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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좋다는게 뭔지 아는 사람?

by 격암(강국진) 2009. 12. 4.

2009.12.4

문제는 무엇인가. 

 

좋고 나쁜게 뭔지를 어떻게 아는가 하는 것은 가치판단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좀 생각해 보면 너무나 중요한 이 문제에 대해 정작 우리 사회가 뭘 가르쳐 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거의 없거나 그 가르침이 매우 교조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좋은게 뭔지를 어떻게 좋은 것을 알아내고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으며 어떤 일련의 규칙만을 제시해서 그걸 따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예는 십계명을 주고 신의 계시라며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예로는 부모님 말씀 대로 사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나 사회적 상식과 법을 지키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공자님 처럼 살라고 하는 것도 교조적으로 말할 때 비슷하게 가르쳐지게 됩니다. 

 

가치의 문제는 윤리의 문제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윤리의 문제란 정해진 규칙을 잘 지키는 문제로 생각하고 맙니다. 즉 좋고 나쁜 것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단지 문제는 좋은게 뭔지, 옳은게 뭔지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유혹에 빠지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예나 로보트의 심리입니다. 윤리를 이런식으로 이해한다면 좋고 나쁜 것은 전부 다른 사람이나 사회로 부터 제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모님이나 사회의 상식을 따르는 것은 많은 경우 올바른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면 로보트나 노예밖에 안됩니다. 윤리란 위에서 말한대로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노예나 로보트의 삶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다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회에서 윤리적 기준에 대해 배운게 뭐가 있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결국 두가지 정도밖에는 배운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것은 공리주의와 칸트의 정언명령으로 다시 말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던가 한 개인의 행동의 방식은 보편타당한 입법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매일의 일상에서 수많은 가치판단을 내려야 하는 우리에게 기준점을 주지 못하며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서구 철학은 그저 자유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너 좋을대로 해라. 내가 보기에 서구 철학은 이 점에서 매우 무책임하고 불완전합니다. 

 

칼포퍼의 자서전, 끝없는 탐구의 맨 마지막 장은 사실들의 세계에서 가치의 지위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칼포퍼는 역시 서구 윤리학은 매우 허술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즉 수많은 저작들중에 만족스러운 것은 거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윤리학적 문제가 사실 미해결문제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있는 것입니다. 

 

칼 포퍼는 가치는 사실로 부터 유추될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의 주장이라기 보다는 매우 자명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인과관계의 순환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즉 A가 B때문이라고 하면 B는 무엇때문이냐고 물을 수 있고 결국 이런 질문을 무한대로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치의 문제도 똑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은 이러저러해서 좋다라고 어떤 사실과 논리로 '설명'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럼 그것들은 왜 좋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배고플때 밥을 먹는게 좋은 거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거식증에 걸려 굶어죽는 환자도 있습니다.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먹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가치를 저절로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살자면 먹어야 하는거 아닌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먹는 일의 가치는 생명의 중요함에서 나온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생명은 애초에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우리는 또 던질 수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장렬히 싸우는 사람, 사형수를 사형시키는 문제, 낙태의 문제등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원칙을 무한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예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치는 사실로 부터 자명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대학에 가는것이 좋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입시생은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사 대학에 대해 나보다 엄청나게 많이 아는 어떤 다른 사람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나를 위해 결정을 내려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가치는 사실에 의해 만들어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그저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가치를 판단해 줄 수는 없습니다. 내 대신 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에 이것은 공부를 하고 배우는데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것인데 충분히 강조되지 않거나 전혀 강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을 둘러싼 사람들은 대개 그 아이들에게 자신의 상식과 규칙을 주입하고 싶어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여기 눈앞에 천페이지쯤되는 두꺼운 철학책이 있거나 백권쯤 되는 철학책이 있거나 인생을 90년씩 사신 노인이 있거나 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지식과 논리와 경험은 모두 굉장히 중요한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치가 사실로 부터 유추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것이 전혀 달라져 보이게 됩니다. 복잡하고 긴 논리와 많고 많은 증거로 그 철학자나 그 노인이 가진 가치판단을 정당화하고 객관화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실질로 보면 길고 복잡한 사실들의 더미속에 사람들은 종종 가치판단을 슬쩍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래서 가치판단을 사실판단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럼 경험없고 지식이 없는 사람은 어떤 가치판단이 사실에 기반하여 논리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 그 사람은 노예가 됩니다. 뭔가를 믿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자기가 뭘 믿는지도 모르는채 믿게 되는 걸 사기라고 한다면 이것은 거의 사기에 가깝습니다. 물론 본인의 무지에 의해서 그렇게 되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속인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치판단이 논리와 사실에 근거해 증명된다고 생각되는 경우 그 모든 논증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등, 민주주의, 자유, 계급같은 단어를 나열하면 대부분 혼란에 빠집니다. 

