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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기본적 질문과 우리의 생활

by 격암(강국진) 2014. 9. 26.

2014.9.26

여행의 즐거움 혹은 여행의 의미는 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곳에서 떠나서 그것과는 다른 곳에 가보는 것에 있다. 우리는 다른 곳에 가서 그 곳이 우리가 사는 곳과 뭐가 다른가를 보고 느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방식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차이라는 것이 어떤 것은 잘 보이고 어떤 것은 잘 보이지 않으며, 모든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 잘 보이지 않는 차이 일 수록 더더욱 중요하다는데 있다. 왜냐면 분명 어떤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를 이거 라고 말하기 어려운 경우, 그 이유는 그 곳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런 저런 것을 가정한다던가 이런 저런 것을 믿는다라는 생각 조차 없다. 그저 이런 저런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같은 집에서 살았던 부부의 대화는 많은 것이 생략되어져 있다. 집을 나가는 남편에게 잘 잠궈 라고 말하는 아내는 종종 뭘 잘 잠구라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뭘 말하는 것인지 남편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문제지만 사실 모든 대화는 이렇게 어떤 것들을 말하지 않고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알고 있고 동의한다는 전제하에 이뤄진다.

 

그러니까 다른 문화권에 가서 그들의 다른 행동을 봐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도 왜 이렇게 다른 문화가 나오게 되는 것인지는 쉽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문화가 다른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대화를 하면서 말하지 않은 어떤 부분이 당연히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나는 약속을 어긴게 아닌데 상대방은 내가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래에 더 쓰겠지만 문화적 차이가 분명해도 그 차이가 도대체 뭔지를 설명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에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우리가 단단한 실체로 생각하는 언어나 개념이 상대편에는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허깨비 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나 내가 사는 마을, 문화권과의 차이를 느끼는것이 그 본질이라고 할 때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일종의 여행이다. 우리가 옛날 집에 가서 옛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우리의 차이를 느끼듯이 옛 사람이 남긴 글을 읽을 때도 우리는 그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구나 하고 우리와의 차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알아보기 어려운 차이 따라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이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은 메타피직스의 번역인데 메타피직스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전해진다. 그는 피직스 이전에 나오는 것에 대해 메타를 붙여서 메타피직스라고 했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이 뭔지는 정의 자체가 애매하지만 그것은 기본적 가정에 대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 세상이 어떠한가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어떠한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뭘 가정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까마귀 한마리를 보았다고 하자. 그럴 때 우리는 저기 까마귀가 있다. 그 증거는 내가 그것을 보았다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관찰을 통한 정보얻기가 시작되려면 우리는 기본적 가정이 필요하다. 우리가 미친 사람이거나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거라면 까마귀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유령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해서 유령의 존재의 증거가 있다라고 믿지는 않는다.

 

이쯤되면 이미 이런 허황되어 보이는 일이 나의 일상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는 회의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사실 형이상학의 공부란 쉽지 않아서 소득이 없기 쉽고 종종 위험하기 까지 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어떤 공통의 것을 믿는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기본적 전제에서 다른 것을 느끼고 다른 것을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주변 사람과 대화가 어려워진다는 것 그리고 주변사람과 세상일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한방 가득히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 사람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횡설 수설할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대개 그 사람을 정신병원으로 보내거나 미친 사람으로 여겨서 멀리 한다. 형이상학의 공부라고 할 정도로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위험하기도 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기본적인 것을 분명하게 느끼게 되기 전에라도 우리는 이따금 어떤 위화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세상이 꼭 이래야 하는지, 이건 지옥같은거 아닌지, 왜 이런 것은 그렇게 당연하다고 하는 것인지, 정말 그런지, 너는 그런것도 모르냐면서 나의 서투름을 비웃는 저 사람들은 정말 뭘 알아서 저렇게 자신감에 넘치는것인지, 당신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유를 몰라도 생활이 괴롭다. 그리고 그런 의문이 자라나서 뭔가를 더 구체적으로 보게 되면 결국 당신은 실은 내가 미친게 아니라 이 방에 있는 사람들, 우리 가족이라고 하는 사람들, 이 마을에 있는 사람들, 이 나라에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 모두가 미친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해서 당신은 문화적 정신적 소수자가 된다.

 

