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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더 커다란 생각이 없는 삶

by 격암(강국진) 2014. 10. 2.

2014.4.2

개인의 탄생이라는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원근법이 없는 그림을 그리다가 그것이 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 우리는 마치 과거 서양의 르네상스같은 시대를 다시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원주민부족의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아래에 보여지는 것처럼 여전히 원근법이 없이 마치 이집트 피라미드의 그림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아이가 원근법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보았다, 그 그림을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는 한참을 보다가 말한다. "아 아저씨는 이제보니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군요!"

 

그림에 원근법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세상을 보다 정확히 그리는가 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걸 고대인들의 지적인 무능, 기술적 무능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들도 당연히 먼 것은 작아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먼데서 누군가가 다가오면 그의 키가 커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관점에서 그림을 그리는가의 문제다. 원근법이 없는 그림은 세상을 보는 사람의 관점이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다. 즉 특정한 위치에서 특정한 사람이 본 모습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에게 통하는 그림을 추구한 것이다.

 

원근법이 있는 그림은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의 눈에 보이는대로 그리는 것이다. 왜 옛날 사람들은 그런 그림이 안 중요하고 원근법이 없는 그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최근의 사람들은 왜 원근법이 있는 그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그리게 되었는가. 그림에 원근법이 있는가 없는가는 지식의 절대성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원근법이 없는 그림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이고 모두에게 통하는 지식이다. 반면에 원근법이 있는 그림이란 내가 직접 보고 관찰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직접 관찰한 사실로 세상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근대과학 혁명을 만들어 낸 정신이기도 하다.

 

이와 아주 비슷한 일은 20세기에도 일어났다. 절대적 관점을 포기하고 스스로 관찰하여 이론을 만든다고 하는 정신은 근대과학의 출현과 함께 완벽히 구현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절대적인 법칙, 절대적인 진리를, 즉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철학, 정의, 윤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래서 원근법이 없는 그림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말과 글에서는 원근법이 없는 그림과 같은 특징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은 관찰자가 들어나지 않는 객관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지식이 쌓여가고 철학이 복잡해지면서 사람들은 비슷한 벽에 부딛힌다. 그것은 바로 절대적 객관적 진리는 찾을 수 없거나 비실용적이라는 것이다. 즉 그런 지식, 그런 진리를 찾을 수 있어도 그것은 너무나 복잡하다.

 

진리라고 하면 왠지 우리와 거리가 멀어보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삶의 의미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모두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그것이 없이는 공허한 마음때문에 행복하지 않고 심지어 스스로 불행과 고민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추구하는데 그 질문은 과학혁명이 있고 나서도 오랜동안 절대적인 차원에서 추구되었다. 즉 모든 인간에게 답이 되는 철학을 찾고, 특정한 사람인 제임스나 철수의 인생의 의미를 특정한 시간과 장소의 관점에서 묻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객관적 관점에서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은 삶의 의미는 질문되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조건은 부조리하다. 의미란 문맥에서 나오는데 인간은 유한하고 우리의 삶도 유한하다. 반면에 세상과 시간은 실질적으로 무한하다. 문맥은 언제나 무한히 넓혀질 수 있다. 삶은 객관적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유한한 인간은 결코 절대적 차원에서 의미를 추구할 수 없다. 사실 이미 동양에서는 옛날 부터 세옹지마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사건의 최종적 의미는 결코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따라서 그럼 하나 하나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힘을 잃는데 그런 추구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도 나와있다. 우리는 이제 커다란 이데올로기, 커다란 사상이 세상을 휩쓰는 시대를 지나왔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한다. 바로 당신 자신의 삶을 관찰하라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론을 만들고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정신적인 차원에서 원근법이 있는 그림을 그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근법이 있는 그림의 출현은 동시에 그림의 주제도 바뀌는 것을 의미했다. 이전의 그림은 신화를 주로 주제로 했고 근대의 그림은 개인적인 삶이 주제로 많이 선택되었다. 우리는 같은 것을 철학의 차원에서 해야 한다. 이제 민족이니 국가니 민주주의니, 평화니 하는 거대한 주제를 내려놓고 작은 자기 자신의 삶을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 그런 살핌속에서 우리 개개인은 각자의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변화는 통신혁명의 결과 지식이 폭팔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즉 인쇄혁명의 결과 지식이 쌓이는 속력이 달라지자 과학혁명이 촉발되었듯이 컴퓨터와 통신혁명을 통해 전과는 다른 속력으로 지식이 쌓이고 유통되는 오늘날의 시대는 보다 개인적인 사상, 개인적인 철학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만화책 오타쿠로 살던 과학자로 살던 이발사로 살던 축구선수로 살던 많은 지식을 쌓고 깊은 생각을 해서 넓은 세상을 보던 아니면 아주 작은 세계에서 단순하게 살던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자신의 단계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태도가 권장되고 선전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에는 한가지가 빠져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그것은 종종 망각되어지는 것같다. 그것은 여러가지로 표현될 수 있는데 현재의 삶에 대한 위화감이라던가 삶의 불확실성이라던가, 무지의 존재라고 말해질 수 있고 심지어 노자의 도라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현재의 삶에서 다음 단계의 삶으로 변화해 가려고 하는 노력이고 느낌이다. 커다란 사상이 더이상 선전되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이 발견해온 철학들이 무의미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남의 사상을 읽고 외우는 데에만 시간을 쓰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사상, 자신의 철학,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의미다. 자신을 부정하고 성장하는 일도 멈춰서는 안된다.

