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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 가

by 격암(강국진) 2013. 11. 23.

2013.11.23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사람은 배워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책을 보고 배우고 티브이를 보면서 뭔가를 배우며 강의를 들으면서도 뭔가를 배운다. 하지만 우리가 뭔가를 배운다고 할 때 우리는 도대체 뭘 배우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가 뭘 배우는가에 대해서 착각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배우는 것은 두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지식이고 하나는 체험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이차방정식을 푸는 공식을 배운다는 것은 주로 지식을 배우는 것이고 공식을 배우고 암기하면 당신은 망치를 산 것처럼 뭔가를 할수 있는 도구를 얻게 된다. 반면에 당신이 음악연주회에 가서 음악을 듣는 것은 주로 체험을 하는 것이다. 음악을 체험함으로서 당신은 그 음악을 듣기전과는 다른 기분을 가지게 되고 심한 경우 음악을 들었던 그 체험이 당신을 완전히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지식과 체험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지만 우리가 주로 뭘 배워야 할까하는 것은 우리가 배움을 통해서 이룩하려고 하는 목적에 따라 다르다. 만약 당신이 비교적 단순한 수학이나 과학적 기술을 얻어서 그것을 쓰면서 살 생각이라면 당신이 배워야 하는 것은 주로 지식이다. 그러나 당신이 새로운 수학적 과학적 결과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면 즉 수학자나 과학자가 되려고 한다면 지식을 배우는 것으로는 전혀 충분치가 않다. 그것은 마치 남의 소설을 베껴 쓰는 것과 소설가가 되는 것을 착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신이 배워야 하는 것은 창작하는 방법이며 창작을 하는 방법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메뉴얼을 따르면 창작이 되는 방법같은 것은 없다. 당신은 어떤 자극을 통해 당신 안에 있는 것이 발견되는 것을 체험하는 일이 필요하다.

 

편의상 우리가 배우는 것을 지식과 체험이라고 했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실은 우리는 순수한 지식과 순수한 체험만을 배울 수는 없다. 순수한 지식만을 배운다는 것은 그 지식이 우리안에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식이라면 우리는 그걸 배우고 나서 그걸 어디에 써야 할지 다음에는 뭘 배워야 할지 전혀 알 수 없게 될것이다. 예를 들어 총은 기계다. 총을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몸의 일부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총을 드는 순간 총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잠재적으로 남을 쏘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을 얻게 되는 것은 의미없이 일어나게 되지는 않는다. 총을 든 사람은 총을 들기 전의 사람과는 어느 정도 다른 사람일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체험도 순수한 체험뿐일 수는 없다. 우리가 어떤 것을 체험할 때에는 항상 어떤 형식과 지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음악이건 과학이건 미술이건 건축이건 모두 어떤 형식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형식과 역사에 익숙해 질 때 그것들이 주는 의미를 좀 더 잘 알게 된다. 그저 한옥을 보는 것보다는 한국에서 전국적으로 어떤 한옥이 어떻게 발견되며 그런 형태들의 이유는 어떠한 것인가 라는 지식을 알고, 역사적으로 한옥은 어떻게 발전되어져 왔다라는 지식을 알고서 한옥을 볼 때 한옥은 전혀 다르게 보이게 될 것이다. 즉 체험은 지식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아는 만큼 보인다.

 

이렇게 지식을 배우는 것과 체험을 하는 것이 서로 완전히 나눌 수 없는 것이며 각자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것이라면 굳이 구분을 할 이유가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뭘 배울 때 우리는 주로 지식을 배우거나 주로 체험을 하게 되는 차이가 있다.

 

배우는 것에 대해 우리가 종종 가지는 착각은 우리가 주로 체험이 필요한 상황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반대도 가능하지만 요즘은 우리가 지식을 배워야 할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체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 건 기술이나 지식을 마법이나 부적의 힘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이다. 우리는 이미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다. 종교의 시대에서는 상황이 반대였다. 사람들은 지식을 추구하지 않고 무조건 체험을 추구했다. 신에게 정성이 부족하여 가뭄이 오고 작물이 자라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한 것이다. 장인이 혼을 불태워야 좋은 물건이 만들어 진다는 식이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모든 것이 말로 할 수 없는 어떤 신령한 것에 의해 이뤄진다고 믿었다.

