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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장님과 여배우의 문제

by 격암(강국진) 2014. 10. 10.

2014.10.10

여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배우가 하나 있다고 하자. 그리고 어쩌다 보니 그녀와 알게 되어 붙어다니게 된 한 장님 여자가 있었다. 이 장님은 타고난 시각장애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 장님은 그 여배우를 아는 것일까 모르는 것일까. 그 장님이 그 여배우를 안다고 말한다면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말장난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예를 들어 그 장님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대화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여배우에게 유달리 친절한 것을 느낄 것이다. 그 장님여성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느낄까. 그녀는 그것이 그 여배우가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생각할까. 눈을 가진 우리의 입장에서 그거야 당연하지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한다. 그 장님에게 과연 아름다운 여배우라는 것이 뭘지.

 

물론 그 장님은 점자책을 읽거나 대화를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여배우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이해를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것도 간접적으로 경험을 해서 이해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의견의 차이를 보이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타고난 장님은 결코 여배우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것은 제 아무리 많은 양의 책을 읽고, 많은 양의 라디오 드라마를 들어도 그럴 것이라는 주장이다. 무지개에 대해 수없이 많은 설명을 들어도 그것은 결코 무지개를 보는 체험을 대신할 수 없으며 그렇기는 커녕 그 근처에도 갈 수 없다. 따라서 장님은 아름다운 여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거의 진전을 보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 답이 뭐가 되던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그것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타고난 장님은 여배우의 아름다움을 전혀 모르거나 거의 모르기 쉽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문제는 그 시각적 아름다움 때문에 유명해진 여배우에게 있어서 그녀의 외모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시각적 장애로 그녀를 보지 못하는 장님여성이 그 여배우와 같은 방을 쓰고 심지어 그녀와 긴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과연 그녀는 그 여배우를 알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앞에서 무지개의 예를 들었지만 예를 들어 음악의 경우 청각장애인은 아무리 긴 설명을 들었어도 음악을 들은 경험이 없으므로 절대로 음악이 뭔지 안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어느정도 공감할 것이다. 그 외모가 아주 중요한 여배우의 경우, 그 얼굴을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은 과연 그 여배우를 안 것일까 아닐까.

 

시각장애인이 과연 그 아름다운 여배우를 아는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녀에게 그 여배우를 포함한 세계가 어떻게 느껴질 것인지 하는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물론 우리 모두가 어떤 방면에서는 그 장님 여성과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가 처한 상황, 입장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긴 부분을 우리의 세계관의 왜곡을 통해서 메꾸어 버린다.

 

아름다운 여배우와 동행하는 그 장님여성은 사람들이 그 여배우에게 친절하고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 엉뚱한 생각을 할 가능성이 크다. 그녀에게 친숙한 공간은 본다는 개념이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름다움이 뭔지 이해가 없거나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친숙한 것으로 설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엉뚱하게도 그녀는 그 여배우의 목소리가 좋기 때문이라거나 그녀가 부자이기 때문이라거나 혹은 반대로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나쁘거나, 아는게 없거나 어떤 지방출신이라거나 어떤 대학출신이라거나 밥을 잘먹는다거나 하는 이유를 그 친절함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낼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정답을 볼 수있는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철없는 아이가 안타까운 부모의 마음과는 달리 세상을 엉뚱하게 해석하는 것을 우리는 늘상 본다.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한 내가 만든 이야기를 더 좋아하지만 이와 관련된 다른 이야기들은 꽤 있다. 예를 들어 한 백인이 분장을 통해 흑인으로 변한 후 동네 술집에 들어갔다거나 무척이나 예쁜 여자가 분장으로 뚱뚱한 사람으로 변해서 살아봤다거나 했다는 이야기다. 그런 경우 그런 실험을 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고한다. 자기 생각에 세상은 이러저러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의 분장으로 변한 것만으로도 세상이 자신을 대하는 모습이 전혀 달랐고 그래서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게 되었다. 예쁜 여자나 백인 남자는 세상 사람들이 원래 이정도는 친절하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은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못생겨진 모습으로 살아보니, 흑인으로 살아보니 사소한 뭔가를 누구에게 부탁해도 들어주는 일이 없더라 같은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회사의 임원이라던가 사장인 사람은 자신들이 매우 유머에 넘치는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기 쉽다. 반면에 보잘것없는 지위에 있는 사람은 그 반대로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심지어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사람들도 그렇다. 회사의 사장이 농담을 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물론 그 이유는 사장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문제는 그러다보면 사장은 스스로가 유머있는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처음에 억지웃음을 웃었던 사람들도 스스로 착각에 빠진다. 자꾸 웃다보니 억지로 웃는다는 느낌이 드는게 아니라 실제로 웃겨서 웃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행동은 우리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을 해석해서 자기를 발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장님과 여배우의 문제와 관련있는 것은 단순히 사회적인 인간관계의 차원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이 장님과 여배우의 문제는 사실 과학과 형이상학의 수준까지 그 적용 범위가 뻣어 있다. 이 세상은 물질로 되어 있다. 나는 유물론자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을지 모른다. 나는 유령같은 거 영혼같은 거 안믿는다하고 말이다. 유령과 영혼을 안 믿는 것은 그다지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당신이 물질이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믿지 않는게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너무 많은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물질이 뭔지 모른다. 나는 이 세상이 물질로만 되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물질이 뭔지 모른다. 이 두 개의 말을 이렇게 붙여놓으면 얼마나 허무한가. 물론 우리는 물질이 뭔지 전혀 모르지 않는다. 아주 많이 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장님여성이 만난 여배우와 같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장님여성도 그 여배우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 하지만 그 핵심적 부분을 모르기 때문에 그 여배우를 안다고 해야할지 모른다고 해야할지 알수 없는 상황에 있다.

