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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우리들의 잊혀진 이름

by 격암(강국진) 2014. 1. 5.

2014.1.5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여러가지 사회적 역할을 하고 여러가지 관계로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족일 때도 있고 동창일 때도 있다. 우리는 소비자로서 살 때도 있고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노리는 야심가로 살 때도 있다.

 

이렇게 우리는 무엇이나 될 수 있지만 실은 한 사람은 대개 매우 제한된 정체성을 가지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에는 관성과 습관이 붙고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할 수도 있는 무한한 모든 것을 동시에 하고 동시에 느끼며 살기보다는 어떤 뭔가로 산다. 그 뭔가가 우리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때로 강렬하게 인식될 때도 있고 잊혀질 때도 있다.

 

불교신자들은 종종 다른 신자들을 가르켜 도반이라고 부른다. 도반이라는 말은 함께 불도를 닦는 벗이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도를 구하는 구도자로 파악한다는 의미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서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많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신이 창조한 형제요 자매라는 뜻일 것이다.

 

도반이라고 부른다거나 형제자매로 부르는 행위는 그저 형식뿐인 것같지만 실은 의식의 저 밑에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즉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강력한 작용을 한다.

 

예를 들어 도반을 생각해보자. 도반이라는 호칭은 서로에 대한 애정과 동지감을 만들어 낸다. 산의 정상근처에 있건 이제 산의 초입에 있건 같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도반이라는 호칭은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구도의 길을 걷고 있으며 서로 다른 사람들이지만 결국 구도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한 존재라는 의미다. 도반이라는 호칭은 우리의 삶의 첫번째 동기가 되는 것은 바로 도를 구하는 것에 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도를 구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으며 따라서 당신이 가난하건 부자이건 무식한 사람이건 유식한 사람이건 일본인이건 미국인이건 러시아인이건 한국인이건 어리건 늙었건 모두 평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목표가 도를 구하는것에 있을 때 가진 돈이 얼마냐 던가, 가진 지식이 얼마냐던가, 국적이 어떻게 된다던가, 나이가 어떻게 된다던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도를 구하거나 도에 가까이 갔을 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름은 종종 망각되기도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반이나 형제 자매로 부를 때 우리는 종종 우리가 어떤 종교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느낀다. 그것은 이 세상이 그런 종교로 가득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들은 도반이 아니고 형제자매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호칭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전도를 한다면서 당신앞에 나타나서 자매님이라고 부르면 그 순간 거리에는 어떤 긴장감이 생긴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종교가 세상을 가득채우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사람들을 특정한 관계로 만나고 있다는 생각자체를 하지 못하며 그들의 이름은 더이상 쓰이지 않은 채 망각되고 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서로를 만날 때 안녕하세요, 21세기인간이라던가 안녕하세요 지구인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한국의 거리에 나가서 안녕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없다. 우리 모두가 21세기 인간이고 우리모두가 지구인이며 한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호칭은 그렇기 때문에 망각된다.

 

이름의 탄생

 

다시 우리로 돌아와서 간단한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뭐하는 사람인가? 즉 우리의 진정한 이름은 뭐라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나는 특별히 이름따위 가지고 있지 않다거나 나는 한국인이고 한 개인이고 인간이고 아버지고 아들이고 하는 것들을 나열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런 말들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일전에 개인의 탄생이라는 글에서 논한바 있거나와 우리는 한명의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모두 개인이지만 우리가 개인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당연하고 간단한게 아니다. 우리가 개인이 된다는 것은 좁은 의미로 말했을 때 우리가 개인으로서 행동하고 개인으로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 소유를 가지고 개인적 공간을 가지고 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 눈떳을 때 비로소 개인이 된다. 이런의미에서 개인이란 그리 흔한게 아니고 과학혁명이나 종교혁명과 같은 문화적 운동을 통해서 그리고 스스로 개인임을 자각함으로서 탄생되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말을 아버지나 아내, 아들이나 과학자나 한국인같은 여러가지 이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스스로 그런 이름에 걸맞는 자각을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 그런 것들이 된다. 그저 생물학적으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성립한다고 해서 거기에 가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란 문화적으로 창조되고 인식되는 것이며 선택되고 행동되어지는 것이다. 한국국적이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우리로 돌아오자. 우리는 뭐하는 사람인가.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이 글의 핵심적 주제다. 앞에서 우리의 이름은 종종 그것이 너무나 당연해 보이기 때문에 망각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라. 실제로 우리는 그래서 종종 우리의 이름을 망각하고 그것으로 산다.

