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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사회적 동물의 탄생

by 격암(강국진) 2013. 1. 11.

2013.1.11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 말고도 무리를 이루는 많은 동물들이 있다. 그런데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왜 존재하게 된 것일까. 이런건 그 답이 뻔한 질문이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한가지 측면에서, 즉 생존과 인식능력이라는 차원에서 생각을 더 해볼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선 먼저 기계적인 시각에서의 답을 말해보자. 이것은 이런 질문도 나름의 대답이 있으며 그 대답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크게 의존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사회를 기계적인 시각에서 본다는 것은 하나의 사회는 구조를 가지며 각 부분이 맡은 기능을 다해서 전체 사회가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분업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라고 이해하게 된다. 즉 하나 하나의 개체는 무능한데 그들이 사회를 이룸으로써 즉 거대한 기계를 이룸으로서 모두가 이득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든 조선시대의 선비들이든 세상에는 여러 계층이 있으며 그들이 각자의 일을 다할 때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를 이런 것에서 찾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회에 대한 좀 다른 그림을 가진 것은 바로 사회를 이상기체를 이루는 원자의 집합처럼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의 총합으로 보는 시각이다. 이런 시각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것은 외부적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필요악과 같은 것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상기체는 기체로 있는 이유가 그것을 담은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진공속에서 테두리가 없다면 기체라고 부를만한 것은 남아있지 않으며 모두가 튕겨져 나가서 흩어져 버린다고 할지 모른다. 이상기체속의 원자들은 서로 서로 당기는 힘같은 것이 없는 자유로운 원자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유로운 개인의 총합을 사회라고 할때 거기에는 애초에 그럼 사회는 왜 생겼나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얼머무리는 면이 있다. 우리가 진짜로 자유로운 개인이라면 우리는 그냥 다 흩어져 살지 않았을까? 사회를 자유로운 개인의 총합으로 생각하는 시각은 사회라는 용기 혹은 그릇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 안에서 개개인들은 서로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식의 시각이다. 이것은 분명 좋은 근사일지는 몰라도 근사에 불과하며 어떤 면에서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근사일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출발되는 사회에 대한 논의는 그 근저에 사회에 대한 부정이 있고 결국 사회란 모두가 모두와 투쟁하는 장소, 좁은 곳에 같이 갇혀있으니 서로에게 불편하여 서로 계약을 하고 살아가는 장소같은 인상을 주고 만다.

 

나는 인식능력과 생존이라는 차원에서 사회의 탄생과 유지를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나하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생명들이 있다.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는 생명도 있고 헤아릴수 없이 많이 번식하는 생명이 있는가 하면 인간처럼 걷고 움직이며 수십년동안에 고작해야 열명정도의 자손을 둘이서 만드는 생명도 있다. 생존의 형태 혹은 삶의 형태가 각각의 생명이 존재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물과 풀을 찾아서 떠도는 임팔라나 바다속의 작은 물고기들은 그 생존과 끝없이 돌아다니는 운동이 깊게 연관되어 있다. 그들이 한 곳에 머문다면 그들은 굶어죽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움직이지만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애써 에너지를 써가면서 돌아다니고 더 많은 불확실성에 노출된다. 그들은 절벽에서 떨어질수도 있고 먹이가 없는 쪽으로 갈 수도 있으며 사자나 상어같은 포식자를 만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높은 인식능력이 필요하다. 즉 더 많이 보고 더 재빨리 그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움직이지 않는 식물은 뇌가 없다. 동물만이 뇌가 있는 것은 움직이는 동물은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즉 인식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기에 뇌가 있는 것이다.

 

뇌만 있으면 인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조금만 삶을 복잡하게 만들면 문제는 한없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계학습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차원의 저주라고 부른다. 1차원적인 2차원적인 3차원적인 인식으로 즉 인식하는 특징의 수가 늘어갈수록 가능한 경우의 수는 지수적으로 증가해서 폭발적으로 어려워진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 그 복잡한 세상을 다따라가는것 같지만 그건 착시에 불과하다. 그럴 수가 없다. 우리는 많은 신호를 무시하고 많은 선입견속에서 세상을 본다. 몸을 움직이는 것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팔을 움직인다. 우리는 우리 몸의 각 부분을 우리의 의지대로 의식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로보트 팔을 만들어 수십개의 관절을 만들고 각 관절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일일이 계산한다면, 이것은 금방 수십차원의 혹은 수백차원의 자유도를 가진 최적화문제가 된다. 즉 각각의 관절이 전체적인 의도와 다른 관절의 위치를 모두 알고 움직인다는 식으로 프로그램을 해보면 슈퍼컴퓨터가 등장해도 그걸 충분히 빠르게 잘 처리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컴퓨터 칩보다 훨씬 반응속력이 느린 신경세포를 가지고도 잘도 커피컵을 자연스레 잡는다. 우리는 일종의 신경세포의 사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세포는 전체의 계획을 모르면서, 그걸 이해할만큼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복잡한 일을 해낸다.