 

이것은 그리 복잡한 이야기도 아니고 비밀도 아니지만 자주 말해지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미 말했듯이 개인을 둘러싼 환경에 해당하는 사회가 개인을 지배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와 사회에서 교회에서 절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철학을 가르치면서 그것을 증명된 절대진리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을 원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이거 이거는 좋은 것이다. 왜냐고 묻지마라. 원래 그렇다. 

 

두번째는 이런 비밀아닌 비밀을 사람들이 모두 알게되고 인식하게 될경우 사회가 난장판으로 변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즉 선과 악은 따로 없으며 모든 것이 자유라는 식의 주장이 공인되어 살인같은 범죄행위도 아무 도덕적 두려움 없이 주장될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이 비밀은 실제로 어느정도 위험합니다. 사회적으로만 위험한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위험합니다. 자신이 발을 딛고 서있는 상식의 세계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한꺼번에 증발해서 우리가 정신병자같은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해결책

 

이것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가치는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것을 대개 같이 느낍니다. 우리는 어떤 윤리적 행위를 윤리적이라고 느낍니다. 이것은 증명이 아니라 관찰의 결과죠. 관찰이 귀납적으로 모든 인간은 좋은게 뭐고 나쁜게 뭔지에 관련된 객관적 세계에 공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신학적 가정이 됩니다. 

 

이것이 포퍼의 경우에는 세계 3이고 노장의 경우에는 도의 세계고 불교의 경우는 불성이며 기독교의 경우는 신이고 화이트헤드의 경우는 프로세스라고 불립니다. 적어도 제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가치판단에 있어서 주관성과 순수관념론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 길뿐일 수 밖에 없다는점에서 이것은 희망적 가설이라고 불러야 할것입니다. 

 

그 모든 것의 공통점은 가치의 원천이 되는 현실은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실재를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정의하고 기억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가치판단의 근원에 해당하는 실재는 사실판단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것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느낄 수가 있고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을뿐입니다. 그 실체를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는 논리와 사실들이 만들어 내는 환상에 속지 않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맺는 말

 

해결책을 읽으니 해결책이 아닌것같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일 수 밖에 없는 문제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같습니다. 

 

문제란 무엇인가에서 말했습니다만 이것은 위험한 지식입니다. 따라서 나름의 해결책에 대한 느낌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냥 잊어버리는게 좋습니다. 사실 노예니 로보트니하지만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현실사회에 하나도 없거나 거의 없습니다. 상식에 따라 사회적 규범에 따라 사는 삶을 의심하고 비하할 이유는 거의 없습니다. 

 

다만 창의력을 강조하는 요즘, 가치판단이 남의 것만 따라하는 것일때 그것이 가능할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극도의 창의력을 발휘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식을 극도로 파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크게 성공한 사람도 있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엉망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문제는 한국같은 동양에서 서구문명이 들어오면서 전통적, 비과학적, 형이상학적 태도를 모두 포기하고 기계적 과학주의만 받아들일 경우 그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윤리적 기반과 현실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로보트가 되고 노예가 됩니다. 자기가 가치판단을 하는게 아니라 남이 대신 해주니까요. 그러니 이 문제를 외면할수도 없는 것입니다. 

 

좀 더 관심이 있는 분들 중 제 글을 더 읽고 싶은 신분들은 제가 쓴 가치판단에 대한 에세이라던가 철학을 위한 여행이란 글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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