 

나는 벌써 체험대신에 지식을 추구하는 착각이 일어나는 한가지 경우를 언급했다. 당신이 만약 물리학과 학생이며 물리학자가 되고자 한다고 한다면 당신은 강의에 들어가서 주로 체험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과학자는 과학선생님이 아니라 연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 사람에게 배워야 하는 것은 사실 지식이 아니다. 당신은 그저 아마추어가 신기한 지식을 수집하듯이 방관자로서 과학지식을 수집해서는 안된다. 당신은 과학발견의 과정을 체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강의를 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가르쳐야 하는 것은 주로 체험이며 지식이 아니다. 그 학생은 물리학을 연구하는 연구자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식은 우리가 체험을 하는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식이 필요하다. 때로는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식은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점을 망각할 때 당신은 그저 수없이 많은 지식만을 가진 사람이 될뿐 진정한 연구의 즐거움이나 열정을 아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어쩌면 별로 의미없이 늘상 다른 사람 뒷처리나 하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예전에 한국에서는 연구를 시작하는 시기가 종종 매우 늦었다. 선진국의 경우는 많은 지식을 배우지 않고 학부에서 연구주제를 잡고 연구를 시작하기도 하는데 한국에서는 학부를 마치고 석사를 하고 심지어 박사과정에 들어가서도 계속 강의 듣고 교과서 공부하고 시험을 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외국에 비하면 나이가 훨씬 많이 들어서야 연구를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예외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것은 잘못된 교육이다. 멋진 작품을 쓸 수 없다고 해도 소설가 지망생이 남의 책만 읽으면서 늙을때까지 아무 습작도 쓰지 않는다면 그는 소설을 영영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또 다른 예는 우리가 인문학강좌에 가서 문학이나 철학을 배우는 경우다. 앞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식은 분명 우리에게 유용한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당신이 인문학강좌에 간다면 당신이 배워야 하는 것은 주로 체험이지 지식이 아니다. 그것을 잊어버릴 때 당신은 마치 자신이 뭘 사야할지 모르면서 쇼핑몰에 간 사람과 비슷해 진다. 당신이 개집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하자. 당신은 쇼핑몰에 가서 그것에 필요한 도구와 재료를 사려고한다. 하지만 정작 당신이 쇼핑몰에 가서는 뭐에 쓸지도 알지 못하고 쇼핑몰에 가득찬 물건을 모두 사려고 한다면 어떨까. 첫째로 그 물건을 다 사지 못할 것이고 둘째로 당신은 절대로 개집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어딘가에는 분명히 쓸데가 있을지도 모르는 그 재료와 도구들은 실제로는 절대로 쓰이지 않을 것이니 결국 실제로는 아무 쓸데가 없을 것이며 그것들이 쓸모가 있어질 무렵에는 이미 상해서 다시 사야 할 것이다.

 

당신이 과학자가 아니라 일반인이라면 그저 과학적 상식을 배워서 일상 생활에서 유용하게 쓸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철학자가 아닌 일반인이라고 할지라도 그저 인문학적 지식을 배우는데 그친다면 그것을 일상 생활에서 쓰는 것은 부질 없이 남에게 잘난체 할 때나 그럴 것이다. 인문학 강좌는 응당 우리를 바꿔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되도록해야 한다. 세상에 대해, 행복에 대해 다르게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도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배우는 것, 배워야 하는 것은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를 바꾸는 것을 거부하고 지식으로서 그것을 도구로 소유하려고 한다. 이것은 과학시대가 낳은 큰 오류다. 당신의 할아버지가 매우 무식하다고 하자. 그는 당신에게 어떤 멋진 메세지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이 싸준 군고구마가 당신에게 어떤 감동을 주고,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체험하게 해주었다면 당신의 할아버지가 유식하게 지식을 나열하는 대학교수보다 훨씬 더 훌룡한 인문학 강좌를 열어준 것이다. 우리가 어떤 신령한 숲을 걸었다고 하자. 그 숲을 걷고 나니 당신은 이제 세상에 대해 다르게 보게 되었다. 그것이 훌룡한 인문학 강좌이다. 역사의 현장을 걷고서 당신은 한국인으로서 뭔가를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훌룡한 인문학 강좌다. 그러나 비록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더라도 느끼지 못했다면 헛 일이다.

