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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살만한 세상, 문화적 정신적 동지가 있는 세상

by 격암(강국진) 2013. 12. 10.

2013.12.10

세상 살면서 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외롭다는 건 묘한 것이라서 외롭다는 사람이 사실은 동지가 많으며 외롭기는 뭐가 외롭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실은 외로운 경우도 있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가 외롭지 않다고 할 때 매일같이 친구와 만나서 술판을 벌이고 수다를 떨거나 떠들썩하게 생일파티를 벌이고 여행을 같이가고 날마다 전화통화를 많이 하는 그런 사람을 가르켜 외롭지 않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만으로 사람이 외로운가 그렇지 않은가는 알 수 없다. 나는 외롭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신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나같은 사람에게 외롭지 않은 사람이나 친구를 가진 사람이란 문화적으로 정신적으로 공감대를 가진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락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런 사람이 없는 경우는 너무나 많다.

 

약간 말을 돌려서 이렇게 말해보도록 하자.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라던가 마을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뭐가 있어야 할까. 나로서는 첫번째로 꼽고 싶은 것은 상식이 통하고 말이 통하는 이웃이다. 그 이웃과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둘째치고 상식이 안 통하고 말이 안 통하는 이웃이 있다면 그런 이웃과 불화가 생기기 마련이니 사는 것이 답답하고 지옥같기 쉬워서다.

 

한국은 정치가 시민들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왜일까. 기본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몇일전만 해도 국정원 부정선거에 대해서 박근혜는 사퇴하라고 민주당의 장하나의원이 이야기한 것에 대해 새누리당 의원들이 크게 분노하고 윤리가 어떻고 국회제명이니 어쩌고 한 모양이다. 나는 국정원 부정선거에 대해 시각이 다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즉 국회의원이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말도 안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열린우리당 의원이 많이 당선되었으면 좋겠다고 인터뷰를 한 것을 가지고 대통령 탄핵을 주장했고 실행까지 옮겼다. 말 몇마디 한게 아니다. 그런 국회가 자기 의견을 밝히는 다른 의원에 대해 윤리위원회 회부니 국회제명이 어쩌고 하면서 펄펄 뛴다는 것은 정신병적인 행동이랄 수 밖에 없다. 자기들이 했던 행동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언행이 말이 안된다. 말이 안되니까 보는 시민들이 괴로운 것이다. 말이 안되는 언행을 하는 사람과는 이웃을 하고 같이 살고 싶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물론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만 말이 안되는 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꼭 정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상식이 통하는 사람들에 둘러쌓여서 살고 싶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 살고 싶다. 상식은 누구나 믿는 것이니 이것이 간단해야 할것 같은데 정작 이것이 또 쉽지 않다. 왜 그럴까. 기본적으로 사실 상식이란게 당연한게 아니라서 그렇다. 상식은 당연한게 아니라 공부하고 훈련해서 얻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냥 만나서 사는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어떤 상식으로 이어진 공동체에 가입하고 그걸 존중함으로서 상식 속에서 살 수 있다. 상식이란 우리가 참여하는 게임의 법칙이다.

 

그런 게임의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는 종교가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윤리가 통하는 세계안에서 상식을 찾는다. 불교인들은 불교도의 세계안에서 상식을 찾고 유교적 전통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유교의 세계안에서 상식을 찾는다. 우리는 종종 상식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상식은 그보다는 어떤 비밀결사나 수도원, 절등의 구도자들이 따르기로 서약한 법규에 가깝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공자의 상식에 따라 사는 선비가 되기로 서약하고 그 규범을 공부하고 지키며 살 때 한 벌의 상식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유교적 상식이 있는 이웃이나 선비친구들과 같은 세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종교는 세상일에 대해 규범을 제시하는데 한계가 있다. 세계의 주요종교는 적어도 이천년정도는 된 것들이다. 나는 앞으로 백년뒤에도 주요종교들이 힘을 발휘할꺼라 믿지만 천년뒤에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요즘 백년은 예전의 2천년보다 더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것 같은데 과연 백년뒤에도 종교적 문헌들이 권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지금도 그 권위의 중심이 되는 문헌들은 은유로만 받아들이지 곧이곧대로 옳다고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상식과 문화적 동질감을 제공해 주는 것에는 과학이라는 문화도 있다. 과학이라는 문화의 사제는 과학자이므로 나도 말하자면 이 사제쯤에 해당하는 셈이다. 과학자들은 대개 정확한 관찰에 기반하고 엄밀한 논리를 통해 가설을 검증할 것을 요구당한다. 과학전공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이 과학적 사고와 문화에 기반하여 살며, 이것이 무의미한 것에 휘둘리는 일을 막아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학은 전문화가 심화되고 윤리적 기반을 망각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권위를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특히 한국에서 그런 것같다.

