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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신념과 혁신

by 격암(강국진) 2014. 5. 8.

2014.5.8

신념과 혁신

 

우리는 흔히 낡은 것에 익숙해져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참아내며 살아간다. 일상의 삶이 의미를 주지 못하는 사람들은 종종 새로운 세계로 초극하는 것을 꿈꾸는데 그것은 신의 세계일 수도 있고, 어떠한 새로운 이념이 보여주는 세계일 수도 있다. 그것은 새로운 로맨스일 수도 있고 춤이나 음악의 세계일 수도 있다. 뭔가의 이유로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답답해 하고 우리를 가로막는 것들에 대해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열정과 도전이란 다양하지만 사실 모두 이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일상에 지쳐서 여행을 꿈꾸는 사람에서 새로운 자극을 찾아 영화관을 찾는 사람,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혁명가, 종교적 열정에 빠진 구도자도 그 대상의 구체적 내용이 다를 뿐 그 열정의 구조는 비슷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익숙한 것에서 부터 탈출하려고 한다. 우리는 마치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주변의 먹이를 모두 소진한 애벌레나 단세포 생물처럼 다른 곳으로 움직여 가려고 한다. 살아있는한 그 여행은 영원히 계속 될 수 밖에 없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나는 영원한 평화에 이르는 궁극적 깨달음을 믿지 않는다. 그런게 있다면 그것은 죽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만약 인간이 이런 존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매우 원시적인 시대를 살고 있거나 이미 멸종하고 말았을 것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거나 귀족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사회개혁을 꿈꾸는 사람따위는 있지 않았을 것이다. 평생 먹고 살 먹이를 구한 사람은 응당 세계를 등지고 어디 굴속에 파고들어가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변화하는 것은 진화와 생존을 위해 우리가 끝없이 반복해온 일이다. 적어도 우리중 일부는 그렇게 한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일상의 작은 것에서도 과학의 발전사를 포함하는 다양한 인간 사회의 역사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혁신이나 혁명 혹은 발전이나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흔한 일이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흔히 벽에 막혀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좌절한다. 혁신은 어떤 때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무엇이 혁신을 가로 막는 것일까.

 

물론 세계의 묘비들에는 여러가지 죽음의 이유가 새겨져 있다. 혁신이 실패하는 이유는 한두가지가 아니겠지만 우리가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혁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논리와 합리적인 이성같은 것 이전에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혁신이란 그것이 무엇이든 기성의 시스템을 파괴하고 새로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잘 정돈되어져 있고 강력한 자기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적어도 초기에는 비합리적이고 증거에 반하는 이상한 짓, 말도 안되는 짓이 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현대의 과학을 만들어 낸 데카르트나 갈릴레오 갈릴레이, 뉴튼등의 역사적 인물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모두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부분 우리가 이미 과학혁명이 성공한 시대에, 뉴튼의 시대에는 답이 없었던 질문들에 대해 이미 답을 많이 찾은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한다고 하자. 그 사람이 말하길 자신은 빨간 머리 여자가 좋으며 여자 머리가 빨갛다는 것은 그 여자가 가장 훌룡한 여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열렬하게 주장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할 것이며 머리 색깔이 빨갛다는 것만으로 어떤 여자가 훌룡한 사람일 거라고 믿는 것은 근거가 지나치게 빈약하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은 실제로 빨간 머리를 가진 형편없는 여자의 예를 찾아내서 말할지도 모르고, 머리색깔이라는 것은 애초에 염색을 하면 바뀌는 거라고 말할지 모른다.

 

우리는 과학혁명의 영웅들은 이 빨간머리를 좋아하는 남자보다 이성적이며 논리적이라고 믿을지 모르지만 그 차이는 적어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작다. 현대 과학은 어떤 면에서 수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피타고라스 종교의 신도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즉 이 세상에는 수학적으로 간결한 법칙이 객관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존재한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그런 수학적 간결함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미적 감각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고 심지어 그런 법칙을 믿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증거가 있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들은 간결한 수학적 법칙을 믿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구가 둥글고 자전을 한다는 생각에 익숙하지만 처음 그런 주장을 하던 사람들은 지구가 그렇게 빨리 돈다면 부서지지 않겠냐는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 그들은 그런 지적에 대해 합리적으로 답할 방법이 있어서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을 계속 믿은게 아니다. 지구가 움직이지 않고 천체가 움직인다고 믿었을 때의 서구의 천문학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수십개의 원들이 복잡하게 움직이는 시스템이었다. 즉 수학적으로 아름답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믿는 과학법칙은 수학적으로 간결하기 때문에 당장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있어도 아마 나중에는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을거라고 믿으면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비슷한 것은 양자역학이 만들어지던 초기에 아인쉬타인과 하이젠베르크가 나눴던 대화에서도 나온다. 하이젠베르크를 초대해 양자역학에 대해 대화를 나눴던 아인쉬타인은 너무나도 많은 질문이 그대로 남아있는데도 양자역학이론을 믿는 것에 대해 비판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그런 아인쉬타인을 납득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대화의 끝에 가서 결국 아인쉬타인에게 통했던 주장은 양자역학의 수학적 간결함이었다. 고전역학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현상들을 수학적으로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양자역학의 연구를 계속하게 만드는 동력이었던 것이다.