 

하지만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 원시인으로 태어난다. 21세기에 태어난다고 해서 그 아이가 인류의 역사적 단계를 거치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 아이에게 노장사상을 설명해 주기 위해 무위자연을 말하면 그 아이는 그저 놀고먹는 것이 최고라는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현대의 사상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삶의 길을 찾아나갈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철학적 고민을 하고 더 근원적 차원에서 나은 삶을 고민하는 것은 의미없는 것이다라고 이해되어지기 쉽다.

 

물론 모두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도 나는 내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누구나 자기 관점에서 행복을 위해 뛰어가고 있으니까. 그러나 철학적이고 근원적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단순히 그렇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 닭공장에서 사육되는 닭은 닭튀김이 되기 위해 먹이를 받는다. 그 닭도 매일 매일 열심히 살지 모른다. 더 많은 먹이를 먹겠다고 사료속에 더 열심히 머리를 처박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닭공장에 있는 자신의 처지를 닭이 이해하지 못하면 더 많은 것을 먹어서 살이 찌게 된다는 것은 그저 더 좋은 먹이가 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적 차원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위화감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게 전부일까하는 질문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놓칠 때 우리는 그저 사료를 더 많이 먹어 더 빨리 누군가의 먹이가 되려는 닭의 신세가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성실하며 스스로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진짜로 열심히 산다는 것은 사료속에서 머리를 빼고 이게 전부일까를 생각하는 것인데 말이다.

 

바깥세상을 보자. 사람들은 선거철이 되어 이 세상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때가 되면 너도 나도 입을 모아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고만 외친다. 그러나 경제적 불공평을 만들어 내는 구조는 바로 우리가 경제적인 것만 신경쓰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새 철학하지 않는 닭이 된 것은 아닌가. 전에는 노동자가 불온한 사상을 배울까 기득권이 걱정했는데 이제는 스스로가 철학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철학에 빠져 불온하건 온건하건 아무 철학도 추구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길도 막혀 있는 상태가 된 것은 아닌가.

 

언젠가 내가 사르트르의 책을 읽고 있었을 때 그걸 보던 한 노부인은 아직도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 있네라고 말했다. 그분의 말씀은 오늘날의 세상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세지이며 그것은 맞기도 하고 안맞기도 하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스스로 길을 찾는 삶을 살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길을 찾는 행위 따위는 무의미하다, 아직도 문학이니 철학이니 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우리는 사료속으로 더 깊숙히 머리를 처박아야한다, 그것이 실질이고 현실이다라고 이해한다.

 

우리는 일상에 빠져들면서 더 커다란 생각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두 한가지 질문을 계속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이게 정말 전부일까라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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