 

공자를 따르는 선비건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이건 부처를 따르는 불교도건 과학의 전통속에 있는 과학자건 우리는 어떤 문화, 가치관을 흡수하고 그런 틀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즉 문화적 동지를 만날 때 서로에 대해 안심하게 된다. 우리가 외국에서 같은 한국사람을 만나면 종종 매우 안심하게 되고 처음 본 사람인데도 친근하게 굴게 되기도 하는 것은 우리는 한국문화라는 틀안에 있다는 점에서 같은 동지이므로 그나 그녀가 나와 같은 상식을 따를 것이라는 점을 기대할 수 있어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앞에서 거론한 과학이나 종교적 전통안에 있을 때 서로에 대해 좀 더 믿고 안심하면서 서로를 만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문화적으로 빈곤한 사람은 외롭지 않을 수가 없다. 스스로 어떤 상식의 체계도 일관적으로 따르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같아야할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잠재적으로 경쟁자고 적일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표면적으로 껄껄거리며 여러사람을 만나고 있어도 그나 그녀는 외롭지 않을 방도가 없다. 세상에 믿는 사람이, 믿는 뜻이 하나도 없으니 그렇다. 모두가 적이다. 그런 사람은 친구가 아주 많은 것같은데도 정작 신뢰가 필요가 생기는 상황이 벌어지면 문제가 생긴다. 그 많던 지인들이 모두 나를 믿어주지 않는 것이다. 바쁘게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외롭지 않은 사람이란 공유할 뜻과 문화를 가진 사람이다. 뜻과 문화를 가져도 외로울 수 있지만 소통할 뜻과 문화자체가 없는 사람은 애초에 외롭기로 선택한 거나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뜻이 통하는 것이며 사회적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나 증거가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대화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같이 문화적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그 자체도 좋은 일이지만 그런 공감대를 형성시키고 공감대를 확인하는 작업일 뿐이며 그런 번거러운 것이 없어도 서로에 대해 믿음을 가질수 있다면 관계는 지극히 담백할 수도 있다. 내가 그를 알고 믿으며 그가 나를 알고 믿으면 우리는 더이상 외롭지 않을 수 있다. 잡담따위 안하고 연락따위 안하고 살아도, 서로간에 아쉬운 이야기 안하고 부탁같은거 안하고 살아도, 심지어 그가 나를 몰라도 하늘 아래 동지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외롭지 않을 수 있는것이 그런 만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책속에서 죽고 없어진 동지를 찾는다. 그는 나와 직접 만날 수 없지만 책속에서라도 동지를 만나면 기쁘고 외롭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글을 직접 써서 그 글을 읽으며 스스로를 자신의 동지로 삼는다. 따로 동지를 발견하기 어려워서다.

 

요즘은 외로운 시대다. 사람들이 자살도 많이 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삶의 방식에 대해, 상식에 대해 서로 공유하는 것이 적어서 그런 것이다. 동지가 있는 사람은 삶이 어려워도 쉽게 자살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외로울 때 자살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문화적 정신적 고민의 깊이가 얇은 만큼 그들의 관계가 피상적이며 작은 유혹에도 깨져나갈 것이라는 것을 느낀다. 행복도 이런 외로움때문에 드문 일이 되었다. 행복이란 반드시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소비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가치있는 것을 내가 믿고 또 여러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에서 오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사람이 실패하고 고문당하고 버림받는 시대는 잘먹고 잘입어도 쓸쓸하다.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소위 역지사지를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세상이 그런 사람으로만 가득 차있다고 생각하면 어딘가 깊은 숲속으로 도망가 혼자 있고 싶다. 그런 사람의 옆에 있으면 혼자 있는 것보다 더 외롭기 때문이다. 자신이 약간 무시당하거나 약간 피해를 입으면 세상을 다 망하게 하는 한이 있어도 복수할 것처럼 앙심을 품지만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피해주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한숨이 나온다.

 

우리는 상식이나 살만한 세상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상식이나 살만한 세상이 이런거라는 것을 잊으면 그런 것은 영영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게 우리가 문화운동이 필요한 이유다. 외로운 것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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