 

만약 물질이라는 것이 그렇게 자명한 것이었다면 19세기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물리학은 19세기에 완성되고 끝났어야 하고 양자역학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물질로 된 세상을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전자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가진다 같은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한다. 19세기 사람이 타임머쉰을 타고 오늘날로 날아왔다고 하자.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물질론자이며 유령따위는 안믿는다고 하면 그 19세기 사람은 이 무슨 미친소리인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19세기에 몰랐던 것은 결코 작은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은 뉴튼역학에 대한 사소한 수정이 절대 아니다. 양자효과가 아니라면 태양은 진작에 차게 식어버렸을 것이며 입자는 고체가 되지 못하여 DNA같은 분자도 만들어지지 못했을테니 생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내는데 양자효과는 엄청나게 크게 쉴새없이 작동하는데도, 그걸 뻔히 눈앞에서 보면서 그 양자효과덕분에 존재하게 된 19세기 사람들은 그 양자효과때문에 빛나는 태양아래에서 이제 이 세상에는 더 밝힐 비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물질론자인가? 이제 세상에는 우리가 밝힐 비밀이 거의 없는가? 우리가 뭘 모르는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세상은 물질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지만 물질이 뭔지 모른다. 우리가 유령이니 영혼이니 내적인 세계니 혹은 지식으로는 다 말할수 없는, 느낌의 체험속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비물질적인 부분, 우리가 몸과 마음의 이원론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부분은 우리가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말일 수 있다. 모르니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말할 것이 없다. 그게 뭐냐면서 논증을 펼쳐봐야 말이 뱅뱅 돌뿐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세상에는 무슨 신비한 것이 있다고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다. 무지한 자신을 느끼는 것은 위화감을 만든다.

 

이렇게 볼때 만약 의식의 이해라는 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모르는 부분을 다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부분에 대해 무지한 유한한 존재로 남을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식을 이해한다던가 영혼이나 이성을 이해한다는 것이 뭘 묻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질문 자체를 잘 모르니 최종적 답은 결코나오지 않고 질문의 의미만 우리의 무지의 경계가 달라짐에 따라 달라져갈 것이다. 세상은 물질과 정신으로 되어있다는 말은 제한적 의미만 있기 때문에 맞지도 틀리지도 않다. 우리는 그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 배우는 중이다.

 

물론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는 유한하고 우리가 못보는 것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빨리 세계적 역사적 수준에까지 가버리지는 말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 대해 나는 잘 모르지만 사실은 당신은 내가 그렇듯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므로 사실 개인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저 평범한 일상속에서 이 장님과 여배우를 기억하는 것이다.

 

당신이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평생 살았던 사람이라고 해보자. 당신은 따라서 자신이 한국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알고 있다는 그 한국은 당신이 보고 느낄수 있었던 그것들을 가지고 짜맞춰서 만들어 낸 한국이다. 당신은 자기 스스로나 한국 사회에 대해 이런 저런 자부심을 느끼고 이런 저런 수치심과 분노를 느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은 어느정도나 당신의 무지와 무능력과 관련된 것일까. 당신은 혹시 자기가 장님인지 모르는 장님이 아닐까. 그래서 아주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나라에 태어났으면서도 그것을 저주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신은 속고 있다는 위화감속에서 당신 스스로 만들어 낸 유령과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우리는 누구나 어떤 면에서 장님이다. 진짜 질문은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런 방면으로 얼마나 성실했는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자기의 시야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것을 걱정하면서 살아왔을까. 우리는 정말 작은 닭장속에서 키워지는, 곧 먹혀버릴 닭같은 존재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지만 우리는 우리의 시야에 대한 걱정을 하는 대신에 서둘러 사료속에 머리를 처박아 버리면서 살지 않았던가? 오히려 그런 생각을 길게 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을 모른다면서 현실론을 설교하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가 너무나 대단하신 위인이나 세계적 철학자나 고민할 지나치게 넓은 시야의 넓이에 대해 고민할 그런 사람인가?

 

장님과 여배우의 문제를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고 있을 수 있다. 아니 분명히 속고 있다. 단지 우리는 어떻게 속고 있는지 모른다. 세상에서 정말로 완벽히 분명한 것에 무한히 가까운 것은 우리는 무지하다는 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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