 

물론 과학적 법칙을 단순히 믿음의 문제로 말한다는 것은 지극히 불공평한 일이다. 하나의 법칙이 주장되면 그것은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검증되며 그 유용성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튼의 법칙도 수백년만에 수정을 했으며, 절대로 틀릴수 없는 진리의 예로 생각되어지던 유클리드 기하학도 수천년이 지난후 여러가지 가능한 기하학중의 하나일뿐임이 밝혀 지는 예에서 보듯이 오랜 시간 검증하고 믿어왔다고 해서 어떤 믿음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는 그 수정을 아주 사소한 수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기존의 사고방식이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알고보면 매우 큰 것이었다. 기존의 이론으로는 애초에 고체가 존재하고 진화란게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태양이 에너지를 어떻게 만드는가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했다.

 

같은 상황은 현재도 진행중 일수 있다. 예를 들어 인식의 문제나 뇌를 이해하는 문제등 과학적 난제로 남아있는 문제들을 우리가 기존의 과학적 법칙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작은 가능성이나마 사실은 우리가 가진 과학의 기존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우리는 간결한 수학적 표현을 가진 법칙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전제하고 객관적 자연법칙을 찾아왔는데 그런 법칙은 이 세계의 아주 다양한 면을 잘 설명할수는 있지만 사실 그런 법칙을 전제하는 순간 우리는 인식이나 뇌를 이해할 방법이 없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아주 새로운 이해가 가능하다는 점이 아니다. 나는 과학같은 것도 실은 믿음에서 시작했으며 강한 믿음이 없었다면 혁신은 있을 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혁신에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은 오히려 누구나 이 문장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과소평가 되는 면이 있다. 즉 사람들은 혁신을 하자면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정도로 이해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어야 한다. 도대체 강한 의지라는 것은 왜 존재하는가. 그냥 참을 성의 문제인가? 우리는 왜 뭔가를 그렇게 강하게 믿을까? 왜 믿어야 할까? 굳은 의지를 가지자고 자기를 격려하면 의지의 문제는 거기서 끝인가?

 

과학이 발전하면서 과학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신이 등장할 필요가 없는 과학적 법칙의 존재는 종교를 약화시키는 동력이 되곤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물론 뉴튼도 독실한 신자였고 실은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과학자체보다도 신이었다. 즉 수학적으로 간결하고 아름다운 법칙의 존재는 신의 위대함을 밝히는 증거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과학적 탐구는 어떤 의미에서 신에 대한 헌신의 방법이었던 것이고 바로 그런 동기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 과학이 어떤 현실적 실용성을 가지지 못했던 시대에도 그들은 엄청난 노력을 들여서 그것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사소한 믿음때문에 인생을 걸게 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그것이 남에게는 시시한 것이라도 나 자신에게는 뿌리깊은 의미에 기초한 믿음이어야 한다. 인생을 건다고 할정도로 절박하지 않은 믿음이라면 아무래도 혁신을 이뤄내기는 힘들다. 우리가 익숙한 것들이 그 혁신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우리가 뭔가를 포기하지 않고, 모든 불리한 증거와 조언들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추구하는 것은 그저 표면적이고 사소한, 이래도 저래도 좋은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 저 깊은 곳에 있는 것과 연결된 믿음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 믿음은 따지고 보면 나라는 존재가 가진 욕망의 핵심에 닿아 있다. 그것은 종종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보면 의지의 근원으로서 어떤 후회나 한을 가진 인물이 등장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드라마 대장금의 주인공 대장금은 수없이 많은 역경속에서도 한가지 믿음, 한가지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그 주인공이 어렸을때 부모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말했기 때문에 두분의 부모님이 모두 죽게 되었다고 하는 자책감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제 부모님이 남기신 말과 뜻을 어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녀는 대충 살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단순하고 원초적인 욕망을 위해서 혁신을 이루게 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돈을 벌어서 잘먹고 잘입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사실은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에 있는 어려움이 더 크다. 공부를 잘해서, 예술가나 과학자로 성공해서 남의 부러움을 사는 것도 좋은 것이지만 그걸 이뤄내기 위해 참아내야 하는 어려움이 더 크다. 심지어 여행을 떠나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것도 공짜가 아니다. 돈을 지출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러가지 귀찮음과 피로함을 참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열정의 뒤에 있는 믿음과 동기가 우리의 저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닐때 우리는 행동하지 않는다. 행동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 대한 관심도 소망도 여한도 전혀 없는 사람은 심지어 먹고 마시는 것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전혀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던가 세상의 새로운 장소를 찾아나선다던가 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머리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도 결국은 주저앉게 된다.

