회전을 시켜놓았을 뿐이다. 의심나면 자로 재보도록 하라.
물론 당신은 이건 그저 착시현상일뿐이라고 말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항상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굳이 길게 설득할 생각은 없다. 나는 다만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이렇게 만들어 진 것이라는 점을 다시 말하고 싶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가 소리를 듣고 빛을 본다는 것자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눈이 두 개인데 세상이 하나로 보인다는 것자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당신은 확실하게 어떤 현실 속에 서있다. 그 현실이란 우리가 믿는 어떤 무지의 벽같은 것에 근거해서 만들어 진것이 아니라 확실한 것이다. 객관적 진실, 절대적 진실이다. 정말 그런가?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어도 좋다.
그러나 서로 다른 부분에 대해 그렇게 느낄지라도 막연하게라도 그게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인생의 부조리함, 인생의 터무니 없음을 느낀다. 요즘 언론에 자주 나오는 법륜스님의 스승인 도문스님은 법륜스님을 출가시킬 때 너는 어디서 왔는가와 너는 어디로 가는가를 계속 물었다고 한다. 법륜스님은 계속 답을 했지만 답을 계속 하자 결국은 어떤 테두리에 도달한다. 태어나기 이전에는 어디서 왔는가라던가 너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질문에 도달하자 그걸 어떻게 알아요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지의 벽이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법륜스님은 시험공부에 바빠서 바쁘다고 했는데 그에 대해 도문스님은 말했다고 한다. 너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바쁘긴 뭐가 바쁘다는 거냐고. 법륜스님은 나는 학생이다라는 세계에 갇혀있었고 그에 대해 도문스님은 정말 그게 다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네가 실체로 알고 있는 세상이 실체가 맞냐고 묻는 것이다.
장자는 거대한 세계를 보여주면서 너는 네가 어디에 서있는지 아냐고 호통을 친다.
위에서 보여준 그림은 너는 뭔가가 보이면 보이는 그대로 믿지? 라고 말하고 있다.
누군가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계속 고민한 끝에 뭔가를 찾았다고 하자. 다른 누군가가 그 사람을 보고 껄껄 웃으면서 말한다. 너는 네 발밑에 뭐가 있는지는 아는가. 의미란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네가 발견한 이야기에는 정말 벽이 없고 테두리가 없는가.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종종 역설적으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거나 매우 당연한 이야기, 작은 지엽말단적인 이야기만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는 바로 무지의 경계, 인생의 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벽이란 종종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는 벽을 넘지 못하는 것 이전에 벽자체를 느끼지 못하니까 극복해야할 것이 있다는 생각자체를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벽을 당연한것으로 가지고 세계를 보고 해석하면서 두번 생각하지 않고 자신감에 넘친다. 얼핏봐도 대단한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실은 대부분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이런 인생과 세상의 무한함 속에서 우리는 뭘해야 할까. 나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무지를 인식하되 우리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위에서 쓴 것을 읽으면서 혹자는 내가 모든 무지의 벽을 깨버리고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며 이야기의 벽, 인생의 벽을 끝없이 확장해 나가라고 열변할것을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나만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 남들의 벽도 깨부수라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소위 회의론자들은 그렇게 한다. 그들은 종종 끝없이 회의하자고 말하고 결국은 사람들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거나 결과적으로 누군가 지식이 높은 분의 노예로 만들거나 허무주의자로 만든다. 스스로 인생은 허무하다면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인생은 목표에 골인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왜냐면 세상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빨리 뛰어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게다가 하나의 무지의 벽을 깬다는 것이 제대로 된 다음번 무지의 벽을 발견하는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진화는 연속적이지 않고 도약이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 세상은 무한히 많은 종족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그 밑이 무한히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아도 우리는 항상 발디디고 서있을 곳이 필요하다. 충분히 그 무지를 꽤뚫어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너머의 벽으로 비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갑자기 내가 믿던것, 내가 경험을 통해 만들어 왔던 나의 세계를 모두 포기하고 진공으로 뛰어올라 어딘가로 뛰려고 하는 비약은 매우 위험하다. 마치 병아리도 되지 못한 달걀이 창공을 나르겠다면서 절벽에서 뛰는 것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면서 그 사람의 세계를 깨는 것도 그런 것이다. 그가 안전하게 착지 할지 안할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도 모르면서 정의가 어떻다는둥, 진리가 어떻다는 둥하면서 다른 사람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일까? 비약은 내가 하는게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초청장을 날릴 수 있을 뿐이다.
공자는 한쪽 모퉁이를 들어올리면 다른 모퉁이를 아는 사람에게만 가르친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멍청한 사람은 안 가르친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다른 뜻일 수도 있다. 비약과 성장은 그 사람이 하는 것이다. 준비된 사람에게는 한방의 기합소리면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면 알아서 나머지는 알아듣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비약하려고 한다는 것은 내실을 다지는 것보다 못하고 위험하다. 뒤틀린 지식인들처럼 쓸데없이 남의 말이나 외워서 엉뚱한데 쓸 뿐이다. 왜 굳이 가르쳐야 하겠는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벽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흔한 벽들이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내 블로그의 대부분의 글들은 그것에 답하기 위한 것이다. 그 벽이란 때로 국가적 민족적 문화적 차이일 수 있고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분야의 차이일수도 있다. 어린 아이와 어른 사이에 있는 벽일 수도 있고 여자와 남자사이에 있는 벽일 수도 있으며 다른 시대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시대적 현실이 만들어 낸 벽일 수도 있다. 그것은 상식적인 주거형태나 교육형태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여가와 가족생활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벽은 사방에 서로 서로 얽힌 형태로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식이라던가 문화라던가 합리적인 것이라던가 과학이라던가 윤리라던가 하는 것이 뭔가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라고 확실하게 믿고 우리는 뭐뭐뭐라고 스스로를 정의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무지의 벽에 갇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며 모든 것은 불확실한 경계를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 나는 그저 뭐뭐뭐일 수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의 내가 어딘가에 서있다는 사실, 여기있는 뭐뭐뭐가 나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나는 거기에서 계속 걸어나가서 다른 존재가 될 것이지만은 내가 서있는 곳에서 그렇게 변해가는것이지 어느 순간 내가 가고 싶은 어떤 곳에 짠하고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길은 여러가지다. 누군가가 어떤 책안에 답이 있다면서 그걸 줄줄이 외우고 마침내 그 책을 쓴 사람이 본 세상을 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때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게 하는게 마음에 든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시간에 산과 바다를 보면서 산책하고 사색한 사람이 더 빨리 그 세상에 도달할 수도 있다. 물론 반대도 가능하다.
우리가 우리의 무지와 매일 매일의 생활에 동시에 감사하고 기뻐하다보면 어느날 또 바람이 불고 우리는 다음번 벽을 만나게 될것이다. 그게 뭔지는 미리 알 수가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일단 인생의 벽이 바뀌면 세상은 전혀 달라보일 것이다. 굉장히 단단한 실질적 문제처럼 보이던 것들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청소년기에 이런 것을 경험한다. 어릴적에는 그렇게도 대단한 문제, 절실하고 사라질수 없어보였던 문제들이 커서보면 도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렵다. 왜 그 때는 그렇게 절박했는지, 왜 그때는 누군가가 그렇게 미웠거나 좋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은 그때의 벽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한가지는 같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의 무지의 벽들이 만들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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