 

철학이나 인문학 강좌는 지식을 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그것을 배움으로서 스스로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는 것이 올바른 강좌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지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배움에 실패하게 된다. 이는 물론 가르치는 사람이 문제일 때도 있다. 인문학 강좌는 대부분 배운거 많은 분들이 한다. 그분들이 뭘 당신에게 말해 줄 것인가. 자신이 많이 아는 지식을 말해준다. 물론 그런 지식도 무의미하지는 않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의 복잡함과 누적된 지식의 총량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런 식의 공부는 개집을 지으려고 하는 사람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성찰을 한 정도가 다르고 물론 경험한 인생이 다르다. 당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당신이 필요한 것은 다르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은 개집을 만들어야 하고 어떤 사람은 문을 수리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수영장을 만들거나 정원을 꾸며야 한다. 수백명을 늘어놓고 뭔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아주 쉽게 환자의 증상은 보지도 않고 수백명에게 같은 처방전을 날리는 의사와 다를 것이 없어진다.

 

물론 이런 모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책이나 글이나 대중강좌가 언제나 무의미하다고는 할 수 없고, 이런 어려움을 느끼고 그에 맞춰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강사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건강관리에 대해 일반적으로 도움이 되는 지침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설혹 강사가 능력이 있고 문제의 어려움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학생이 자신이 뭘 배워야 하는가에 대해 착각하게 될 때 그는 배우는 것이 없거나 엉뚱한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잘못된 스승을 선택함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어떤 때 스승은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거나 표면적으로 스승이 말하는 것이 그 스승에게 배우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마치 조각을 감상하러 미술관에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조각은 당신에게 직접 메세지를 말하지 않는다. 당신이 뭔가를 보고 느낄 뿐이다. 마찬가지로 스승은 그저 당신과 아주 쓸데없는 잡담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밥은 먹었냐던가 얼굴이 핼쓱해 보인다던가 지난번에 봤던 책이 재미있었다던가 하는 이야기로 이야기는 두서없이 흐를지 모른다. 당신은 가슴속에 스승에게 묻고 싶고 배우고 싶은 이야기가 가득했을지도 모르지만 정작 이야기는 엉뚱한 쪽으로 한없이 흘러서 도무지 뭔가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분위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당신은 도대체 내가 뭘 가지고 고민이었더라라고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이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스승은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무한히 많은 잡다한 지식을 정확히 던져주는 사람을 찾아서 거기서 뭔가를 배우려고 할 것이다. 당신이 해야 하는 것은 도박을 관두는 것인데 당신은 오히려 더 많은 도박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려고 할 것이다.

 

정확하고 논리적인 지식이란 그 자체로 훌룡한 형식이 되지만 우리의 목적은 형식을 추구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적어도 항상은 아니다. 때로는 더욱 엄밀하고 정확하고 객관적이 될 수록 그 말들은 당신과의 관계를 잃고 아무 체험도 주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체험하는 대신에 그것을 외우려고 할 것이다. 문법이 맞는 말은 대개 그 말을 통해 우리가 의미를 전달할 때 도움이 되지만 말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지 문법을 맞추는 것이 말의 목적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철학적 강의가 아무리 바람직한 특징을 다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형식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철학을 들으면서 이 말들이 논리적인가, 어떤 예를 통해서 주요 목적을 잘 논증하는가, 여기에 어디 공격할 점은 없는가에 집중한다면, 말을 들으면서 문법이나 발음이 정확한가에 집중한다면 철학이건 말이건 애초에 어떤 대상에게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건내진 매체라는 사실이 잊혀질 것이다. 시를 써줬더니 주어가 없다라고 비판하는 사람에게는 메세지는 전달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될 수도 있다. 배우는 과정 역시 인식의 과정이며 인식에는 정확한 감각신호를 받는 것 이상으로 그 감각신호를 해석할 자기자신의 올바른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식은 감각신호에 해당하고 체험은 우리 자신을 바꾸는 일이다. 오늘날 지식은 아주 흔한 것이 되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우리는 무수한 지식들을 수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과학의 시대를 살면서 지식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것이 지식의 문제라고만 생각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압살당하기 좋은 쪽은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체험으로서의 배움이 더더욱 중요해진 시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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