 

나를 찾는다던가 나를 지킨다던가 하는 것은 결국 나를 움직이는 진짜 동기를 찾고 그것에 솔직해 지는 일이이다. 언뜻 나는 유명해 지고 싶다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을 잘 살피면 그렇게 되고 싶은 욕망의 뿌리는 어렸을 적에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다던가 부모님에게 무시당했던 기억때문일지 모른다. 즉 실은 온세계를 바꿀것이 아니라 그저 한명의 친구나 부모님과의 화해가 핵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우리는 답은 뒤로하고 그것을 빙둘러서 해결하려고 평생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많은 것들 듣고 보고 배운다. 그리고 그때문에 나 자신의 욕망과 믿음보다는 남의 믿음에 따라 일을 선택하게 되는 일이 많다. 가져야 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고,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을 너무 많이 가진다. 크게 가치가 없는 일에 코가 꿰여서 인생을 소진해 버리고 만다. 나에게 큰 가치가 없는 것을 너무 비싼 댓가를 치루고 산다. 우리는 때로 그럴 필요가 없는 것같은데도 거기에 몰입하는가 하면 마땅히 몰입하여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도 마냥 머뭇거린다.

 

스스로 자신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음과 몸이 따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신의 진짜 마음은 저 깊은 곳에서 이런 것들이 진짜 중요하다고 믿거나 혹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믿는데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그와 반대로 가는 것이다.

 

우리는 합리적이거나 바람직한 것을 고민해서 진정한 혁신을 이뤄내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은 그리 길게 추구되지 못하고, 대개 기성의 시스템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미래 사회란 무엇일까에 대해 길고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철든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할 수록 그러한 미래의 청사진은 본질에서 벗어난 시간낭비가 된다. 지금과 다른 사회를 꿈꾸는 것의 본질은 단순하다. 이거 멋지다는 순수한 감정 그리고 그에 대한 공감이다. 멋지니까 포기가 안되고 남들이 뭐라하건 자꾸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차려보면 우리는 이미 예전과는 전혀 달라져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뛰어난 재능의 차이도 있는 법이지만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뭔가를 오래동안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 오랜 노력이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이거한번 해볼까 생각하는 사람이 뛰어넘기 어려운 차이를 만든다. 결국 즐겁게 뭔가를 하는 사람을 그렇지 못한 사람이 이길수 없고 이길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그건 자기 꿈이 아닌 것이니까.

 

흔히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찬양받는 이유는 이때문이다. 복잡한 생각과 계산 이전에 그저 순수하게 멋진 것에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든 어른들은 그런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공포와 불안이 우리를 자꾸 다른 사람을 흉내내는 사람 혹은 그저 어제 성공한 것을 반복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한 곳에 머물게 한다. 심지어 계속 여기 머물면 모든 것을 잃게 되고 심지어 의미없이 죽게 된다는 것을 알아도 굳어지고 고정되어 죽은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다.

 

나는 글쓰는데 소질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대학시절부터 이런 저런 이유로 돈도 안되는 글을 계속 써왔다. 잘쓰던 못쓰던 썼다. 그러다보니 수천편의 글을 썼는데 꽤 긴 분량의 글도 있었기 때문에 그걸 다 합한다면 아마 책으로 수십권분량은 되지 않을까. 그걸로 내가 돈을 번적은 거의 없다. 글을 써야겠다고 노력한 적도 없다. 돌아보면 글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자기를 정리하고자 하는 욕망이 내 안에 가득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았나 싶다.

 

나의 많은 글들은 유실되었고 유실되어도 아깝지 않지만 나는 몇년전부터는 블로그에 글을 모았다. 미래에 내가 뭐가 되든, 내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천편이상의 글은 나의 흔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 글들은 마치 어떤 산에 심은 나무와 같다. 누가 그 나무를 심었는지 사람들이 몰라도 그 나무는 확실히 세상의 일부로 나무를 심은자가 죽고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 글도 존재하게 될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글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위해서 연습을 하자고 생각해서 글을 썼다면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단지 그게 즐거웠을 뿐이다. 덕분에 나는 일종의 문집을 가진 남자가 되었다. 이런 것이 무슨 세상을 놀라게 할 업적은 아니지만 문집을 가진 남자가 되는 것도 그리 쉽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므로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대견하게 생각한다.

 

혁신이나 혁명이란 복잡한 이론이나 당위가 아니라 오히려 순수하고 단순하게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다. 복잡한 논리나 철학이전에 그 느낌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혁신은 좌초하고 말것이다. 그 느낌이 유지된다면 이 세상이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한마디 하는 것, 한가지 행동을 하는 것, 길을 가다가 본 뭔가 때문에 이건 멋지다던가 이건 뭔가 아니다던가 해서 좀 다르게 시간을 쓰는 것, 그것이 결국 시간이 지나고 보면 혁신을 만든다. 우리는 어느새 전과는 전혀 다른 곳에 서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지나고 나면 마치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일을 추진한 것같다. 실은 그저 대부분 아무 생각없이 마음의 소리를 따랐을 뿐이라거나 왠지 포기가 안되어 자꾸 그것을 하게 되더라는 것인데 말이다. 그것이 결국 나를 찾는다던가, 나를 지킨다던가, 나를 이룬다던가 하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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