 

우리의 이름은 종종 경제인이나 사회인이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돈을 벌거나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나 유명해 지거나 사회적 지위를 얻어 권력을 가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볼 때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안녕하세요 경제인이라던가 안녕하세요 사회인라고 인사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러니까 그 이름이 잊혀지는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문화적으로 동화되고 어떤 이름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잊는다. 그 이름은 문화적 개종의 짧은 순간동안만 의식될 뿐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반성의 문제로 보지말고 그 이전에 이런 선택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어떤 결과가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들을 돈이나 명예는 나쁘거나 쓸모없는 것이라는 주장이라고 쉽사리 판단해 버려서는 안된다. 실제로 그게 아니니까. 누가 양복바지는 안입고 청바지만 입기에 너는 청바지만 입는구나라고 말하면서 너에게는 다른 바지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더니 그 말을 듣고서는 아 그래 청바지는 쓸모없다는 거지 하지만 청바지가 편하고 좋잖아라고 대답하는 것은 어딘가에서 미묘하게 대화가 어긋나 있다. 누가 먹기만 하길래 세상에는 먹는것 말고도 좋은게 많다고 말했더니 먹는건 필요없다는 거지, 하지만 안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있어라고 말하는 그런 식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태도는 어딘가에서 대화가 어긋나 있다. 그들은 이상하게 핵심을 부정한다.

 

앞에서 우리가 예로 들었던 도반이라는 이름과 경제인이라던가 사회인이라는 이름을 비교해 보자.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뭔지를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의식 저 밑에서 존재하는 우리의 이름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결정한다.

 

도반들과는 달리 경제인들이라면 우리의 행복은 돈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돈은 종종 제로섬게임에 의해서 들어오는 것이라 내가 얻자면 누구는 돈을 잃어야 한다. 다시 말해 경제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로 파악되기 쉽다. 그들은 항상 누가 내 돈을 가져갈까봐 겁낸다. 사회적 지위를 노리는 사회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누가 내 불도를 가져갈까봐 겁내하는 도반이란 이상한 표현이다.

 

서구경제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사회를 개인의 합으로 생각하고 개인은 개개인의 금전적 이득을 최대화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진 존재로 파악한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들을 때 우리는 그것을 당연시 여기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본래 자기 이익을 최대로 하려고 하잖아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존재가 당연시 되지만 정말 우리는 개인들인가?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당연시 한다. 그러니까 그들로서는 가장 소득이 적은 노인들이 부자들 세금 더 내는 것에 대해 폭탄운운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봉건제 밑에서 왕을 걱정하는 천민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정말 이기적인가? 당신의 부모가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려고만 했다면 자식인 당신에게 희생을 왜 할까? 서로를 도반으로 파악하거나 형제자매로 파악하는 불교나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가서 그런 말을 던지면 사람들은 이게 왠 말도 안되는 소리냐면서 웃을 것이다.

 

우리는 문화적 영향력에 따라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이름을 얻는다. 하나의 문화는 정상인의 개념을 도입한다. 인간은 본래 이렇게 하는 존재라는 것이며 이것 저것이 없는 것은 사악한 인간이거나 불쌍한 인간으로 파악되거나 정상인이 되기위해 노력해야 하는 인간으로 파악된다. 예를 들어 돈이나 직위야 말로 행복한 인간이 되기위해 기본적인 것이라고 믿는 문화에서 돈없고 직위없는 인간은 무가치하고 불쌍하고 돈과 직위를 얻기위해 빨리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예쁜 얼굴이 행복에 필수불가하다고 믿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간적 성숙함이나 남성으로서의 전투기술이야 말로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치와 이름의 관계

 