문화적 정신적 소수자는 자신과 문화가 다른 주변의 현실이 그들과 문화를 공유하는 책이나 영화, 음악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정신병동에서 혼자 제 정신으로 살면서 바깥 세상으로 통하는 단하나의 소통구인 전화기를 가진 사람과 같다. 그나 그녀는 다른 사람이 무섭다. 그 사람이 현실의 소리를 들려주고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들려주는 전화기에 매달리게 되는 것, 그 전화기가 산소호흡기처럼 느껴지고 문화적 오아시스를 꿈꾸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통상 형이상학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어떤 것이 어떻게 존재 할 수 있는가라던가 어떻게 우리는 뭔가를 알게 되는가라던가 같은 질문을 연구하는 것이지만 나는 형이상학이란 기본적 가정에 대한 것이며 그래서 절대적으로 말해 이런것이 형이상학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별로 큰 의미는 없다. 즉 어떤 나라에서는 매우 구체적인 과학적 이론으로 보이는 것도 어떤 곳에서는 형이상학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마을 바깥에는 뭐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형이상학일지 모른다. 뭐가 기본적인가 하는 가는 우리의 사고방식의 구조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기본밑에는 또 기본이 있다. 세상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가장 기본적인 질문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점은 중요하다. 기본적 질문을 공부하는 것에 있어서 우리의 일상생활과의 관계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술을 통해 우리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뭔가를 자르고 채워넣는 일에만 몰두하여 환자가 죽어버린다면 그런 수술은 의미가 없다. 공기가 다른 철학적 논증을 읽으며 자신을 새롭게 하고 남들이 기본적 질문에 대한 고민을 한 것에 대해 귀를 귀울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자신의 생활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게 되면 즉 자신의 현재 사고 방식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는 정신적 미아가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전적으로 계승해야 한다. 한 걸음의 비약도 어려운데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무로 만든다면 그 사람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왜 기본적 질문들은 말하기 어려운가하는 것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고 형이상학의 한 예에 말한 연후에 이 글을 마치도록 하자. 왜 기본적 질문들에 대한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가. 그것은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상자안에 빨간 공과 파란 육면체 밖에 없다고 하자. 이 물체들이 상징하는 것은 언어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 빨간 공이 아니면 파란 육면체라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한다. 즉 빨간 육면체같은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한계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데 있어서 문제를 일으킨다. 무엇을 봐도 우리는 그게 빨간공이야 아니면 파란 육면체야 라고 질문하게 된다. 문제는 세상에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고 방식자체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조심스레 답을 골라도 답은 틀리게 된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저자 퍼지그는 퀄리티의 형이상학이란 것을 논한다. 그는 지적한다. 이 세상을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으로 나누는 것, 물질과 마음으로 나누는 것 이런 생각들이 우리에게 치명적인 정신적 오류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분리하고 나자 우리는 말하자면 둘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즉 이 세상에 실체는 물질이며 주관적인것, 마음에 속한 것은 환상이고 허깨비라는 물질론을 택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관념론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 모든 것이 허깨비라는 선택대신 과학은 물질론을 택하여 발전하고 그러다보니 우리는 물질론에 익숙하다. 정신은 곧 뇌이고 뇌세포이며 전자와 양성자인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이번에는 사물의 가치라는 것이 허깨비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진다. 물질론은 물질만을 실체로 여기며 따라서 비물질적인 것이 물질에 영향을 미칠 수도 없다. 물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질론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치나 윤리의 무게나 부피는 얼마인가, 그게 어떤 자연법칙을 따르는가를 따지면 그런게 없다. 따라서 우리는 가치적인 파산에 이른다. 그리고 고도의 논리적 조직화가 계속 되어갈 수록 우리는 모순을 키운다. 물질론을 믿으면 주관적인 요소가 있는 가치는 허깨비처럼 보인다. 게다가 가치는 주관도 객관도 아니다. 가치는 분명히 주관적인데가 있지만 그것이 순수히 주관적이라면 서로 다른 인간들이 그렇게 쉽게 같은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객관적인 면도 있는 것이다. 가치는 빨간 육면체다. 그러므로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속에서 실종된다.

 

우리는 과학을 발전시키고 사회를 발전시킨다. 그게 전부 좋은 세상을 좋은 삶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좋다라는게 허상이라면 이 모든 것은 허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나마 세상이 단순하여 내가 칼이나 총으로 누구를 죽이는 상황이라면 나는 어쨌건 나의 윤리적 선택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이론이야 어떻건 인간적 윤리가 작동하게 된다. 그런데 작업이 길고 긴 자동화와 분업을 거치게 되면 이젠 누구도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주식을 샀으니 그 회사가 돈을 더 벌었으면 좋겠고 그 회사는 돈을 벌기 위해서 합리적인 선택들을 하는데 그 합리적인 선택들은 돌고돌아서 인간들을 비참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마치 긴 끈을 가지고 스스로의 목을 죄고 있는 미친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된다. 정치적으로도 우리는 혹시 열심히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사람들을 청와대로 보내서 스스로 자살하려는 사람은 아닌가?

 

문제는 이것이 어떤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아주 기본적인 곳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의 형이상학 혹은 우리 사고의 기본적 전제들은 우리를 장님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그 기본에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 제자리를 맴돈다.

 

앞에서 말한 퍼지그는 이 퀄리티의 형이상학을 받아들일 때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에 대해 설득력있게 주장하는 것은 그 책 그 자체이고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형이상학이 기본적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은 우리의 무지를 자각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보고 느끼는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서 세상을 볼 때 가치의 문제는 해소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세상의 실체 전부가 아니라 그것을 축소하고 선택한 결과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상자안에 빨간 공과 파란 육면체만 있어도 빨간 육면체가 존재할 수 있는 여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퍼지그는 그의 퀄리티를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도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노자는 도는 마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불확실성과 우리의 무지는 마르지 않으며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보았다고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이 점을 사고의 출발점에서 부터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겸손함에 대해 배우게 된다.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다시 단순한 삶이라는 주제로 돌아 나온다. 우리는 무지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이나 이론은 우리가 모르는 헛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런 개념과 이론을 쌓고 쌓아서 거대한 성채처럼 만든 복잡한 삶을 살면 그 삶은 자꾸 망가진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디서 문제가 있는지도 알기가 어렵다.

 

우리는 가능한한 단순하게 살고 꼭 필요한 것에만 관여하며 무엇보다 가능한한 많은 것을 우리가 직접보고 느끼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살아야 한다. 누가 말했으니까, 이건 원래 이러니까 라는 식으로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금새 환상에 둘러쌓이거나 답없는 궁지에 빠지게 된다. 판단의 대상과 직접 접촉하고 깊이 생각한 후에는 마음이 따르는대로 가볍게 선택하는 것이옳다. 그럴 때 우리는 말에 휘둘리지 않고 현실을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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