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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가족질서에 대한 변명

by 격암(강국진) 2010. 10. 25.

2010.10.25

가족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것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종종 끔직한 고통의 원인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드라마나 영화나 소설을 보다보면 가족을 가진다는 것은 일종의 로또처럼 느껴지는데 성공하는 경우는 천국에 살지만 실패하는 경우는 지옥이 된다. 그런데 로또는 당첨될 가능성이 극히 낮으므로 권장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가족안에서 행복해 지기란 지극히 어렵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그런데 나 역시 자유롭게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발생하는 속박을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이지만 가족질서라는 것에 대해 좀 변명을 해줘야 할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동차가 우마차보다 좋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이야기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마차에서 소나 말을 빼거나 바퀴를 빼놓고 '저것봐 우마차란건 움직이지도 않잖아'라고 말하는 비판에 동조하는 것은 왠지 범죄에 가담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약간 이야기를 돌려 최근에 읽었던 칼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라는 책이야기를 해보자. 폴라니는 스피넘랜드법이라는 구호법이 자유시장주의를 탄생시킨 악몽적인 배경이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을 차별없이 구호하는 법이 빈민들의 도덕적 타락을 가져왔고 결국 모두가 그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생존경쟁, 자유경쟁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말하는 이야기에 공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오늘날의 가족질서라는 것을 떠올렸다. 본래 가족질서라는 것은 단순히 권위적으로 억압하기만 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로 모든 시스템은 적어도 그 시작단계의 주장으로는 그 구성원 모두의 행복에 도움이 되니까 존재하는 것이다. 가부장제가 존재했던 것은 가장만 좋은 제도니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가장이 남자라던가 여자라던가 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집안에 리더가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그 리더는 사람들의 고충을 듣고 어려움을 적절히 분담한다. 

 

그런데 이런 가족내의 사법질서가 망가지고 가족간의 관계에 대한 이런 저런 낡은 관습만 남으면 어떻게 될까.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일종의 사회적 보험이고 구호시스템이다. 그런데 가장이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구성원들이 가장을 중심으로한 질서를 무시했을 때 그리고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해서 새로운 질서를 도입한 것도 아닐 때 이 구호시스템은 스피넘랜드 구호법이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하게 된다. 바로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이다. 

 

깽판치는 아들이나 매일 부모님 모시느라 희생하는 아들이나 똑같이 대접받거나 오히려 거꾸로 대접받는다면 사람들은 이제 전체 가족을 위해 협력하기 보다는 그래서 시스템이 올바로 돌아가게 만들기 보다는 자기도 민폐나 왕창끼치면서 자기몫챙기면서 사는거라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남들도 그러니까. 그래서 서로 얽힌 가족관계라는 끈을 악용해서 성실하고 착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 사람들이 양산되는 것이다. 자기가 유리하면 갑자기 할아버지 어머니의 귀여운 아들이 되고 불리하면 세상은 다 독립적으로 사는거라고 말하거나 아들딸들에게 무한한 권위를 행하다가 정작 아들딸들에게 신경써줘야 할 때가 오면 자기 책임은 내팽겨쳐버리는 일도 흔해지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전통적이니 유교적이니 하는 가족상을 무조건 옹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시스템을 옹호하는것 이전에 어떤 시스템이든 시스템이 없는 것보다는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민주적 가족상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민주적 가족제도를 제대로 하라. 리더쉽이 강한 가부장적, 왕조같은 가족을 택했는가 그러면 그걸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가족제도를 보고 가족이란거 지긋지긋하다고 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이런 점을 전제하고 나서 한마디를 붙이면 사실 국가차원에서 하는 식의 민주주의란 규모가 큰 집단에서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작은 집단에서는 리더가 결정되어 있는 시스템이 훨씬 효율적이다. 엉터리라도 총무가 정해져 있는 쪽이 모임이 잘되듯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리더가 아니라도 작은 집단에서는 전체 집단에 귀기울이고 사법적 역할을 해줄 리더가 필요하다. 

 

전통적 가족제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가운데 세상에는 자유에 대한 목소리가 드높다. 제대로 뭔가 해주지도 못한채 사람들을 불행하게만 만드는 가족관계라는 거 지긋지긋하다는 것이다. 자유시장주의의 주장처럼 모두를 자유롭고 평등하게 만들고 그러다보면 최선의 결과가 도출되고 모두는 더욱 행복해 지고 이럴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바로 그 자유시장주의를 비판하고 그 자유시장주의는 이미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반세기 전에 칼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말하고 있는 바라는 것은 가족질서라는 것과 관련되어 의미가 있는 사실이다.  오늘날 흔히 진보적 인사들은 보다 민주적인 가족을 주장하고 자유시장주의는 비판한다. 그런데 내가 말한 맥락에서 보았을때 과연 나는 그들이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들을 세밀히 비판하고 일관성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사회적으로는 자유시장주의의 실패와 잔혹성을 말하면서 과연 전통적 가족질서를 쉽사리 던져버리는 것이 앞뒤가 맞는 것일까.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종종 그냥 책임회피가 되는 거 아닐까. 

 

나는 과거가 과거대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는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두가지 사실을 강조하면 글을 마치고 싶다. 일단 자기 가족이 무슨 시스템을 선택했는지는 생각해 보고 가족질서라는게 지긋지긋하다고 해야겠다. 마차에서 말을 떼어버리고 무슨 차가 앞으로가지도 않느냐고 비판 하는 것은 아닌가? 이 세상에는 다른 시스템이 있을뿐 자유라는 시스템은 없다. 새로운 규칙이 있을 뿐 규칙없는 집단이란 없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도 이름만 자유일 뿐 새로운 규칙을 가진 새로운 시스템이다. 장점도 있고 치워야할 댓가도 있다. 무엇보다 20세기 초부터 그 근본이 흔들이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자유시장주의를 비판하면서 공동체주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고 싶다면, 새로운 가족질서란 어떤 것일까를 같이 고민하는 일관성을 발휘해야 비로소 제대로된 진보가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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