 

나는 이 부분에서 사회의 탄생의 비밀이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많은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운 생명이 이 인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바로 사회의 탄생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기계적인 시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인식의 문제에 촛점이 잡혀있다는 점에서 좀 차별성이 있다.

 

임팔라가 무리를 이루는 것은 그리고 사자가 나타났을 때 소리를 내거나 움직임을 보여서 무리에게 사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개체의 생존으로 보면 자살행위다. 사자의 존재를 처음 느낀 임팔라는 응당 조용히 그 반대쪽으로 뛰어가야 생존기회가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전체 무리로서의 임팔라의 생존은 위기에 처할 것이다. 각각의 임팔라가 서로의 인식능력을 확장해주는 사회성을 가지지 않을 때 임팔라라는 생명은 집단적으로 그 존재를 유지할만한 충분한 인식능력을 가질 수 없다. 즉 사자에게 다 잡혀먹히고 만다.

 

임팔라들과 고릴라들은 사람이 보기에 다 똑같이 생겼다. 인간을 고릴라가 보면 다 똑같이 보일 것이다. 사실 서양인들은 동양인이 보기에 다 비슷하게 생겼고 동양인들은 서양인들에게 다 비슷하게 생겼다. 이렇게 멀리서 보면 다 비슷해 보이는 인간들이지만 그 인식의 내용에 있어서는 천차만별인 것이 인간들이다. 대부분은 비슷한 것을 보지만 많은 인간들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이 인간의 다양성이 인간이라는 사회가 존재해야할 필연성이다. 다시 말해서 인식의 문제로 사회를 본다고 할 때 우리는 인간들이 서로 어떤 부속품이 되어 얽히는 경우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다양성을 가지는 것이 핵심이라는 견해를 가지게 된다. 애초에 사회의 탄생이란 인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똑같은 방향을 쳐다보고 똑같은 소리를 듣는다면 임팔라가 모여있다고 사자를 어떻게 더 쉽게 발견할 수가 있겠는가.

 

오랜 옛날부터 이제까지 있었던 수많은 사상과 이론이란 것들은 추상적 차원에서 보면 결국 뭔가 새로운 것, 거대한 것,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소통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노력들이 남긴 흔적들이다. 우리 무리가 돌진하고 있는 이 앞에 절벽이 있다.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 외치는 경고음들이다.

 

통상의 기계적인 시각과 이 인식능력적 시각에는 하나의 큰 차이가 있다. 사회를 복잡한 기계처럼 생각할 때 하나의 작은 부품은 전체사회를 이해할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규칙을 따르고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강조될 수 밖에 없다. 누가 교통법을 정했건 다들 교통법을 지키는데 내가 맘대로 그것과는 다르게 반대방향으로 역주행을 한다면 사고가 날 것이고 교통정체가 생길 것이다. 즉 개개인은 집단적 시각에 순응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적인 시각은 각각의 부품에 해당하는 개인을 무감각하게 자기 할일을 하는 존재로 만든다. 바로 현대의 위기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그런 시각에 기반한 사회는 가면 갈수록 개인의 인식능력을 저하시킨다. 그 개인은 생각도 없고 보는 것도 없이 그저 맡은 일만 습관적으로 반복해야 하고 그게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체가 붕괴한다.

 

사회의 탄생이 인식능력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시각에서는 정반대다. 개인이 다른 집단속의 개체들과 다르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결국 그 핵심에는 인식한다라는 결과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이미 본 것을 또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제 아무리 많은 임팔라가 있어도 모두가 같은 것을 본다면 멸종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인식능력의 확장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깨어있는 사람이 되어 인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남과 잘 소통하는 능력을 기름으로써 인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나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고, 새로운 시각을 주는 이웃이 있다면 그 이웃은 나에게 축복인 셈이다. 나의 인식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우리의 존재이유다.

 

인간이란 우리가 아는 한 가장 복잡한 세계를 가진 생명이다. 인간다운 삶이란게 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을수 있지만 대개 그것은 상당히 복잡하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삶이며 그런 삶은 심각한 차원의 저주문제에 시달리고 우리는 인식의 문제에 빠진다. 즉 매순간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우리 삶을 망칠 수 있다. 돼지나 꽃은 아파트 한채를 사겠다고 도장한번 찍고 주식 좀 샀다가 자살하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땅에 보이지 않는 금을 그어놓고 별로 넓지도 않은 그 땅의 가치가 한 인간이 평생 죽도록 일하는 노동의 가치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적 사랑도 종교도 이해할수 없다.

 

내가 깨이는 것이 세상이 깨이는 것이고 남이 깨이는 것이 내가 깨이는 것이다. 사회적 동물이 왜 탄생하는가를 인식능력의 문제로 생각하다보면 우리는 이런 답에 이르게 된다. 모두가 깨인 사회가 될 때 우리는 눈먼 사람이 저지르는 비극을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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