얼마전에 중국에 대한 다큐를 봤다. 그 다큐는 현대의 중국인들이 왜 모택동을 좋아할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들이고 있었다. 왜냐면 서구적 시각에서는 이상하기 때문이다. 모택동이 사망하기 전에 벌어졌던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수천만명을 폭력이나 굶주림으로 죽게 만든 보기드믄 정책적 실패의 예다. 그런 모택동을 현대의 중국인들이 그리워 한다는 것은 서구인에게는 큰 미스테리인 것이다. 모택동이 다시 일어나 문화대혁명을 다시 한번 일으키면 중국은 망할 텐데 말이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사실 한국에서도 다수의 사람들이 중국인들이 모택동을 좋아하듯이 박정희를 좋아한다. 그들은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위해 노력하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서 박정희같은 인물이 21세기에 부활하면 좋은 세상이 올 것처럼 세상을 보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부패의 증거들을 무시하고 박정희는 누구보다 청렴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 다른 사람들은 때로 박정희를 비판하는 자료를 보여주거나 혹은 박정희의 공과 과를 동시에 평가한다는 식의 절충을 보여주지만 그런 것이 어떤 효과를 발휘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떤 진전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지적을 하는 사람이나 지적을 받는 사람 양쪽 모두가 자신들의 이름에 대해 즉 자신들이 뭐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자신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의 문화가 주장하는 정상인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때만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즉 FTA를 찬성하냐라던가 철도노조파업에 찬성하냐라던가 이명박을 좋아한다던가 싫어한다던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원초적인 질문들을 던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인간은 어떨 때 행복해지는가, 우리는 뭘하는 사람들인가 같은 질문이다. 이 글의 문맥에서 말하자면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토론은 결론없이 떠돈다. 국민연금이나 철도파업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 이야기해야 할 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던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처럼 느껴지면서 말문이 턱턱막히게 된다. 그런 토론을 통해 설사 표면적인 것에서 어떤 합의를 이루게 되었다고 해도 별로 의미가 없다. 곧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 아 나는 그런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거나 그건 답이 뻔하다면서 오히려 질문을 부정하고 마는 것이다.

 

올바른 이름은 무엇일까.

 

올바른 이름, 올바른 정체성, 올바른 국가, 올바른 문화란 그럼 뭘까. 무엇보다 우리는 그것이 큰 포용성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안에서 못생긴 사람도 잘생긴 사람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남자도 여자도 노동자도 기업가도 예술가도 과학자도 젊은이도 노인도 모두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때 우리는 남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를 요구하게 된다. 인간이라면 복소함수론이나 미분기하학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수학공부를 할 것을 강요하는 사람이 옳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혜택이 정말 엄청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나는 우리가 한명의 인간으로서 그저 먹고 소비하기 위해 산다고는 믿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세상과 우리 자신을 배우고 새로운 것을 보고 즐기며 사는데에서 행복이 온다고 믿는다. 나는 우리가 어떤 최종적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성장하고 그렇게 변해가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배우는 데에서 즐거움과 행복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영원히 학생인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공자의 논어는 바로 학이편에서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너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유명한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강조하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무지를 강조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이러한 견해는 점차로 망각되어지고 있거나 이미 완전히 망각되어졌다. 취업에 도움이 안된다면서 대학에서 학과가 폐지되고 아이도 어른도 모두 뭔가 원천적인 인생의 질문을 추구하기 보다는 소비적인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같다. 세상을 보는 시각으로서의 과학을 생각하기 보다는 과학이 어떻게 국민소득을 증대시켜줄 것인가만 이야기한다. 이러는 가운데 우리는 무엇보다 자기자신을 망각한다. 천천히 산책하고 사색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그것을 글로 정리해 보는 정도의 일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럴 때 우리나라는 단순히 먹고 싸는 인간들의 집단으로 변할 것이다. 거기에 어디 포용력이 생겨날 여지가 있으며 용기가 생겨날 여지가 있을까. 그저 더 비싼 옷이나 자동차나 아파트로 자신을 포장하여 성공한 삶인척 하는 것을 지속할 뿐이 아닐까. 그럴 때 우리나라가 통일을 이룬다던가 정치적 통합을 통해 국가발전을 이룬다던가 하는 일은 모두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가 존재한다. 그 문제의 해법은 다시 개개인으로 돌아가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산에 가지 않을 사람은 애초에 캠핑장비가 필요없고 도둑이 없다면 도둑을 잡기 위한 여러가지장비도 필요없을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답을 내지 못한채 사회적 문제의 답을 내는 것은 누가 입을지 모르면서 옷을 고르려고 하는것이나 마찬가지다. 항상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불행하고 불안하고 속았다고 느껴서 분노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인간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살고 그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로 파악할 때 우리는 다음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걸 위해 바람직한 삶이란 가정이란 학교란 사회란 국가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신의 이름도 모르면서 정의니 행복이니를 꿈꾸는 것은 자체모순에 의해서 비극을 만들어 내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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